청소년교육
오늘의 청소년이라는 단어는 욕지거리로 들려진다는
어느 교육학자의 말은 우리 청소년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케 한다.
몇 해 전 KBS/TV “한국의 십대. 무엇이 문제인가?”를 방연했다.
10대들의 모든 문제가 적나라게 방영되었다.
여기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응은 “매우 위기 상황이다”라고 평가 했다.
토론 중 청소년과 부모의 공동의 장에서 골이 너무 깊었고
청소년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 매우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 청소년들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변(辯)이 있었다.
문제가 되어지는 음주, 흡연의 문제.
이성교제의 문제 또한 사회 전반에 대해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한 예로 부모님들과의 대화에 관한 문제에서 볼 수 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청소년들은 부모님들과의 대화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화의 주제 문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서울 소재 교회 학생 750명에게 설문한 조사를 보면 대화 주제가
학교 성적에 관한 이야기가 단연 으뜸이어서 750명중 739명이었다.
청소년 문제가 만연화 되는 현상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공부가 면죄부가 되는 풍토다.
실수와 비행이 성적으로는 다 덮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직하고 착해도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인정받지 못한다.
둘째는 그릇된 자녀관이다.
“내 자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식과 “기 살리기 교육”이다.
내 자식 기죽여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경쟁의식을 촉발시켰고,
만사에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하여 협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셋째. 물량주의 가치관의 풍토다.
“정직하면 못 산다”는 의식이 팽배하여 무슨 짓(?)을 하여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의식이다.
넷째는 자녀의 영적교육에 대한 무관심이다.
학교 지상주의로 흐르는 현실에 편성하여 신앙은 차선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학교 행사 때문에 주일예배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신앙생활은 대학가서 하면 된다는 의식이다.
자녀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편견이나 사회적 통념에 앞서 생각 할 것은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오르시면서 예루살렘 여인들의 눈물을 보시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23:28)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급하고 바쁜 일을 하기 전에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과연 무엇이 중요한 일이겠는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먹고 자란 자녀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