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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Joyfule 2015. 11. 13. 09:45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글쓴이: ㄱㄱㅏ ㅊㅣ™ 번호 : 61조회수 : 02007.08.22 10:58

 

5.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

1.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에 대한 달레 기록과 그 문제점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귀츨라프의 조선 서해안 방문에 관한 1차사료들에는 원산도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그러나 2차사료이긴 귀츨라프의 원산도 도착을 언급한 역사서 있다. 달레가 처음으로 원산도 도착을 언급하였고 백낙준이 이를 인용하였으며, 리진호는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통해 그 가능성을 추측하였다. 따라서 그 역사적 진정성을 먼저 따져 보려고 한다.


1) 달레(C. Dallet)는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방문한지 42년이 지난 1874년에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원산도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해[1932]) 여름에 조선 해안에는 영국의 국기가 나타났다. 성서협회의 몇몇 간부들이 보낸 듯 싶은 상선 한 척이 충청도 서쪽 해안에 이루어진 만의 어귀 가까이에 있는 원산도에 접근해 왔다.”

이 배는 ‘야소교’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그곳 주민 중 천주교인들이 몰래 방문하였다가 “어떤 개신교 목사가 ‘지신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오’라고 외교인들이 즐겨 쓰는 인사말”을 하자 인사도 받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배는 1개월 이상 그곳에 정박하면서 종교서적 궤짝을 해변 여러 곳에 내려놓고, 배를 방문한 관리를 들을 통해 한문책과 영어 책을 여러권 임금에게 드렸으나 왕은 그 선물들을 받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열지도 못하게 한 채 즉시 그 외국인들에게 환송케 하였다고 들은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상륙을 포기하고 “나라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을 내리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리진호는 달레(C. Dallet)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 한번도 온 적이 없는 그가 귀츨라프가 서해안에 온 지 40년이 지나서 정확한 출처도 없이 기록한 것이 정확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달레의 교회사(1874)에는 귀츨라프의 항해기(1834)나 린제이의 보고서(1833) 조차 직접 읽은 것 같지 않다. 그 개신교 목사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해안에 도착한 날자 모른 것으로 보아 그렇다. 단지 소문으로 들은 것을 출처도 없이, 이름 모를 개신교 목사가 그 해 여름 어느 날 원산도에 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은 더욱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2) 백낙준은 1927년 저술한 ?한국개신교사?에서 1832년 ‘배가 충청도 서해안 원산도에 정박’하였다는 달레(C. Dallet)의 글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에 정박한 날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린제이 보고서만 인용하여 1832년 7월 27일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베끼게 하였다고 적고 있을 뿐, 그 섬에 상륙하여 감자를 심어 주었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원산도 소재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 내용을 고증해 보면 다음과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3) 리진호는 ?귀츨라프와 고대도?(1997)라는 책에서 귀츨라프 항해기 등을 역주(역주)하면서, 8월 10일의 일기에 ‘부근에 큰 섬에 올라갔는데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기록하였는데 이 섬이 원산도가 아닌가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도 근방의 가장 큰 섬은 안면도인데 이 섬은 린제이 선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린제이 섬이라고 하였고, 그 다음으로 큰 섬이 원산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8월 10일 상륙한 ‘근처의 가장 큰 섬’이 원산도라고 추측하여도, 귀츨라프와 린제이의 기록에는 이 큰 섬에서도 감자나 주기도문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를 전해 주고 그 섬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리고 ‘근처의 가장 큰 섬’은 조선 관리들에 의해 주민 접촉 금지가 내려진 이후 몰래 잠간 방문한 곳이다. 귀츨라프 일행이 8월 7일 야간을 이용하여 관리들 몰래 간월도(간월도)도 앞바다에서 태안의 주사창리(주사창리) 앞 바다까지 접근하여 책자 4권을 주고 이튿날 돌아 온 것을 조선 관리들이 알고 8월 10일부터는 그들에게 주민 접촉을 금하고 조선인들에게도 귀츨라프 일행에게 무엇이든지 받는 자는 엄히 다스린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8월 10일에는 원산도에 상륙하여 장기간 머물면서 전도지나 주기도문이나 감자 종자를 나눠 주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런 기록도 전무하다.

