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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Joyfule 2015. 11. 12. 08:18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글쓴이: ㄱㄱㅏ ㅊㅣ™ 번호 : 61조회수 : 02007.08.22 10:58

 

 4. 귀츨라프 목사의 조선 선교(1832.7.17-8.17)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처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로 린제이를 임명하였다.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 선교사 모리슨(R. Morrison)의 추천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요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 A. G?tzlaff 1803-1851) 목사를 선의(선의) 겸 통역관(통역관)으로 동승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준비한 함허스트경호(Sir. S. Lord Amhest)는 1천 톤 급의 군함으로 선장 리(Rees) 외에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이 행해의 목적은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관의 통상 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츠라프 목사는 이를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절호의 선교기회로 여긴 분명하다. 모리슨도 그가 번역한 많은 한문 한문성경을 지원하였고, 귀츨라프 자신도 선교에 필요한 책자와 선물을 많이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간 동안 1832년 7월 17일부터 8월 17일까지 백령도 앞 바다에서 제주도까지 항해하면서, 고대도에 20일 이상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의 조선선교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귀츨라프에 의하면 1832년 2월 27일 중국 꽝뚱(광동)을 출발한 후 타이완을 거쳐, 7월 17일 “바실만 북쪽의 Chawang-shan이라는 섬”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귀츨라프 일행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조선 사정에 밝아 조선의 쇄국정책과 카톨릭에 대한 박해를 알고 있었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해변에 올라가 두 조선인을 만나 어떤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lion buttons)를 주었다.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대청군도(대청군도, Sir James Hall's Group) 북쪽 ‘Chang-Shan Pungsang'이라 하였다. 이 날 린제이는 조선 국왕에게 보낼 통상을 청원하는 편지를 작성하였는데, 자신의 이름을 “Hoo Hea-me"(호하미)라 적고 날짜를 양력과 음력으로 ‘주후 1832년 7월 17일, 도광 12년 6월 20일’ 이라고 병기하였다. 이튿날(18일) 일행 8명 중 귀츨라프를 제외하고 모두 단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뒤 상륙하니, 조선인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불친절하고 식량을 팔지도 않고 서신도 받지도 않고 방문자들을 떠나도록 요구하여서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인 18(음력 6월 21일)일 지역 관리를 만나 국왕에게 보낼 청원서를 전달할 고관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피하였다. 어떤 사람은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군병을 불러 몰아 내겠다고 위협하였다. 몇몇 주민에게 책과 단추를 선물로 주었더니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책은 도로 돌려주고 갔다. 그래서 ‘책을 직접 전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틀동안 ‘Chawang-shan island'에 머물면서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첫 인상을 귀츨라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al)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혀서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지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 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인간의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동양사정에 밝은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박해 사실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입관과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린제이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날(18일) 일행 8명 중 귀츨라프를 제외하고 모두 단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뒤 상륙하니, 조선인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불친절하고 식량을 팔지도 않고 서신도 받지도 않고 방문자들을 떠나도록 요구하여서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한다.
7월 17-18 양일간 귀츨라프 일행의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 방문에 관한 순조실록 32년 8월 11일자(양력 9월 6일) 황해감사(황해감사) 김난순(김난순)의 보고는 이러하다.

“지난 6월 21일[양력 7월1 8일] 이양선 한 척이 장연의 조이진에 와 정박하자, 관내의 어부들이 생선과 서책을 바꾸고 그 진의 이교 역시 필찰로 문답한 적이 있었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 언어 복색 등이 홍주에 정박한 영길리배와 다름없었으나”

이에 근거하여 진단학회의 ?한국사-최근세사후편?(1956)에는 귀츨라프 일행이 “음력 육월 이십일일[양력 7월 18일]에 먼저 황해도 창선도(마연현 조이진 몽금포 전양)에 들러 현지 이교와 필답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귀츨라프 일행이 7월 18일 도착한 곳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 창선도(창선도)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성록?(일성록)은 귀츨라프 일행이 거쳐온 조선 지역을 문정(문정)하니 그들이 장산(장산)과 녹도(녹도)라고 대답한 것으로 적고 있다. .
귀츨라프는 장산에서 성경이나 전도문서를 직접 전해 줄 기회가 전혀 없었기에 이틀만에 그곳을 떠난다.


