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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는 믿음 - 아브라함

Joyfule 2019. 11. 10. 00:46

 

      

       축복 받는 믿음 -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축복은 믿고 순종하는 데서 온다. 복 받는 공식은 아래와 같다.

<믿음> + <순종> = <축복>  

기적은 어저께 믿기 시작한 사람도 체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대개는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믿음의 소유자라야 받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흔히 말한다. 뿌린 것이 있어야 거둔다고,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기 위해,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온 믿음은 아직은 나 중심의 초보적 믿음이다. 순종의 믿음, 축복 받는 믿음은 그 믿음의 중심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간 믿음이다. 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는 믿음이 아니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맡기고 하나님 뜻에 나를 맞추는 믿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나를 바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 받겠다고 교회로 몰려오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만한 믿음이 될 수 있나?

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백년을 가도 그런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죽으라시면 죽겠습니다, 하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맡기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신다.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큰 순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이지만, 그것 말고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는 순종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가끔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 문제가 바로 순종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시험하실 때에는 하나님 한쪽 손에는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가득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라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 뭐라구요? 아니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요? 그럴 수가....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너무 하십니다.”하면 불합격이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던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하나님께 따지지 덤비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결코 한 번 하신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다.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이 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은 이삭을 결코 죽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니,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도 믿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이므로 우리에게 좋게만 하시고 나쁘게는 절대로 안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선하신 분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절대로 나쁘게 안 하시고 좋게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흘이나 걸리는 모리아 땅까지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생각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 이거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하나님도 거짓말 하십니까? 나는 이삭 못 바쳐요.”하고 항의하고 돌아설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깊어만 갔다. 하나님이 현실과 동떨어진 명령을 나에게 하셨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없이 순종하는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원숙한 믿음인 것이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은 눈물을 감추고 아들을 속이며 거짓으로 한 말이 결코 아니다. 그의 믿음의 참다운 고배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쥐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아들 이삭을 잡을 작정이었다. 정말로 이삭을 잡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뿐 아니라 그 능력도 믿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까지도 살피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바치려는 것을 직접 보시고서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 행위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신다. 아무리 입으로 “믿습니다!”를 외쳐도 소용이 없다. 행위로 그 믿음을 보여 드려야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를 위해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하셨다. 즉 그 아들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기적을 일으키는 순종 - 모세

 


나일강에서 공주가 모세 발견


공주가 나일강에서 모세 발견

 

모세가 이스라엘 지손들을 이끌고 홍해 광야 길로 나갈 때, 애굽 군대가 뒤쫓아 왔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위기를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곧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부르짖긴 해도 과연 하나님이 구해 주실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마구 비난한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겠노라”(출 14:10-12)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있을 것을 말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나라”(출 14:13-14)

이렇게 말하고 모세는 여호와께 구원해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모세 역시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을 통해 이 민족적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출 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은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계획하신 대역사를 하시는 때이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면 살려주시고 안 그러면 가만히 죽게 내버려두시는 그런 때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때인 것이다.

 
갈라진 홍해속을 이끄는 모세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옮기지는 기적은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 길로 이끄실 때, 여호와께서는 이미 홍해를 가르실 것을 예정하셨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자 홍해 바다는 갈라졌다.

하나님께 열심히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나의 형편에 맞추는 믿음에서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전면에 나서서 그 도구로 쓰임을 받는 믿음에서만이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너는 어서 저 앉은뱅이를 내 이름으로 일으키라” 하고 나에게 명령하셨을 때, 내가 그 앉은뱅이를 주의 이름으로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믿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자 할 때, 아무리 소리높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해도 앉은뱅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성직자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주의 뜻대로 쓰임을 당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까의 그 두명의 주의 종은 주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주의 이름을 빌어 자기의 능력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고 부르짖고 하는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초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리고 부르짖고 해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고자 하는 <사람> → <하나님> → <기적>이다.  믿음은  내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무엇이가를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믿음이다.


원숙한 믿음은 내가 하나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곧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참 믿음이며, 이런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모세와 불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아주 어렵고 하기 힘든 것으로 우리에게 순종을 시험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쉽고 작은 것으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자.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이 불평을 들으시고 불뱀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 죽는 자가 많아지자 백성이 모세에게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아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 중에서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다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게 하신 것은 그들의 불평불만에 대한 벌이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올렸을 때, 백성 중에는, “이 무서운 뱀의 독이 전신에 퍼져서 살이 썩어 가는데 아니 놋뱀을 올려다본다고 살아? 웃기는 수작하네.” 하고 장대 위의 놋뱀을 올려다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뱀의 독으로 썩어가는 자신들의 육신만 보았지, 하나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불평불만이나 불순종으로 인한 벌은 돌이켜 순종만 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쉬운 순종을 요구하셨다. 눈을 들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올려다 본 사람은 순종함으로 살았고, 올려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불순종으로 죽었다. 죽은 사람들은 참으로 바보 같은 인간들이다. 그냥 슬쩍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옹고집이라고 그걸 안 보고 죽으냐 말이다.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무슨 옹고집이라고 예수 안 믿고 죽느냐 말이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것일수록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받는 복도 크다.

그러나 불뱀의 경우와 같이 생명이 걸려있는 중대한 것의 경우는 그 요구하시는 순종은 아주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 보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누구나 그 시험에 통과해서 모두 다 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살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건지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

<간절한 소원> + <순종> = <기적>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놋뱀을 올려다봤을 때, 그들 모두에게 올려다보면 산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올려다보라니까 기계적으로 올려다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혹사나 하고 올려다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죽기 싫어 마지못해 올려다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려다 본 그들 모두가 산 것이다.


성경에 보면, “뱀에게 물린 자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믿고 올려다 본 자만 산 것이 아니라, 올려다본 자들은 다 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시는 조건으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살려 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공식

<간절한 소원> + <순종> = <기적>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뿐 아니라 단순한 기계적인 순종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기적은 <믿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때로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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