2)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


앞에서 분석한 사료들을 볼 때 “카알 귀츨라프(의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이라고 기록한 원산도 소재의 ?선교사 귀츨라프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은 1874년 달레(C. Dallet)가 정확한 사료가 아닌 풍문을 듣고 1932년 여름 어떤 개신교 목사가 원산도를 방문한 것 같다고 부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휘트모어(1920)와 백낙준(1929)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인용됨으로서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이 와전된 것이다. .


2) 달레는 1832년 여름 ‘어떤 개신교 목사’가 원산도에 왔다고 하였으며, 백낙준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여, 그해 여름 원산도에 온 개신교 목사가 귀츨라프라고 했다. 그러나 달레도 백낙준도 귀츨라프가 원산도에 온 날자가 7월 17일이라고 밝힌 적이 없다. 달레를 인용한 휘트모어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장산(장산)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에는 7월 17일 원산도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는 틀린 내용이다.


3) 7월 17일 이곳 원산도에 도착하였다고 하나, 귀츨라프나 린제이 모두 7월 17일에 방문한 곳이 바실만(홍주만) 북쪽 또는 대청군도(대청군도) 남쪽에 있는 장산곶(장산곶)이다. 그들이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으로 오해한 그곳은 장산곶(장산곶)이 분명하다. 황해감사(황해감사) 김난순(김난순)의 보고도 7월 18일(음력 6월 21일) 이양선이 도착한 곳이 “장연의 조이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 ‘창선도’(진단학회)이거나 ‘백령도 부근’(김양선)이라 하여도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원산도와는 거리가 멀다.


4)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Gan-Keang)에 머물다가 8월 10일 잠간 방문한 ‘근처의 가장 큰 섬’을 원산도라고 추측할 개연성은 많다. 이에 근거하여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도 방문하였다고 인정할 지라도 그 날자가 8월 10일이므로 기념비의 ‘7월 17일 이섬[원산도] 도착’은 날자의 불일치로 인해 사실과 다른 내용임에 틀림없다.


5) 7월 17일 ‘Chawang-shan이라는 섬'에서도. 8월 10일 원산도로 추정되는 ‘근처의 가장 큰 섬’에서도 ‘전도지, 주기도문, 감자 종자를 나눠주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 여러 섬 중 최소한 네 곳(Chawang-shan, Gan-Keang, 태안의 주사창리 앞 포구, Gan-Keang 근처의 가장 큰 섬)을 방문 했으며, 상륙한 곳 마다 책자를 나눠준 것도 사실이지만 가는 곳마다 주기도문과 감자 종자를 나눠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주기도문을 번역하고 감자종자를 심어준 곳으로 기록된 곳은 고대도(Gan-Keang) 뿐이기 때문이다.


6) 기념비에는 “전도지, 주기도문, 감자 종자를 나눠 주었다”고 하였지만 귀츨라프의 공헌은 주기도문을 최초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며, 감자 종자를 좋은 땅을 골라 직접 심어 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준 것이며, 한글 자모를 세계에 알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순조임금에게 한문성서를 전하려고 한 것이 중요한 선교의 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산도의 기념비에는 이처럼 중요한 사실(사실)들이 모두 누락되어 있다.


7) 귀츨라프의 출생지를 ‘포다라니’라고 기록한 것은 포메라니아(Pomerania)의 오기(오기)이며, 귀츨라프가 독일 사람이긴 하지만 1823년부터 내델렌드선교회 소속하다가 1830년부터는 영국선교회로 소속하여 조선 선교에 참여했으므로 영국대사관도 표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념비를 세운 이들의 실명(실명)이 모두 빠진 것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귀츨라프 방한 150주년을 맞이하여 원산도에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를 세운 분들의 높은 역사의식과 깊은 정성은 크게 평가하지만, 역사적 고증을 소흘히 한 것에 대하여 큰 아쉬움을 갖게 된다. 이 앞으로 한국교회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기리는 기념비나 사표를 세울 때에는 이와 같은 우(우)가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를 기념하는 기념비나 사표(사표)가 제자리를 찾아 고대도에 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1998.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