7월 23일 남쪽으로 계속 항해 한 끝에 여러 섬과 암초 사이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린제이는 22일 바실만에 정박하였고, 23일 여러 조선인이 배에 찾아 왔으나 필담을 나누지 못했고 23일 ‘Teng-no'라는 한문에 능한 조선인의 방문을 받고 필담을 통해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정박한 곳이 ‘Lok-tao'(녹도) 동쪽의 조그마한 불모도(불모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7월 24일 ‘Teng-no'가 다시 찾아와 지금 정박한 곳이 대단히 위험하므로, ‘Gan-Keang'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히 닻을 내릴 수 있고 고관을 만나 무역상담을 하고 식량도 구할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린제이는 그에게 그곳의 관리에게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적은 편지를 전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8일) ‘Gan-Keang이라는 항’에 도착하여 정박하기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된 곳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Teng-no'와 함께 온 고관의 비서(서생) ‘Yang-chih'라는 홍주목사의 서생(서생)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돌아갔다.


7월 26일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이 있는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의 방문을 받는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들이 조선을 방문한 목적이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선물을 전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조선관리들이 어느 정도의 호의를 보이자 한 나절 넘게 선물을 포장하였다. 그는 조선 국왕에게 성경책을 진상하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린제이 선장은 성서 한 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전도 문서 각 한 부씩을 포장하여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갑판 위에 찾아 온 사람들이 성서를 기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은둔국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기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라 하여도 죄 많은 인생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귀츨라프가 국왕에게 보낼 선물 목록에는 성서 한 질과 전도문서 그리고 “유리 그릇, 옥양목(calicoes), 모직물(camlet),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 등이었다. 이 서한은 붉은 비단에 싼 통상청원서이다. 귀츨라프 일행은 마을에 상륙하여 서한과 헌상품을 두 고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위탁받은 물품을 빨리 진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한국 측의 최초의 기록은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도착한 지 10여일이 지난 순조 32년 7월 8일(양력 8월 4일)자의 보고이다.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의 장계(장계)를 올려 이양선의 출현은 비변사에 보고하였고, 그 내용은 같은 날짜의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과 ?일성록?(일성록)에 기록되었다.

“관내에 고대도에 표류한 사람이 있어 정박시킨 후 그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필 담으로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인지 물으니, 영길리국이라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다음 날인 7월 9일(양력 8월 5일) 이를 승정원에 보고한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통역관인 역학(역학) 오계순(오계순)을 파견하여 이양선의 동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승정원의 지침에 따라 이 사건을 처리한 후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를 떠나도록 처리한 후 이 사안이 마무리되자 7월 21일(양력 8월 17일)자로 공충감사(공충감사) 홍희근(홍희근)으로 하여금 이 사건 전모를 정리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고, 이 날짜의 순조실록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6월 25[양력 7월 22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삼범죽선) 1척이 홍주(홍주) 고대도(고대도) 뒷 바다[후양]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영길리국)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로 하여금 달려가 문정(문정)하게 하였더니…”

그리고 이 사건을 정리하여 예부(예부)에 발송한 자문(자문)은 다음과 같다.

“본년 6월 26일 유시(유시) 경에 이양선(이양선) 1척이 본주(본주) 고대도(고대도) 안항(안항)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역학) 오계순(오계순)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문정)하게 하였더니….”

