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3. 귀츨라프의 생애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k August G?tzlaff, 1803-1851)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테어 났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 혼혈아였다. 네 살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에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시에 있는 혁대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1820년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잽싸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하였다. 그는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die Missioons Schule Janiches)의 왕립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야니케(Janiche)가 교장으로 있는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국어를 습득하였다고 한다.
1823년 네덜란드선교회(Netherland Missionary Society)로부터 선교사 지원 요청을 받은 예니케 학교는 교수회의를 열러 귀츨라프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동남아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 네델란드 로테르담에 가서 말레이어(Maley)를 공부하면서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때마침 그가 흠모하던 중국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런던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달려가 그를 만나, 20년간의 중국 선교사역에 관한 얘기를 직접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바타비아에서 귀츨라프는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 메드허스트(W. H. Medhurst, 1976-1857) 함께 1년간 준비한 후 동남아시아에 여러 지역(수마트라, 자바, 빈탕섬, 말라카, 싱가폴, 사이암)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을 순방하며 선교할 계획을 세운다.
1828년 초 귀츨라프는 준비가 채 되지 않았지만 혼자서 사이암 선교에 떠났으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네델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싱가포르를 떠나 8월 23일 런던선교회의 톰린목사와 함께 최초의 사이암 선교사로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복음서와 로마서를 사이암어로 번역하였다.
1830년 2월 11일 런던선교외에서 일하는 뉴웰(Maria Newell)과 결혼한 후 이들은 필생의 사업으로 신구약성서를 사이암으로 완역하였다. 1831년 2월 16일 귀츨라프 부인은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아이 하나와 함께 죽고 만다. 이 충격과 건강의 악화로 귀츨라프는 그해 6월 중국으로 떠나며 딸 아이를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아이 마저 죽게 된다.
이런 가정적인 비극의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귀츨라프는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중국 연안을 따라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떠난다. 1차는 방콕을 떠난 텐진(천진)까지의 선교여행이고, 2차 선교여행은 모리슨의 소개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 교역지 탐사선에 동승한 것이었다. 이때에 한국 서해안을 1개월간(1832.7.17-8.17) 방문하면서 20일 가까이 고대도에 머물렀다. 3차는 무장한 영국국적의 아편 밀수선을 타고 수행하였다.
1834년 재혼 한 후 마카오에 정착하여 12월 모리슨 박사가 별세하자 귀츨라프는 주중 영국대사의 비서 겸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선교활동에 관한 기사와 논저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개역하고 중국어 문법책과 한영사전을 발간하였다.
1837년에는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을 통해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표류 어부 7인을 송환하는 기회를 일본 선교의 계기로 삼으려고 오키나와를 방문하나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1839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정부의 통역관으로 종사하고, 43년부터 1851년 8월 9일 죽을 때까지 홍콩정청에 근무하면서 목회자 양성학교를 개교하여 4년동안 47명의 중국인 목회자를 배출하고, 중국인 협회(the Chinese Union)를 결성하여 약 천명의 권서인과 백명의 설교자를 파송하여 중국오지 선교를 지원하였다. 그의 선교 방법은 영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채택되어 중국내지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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