따라서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에 대한 1차사료인 린제이 보고서와 귀츨라프의 항해기 그리고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 등 조정의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의 내용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이양선이 서해안에 나타난 순조 32년 음력 6월 25(충청도 감사 홍희근의 보고)또는 26일(예부에 보낸 자문)은 암허스트경호가 서해안에 도착한 서기 1832년 7월 22일(린제이 보고서) 또는 23일(귀츨라프 항해기)과 일치한다.
둘째로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정박지로 기록한 Gan-Keang'이라는 항구 이름은 홍주목사 이민회 등의 보고에 의해 충청도 홍주(홍주) ‘고대도 후양 또는 안항’이라고 밝혀졌다.
셋째로 귀츨라프가 만난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은 순조실록에 의해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와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로 확인되었다.
7월 27일에 다시 ‘Ten-no와 Yang-chih'가 와서 “모든 선원의 이름과 나이를 다시 세밀하게 적어 갔다”고 한다. 일성록에는 조사 결과 선원 67명의 명단이 한문으로 자세히 보고되어 있다.

“선주(선주)는 사품(사품) 자작(자작) 호하미(호하미)이고, 6품 거인(거인)인 의생(의생)은 갑리(갑리)이고, 출해(출해)는 이사(이사)이며, 제1과장(제일과장)은 파록(파록)이고 제2과장(제이과장)은 심손(심손)이고…”

린제이가 12년 7월 15일에 작성한 국왕에게 보낸 문서 말미에는 “Hoo Hea-me"와 ”Kea-le"'라는 서명(Sign)이 적혀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 등에 기록된 ‘호하미’가 바로 린제이의 이름 “Hugh Hamilton"의 한역이다. 함께 서명한 “Kea-le"는 귀츨라프의 이름 “Karl"의 중국식 음역이며, 한문으로는 ‘갑리’로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의생갑리’는 수행 의사 귀츨라프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출해이사’는 항해를 관장하는 선장 “Rees"를 지칭한다.
27일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에 상륙하여 섬 전체를 돌아 보았다. 단골 조사관인 ‘Yang Ghih'와 ‘Teng-no'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필담(필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또한 조선인들이 비종교적인 민족이어서 생사간에 위로를 주는 구원의 도리를 구테어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가졌고, 기독교가 시작한 시대에 대해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또한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여러 번 들려주고 읽어 주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문서와 복음서를 주었으며, 성서를 줄 때에는 역사와 지리책도 함께 주었다. 한국땅 최초의 선교사역에 대해 귀츨라프는 이렇게 기대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간구한 결과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이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져 버릴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머잖아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되면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는 가장 계층의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귀츨라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이날 양이(Yang-yih)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번역하도록 시도한 기록이 있다.

“27일 오랜 설득 끝에 우리는 양이에게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자, 그는 그것을 한글로 읽는 동시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그의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 고관들이 알면 목이 달아 날 것이라는 경고하였다. 그는 그 종이를 없애버리기를 애걸하였다. 그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어 잠그고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김양선은 “양씨(양씨, Yang Chih)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서 한글 역의 효시가 되는 의의 깊은 일이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6개국어 이상에 능통하였던 귀츨라프가 이 날 받아 적은 한글 자모를 그해 11월의 “The China Repository"에 발표하여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조선 사람의 고유한 글인 한글이 완전한 표음문자이며, “글자의 짜임세가 매우 간단하면서도 착상이 교묘하다”고 하였다. 그는 한글 책자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7월 30일 오후 귀츨라프는 해변에 감자를 심으로 갔으며 감자를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법을 글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린제이는 이 일 더욱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리는 가장 좋은 땅을 찾고 골라서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둘러서서 놀란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재배법을 설명한 종이는 땅 주인에게 주었고, 그는 잘 가꾸겠다고 약속하였다.”

7월 31일에는 며칠 전에 섬을 돌아보면서 야생 포도를 발견한 것을 기억하고 주민들에게 포도주와 포도즙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8월 2일(음력 7월 6일)은 고관에게 서신과 진상품을 전달한 지 8일째 되는 날이다. 귀츨라프는 늘 하던 데로 귀츨라프는 약을 주었는 데, 이 날은 감기 환자 노인 60명분의 약을 처방하여 나눠주었다. 그리고 이날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우(Woo)라는 3등급 문관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7월 8일(양력 8월 4일) 홍주목사 등으로부터 영길리(영길리) 선박의 고대도 인박(인박)에 관한 최초의 보고를 받은 다음 날인 7월 9일, 승정원에서는 문정역관(문정역관) 오계순(오계순)을 파견하여 이양선을 자세히 문정하도록 결정한다. 그리고 우의정 김이교(김리교)의 지시와 승정원의 지침이 따라 홍주목사 등이 조정의 사전 허락을 받기도 전에 외국인의 통상 청원서와 진상품(주문과 예물)을 받은 것은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와 사적(사적)으로 통상한 부당한 처사이므로 차후 엄히 문책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사로이 받은 주문과 예물은 전례도 없는 일이므로 귀츨라프 일행에게 환급 조치할 것을 지시한다.


8월 5일(음력 7월 9일) 오계순은 암허스트 경호에 승선하여 화물을 자세히 조사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7월 11일자로 조정에 보고된다.
8월 7일(음력 7월 11일)에는 오계순의 지시로 김대인(수군우후 김영수)이 서한과 진상품을 도로 가지고 오자, 귀츨라프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노인은 이 선물을 임금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근심하였다.


이 날 귀츨라프 일행은 작은 배로 큰 항만을 탐사하기 위해 서북쪽의 어느 섬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전해 주고 그 이튿날 새벽에 돌아 왔다. 이날은 양력 8월 8일(음력 7월 12일)인데 순조실록과 일성록의 충청감사 홍희근(홍희근)의 보고에는 “7월 12일 모양이 이상한 배 한 척이 서산의 간월도 앞 바다로부터 태안의 주사창리 앞 포구에 와서” 책자 4권을 주고 갔다고 한다.


8월 9(음력 7월 13일)일 조정에서 보낸 특사인 오계순이 다시 와서 귀츨라프에게 ww가서국ㄱ wnn 1111112 “당신의 서한과 선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오. 우리는 당신과 이일을 성사시킨 나이 많은 두 관리의 잘못을 물을 것이오. 이는 불법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청한 대로 국왕에게 올릴 수 없으므로 모두 당신께 되돌려 주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귀츨라프와 린제이는 필담을 통해 외국의 통상 사례를 들어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통상청원서와 진상품에 대한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라고 하고선 이제는 국왕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하는 조선 관리들의 변덕을 비난하고,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였다고 후회하였다.


8월 10일에는 이곳을 떠날 계획이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주민들이 암허스트 경호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정박지 근처의 가장 큰 섬에 상륙하여 잠시 둘러보았다.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하였다.


8월 11일(음력 7월 15일) 귀츨라프일행이 요구한 물품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김대인(김영수)이 서한과 진상품을 되돌려 주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였지만, 귀츨라프는 한 번 준 것을 도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하여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넓고 안전한 항구가 있는 ‘Gan-Keang'을 떠나며, 이해력은 많으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과 울면서 작별하는 심사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의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겠다.
조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Gan-Keang'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두움이 가고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다같이 바랄 뿐이다.”

귀츨라프가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에게 전달한 성서는 한양으로 보내지지 않았고, 그 경위만 보고되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에 의하면 음력 6월 17일 귀츨라프 일행이 떠난 후 그들이 남기고 간 주문(주문)과 예물(예물)은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에 봉하여 홍주 관고(관고)에 보관하게 하고, 충청 수사(수사) 이재형(이재형)과 우후(우후) 김형수와 홍주목사 이민회는 타국과 사적으로 교류하고 문정(문정)을 지연하고 처리를 전착(전착)한 죄를 물어 파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