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와 부시
천 일의 대통령 케네디는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다. 재임 기간이 3년이 채 안되고 가슴에 품은 웅대한 비전을 마저 펼쳐 보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다스렸던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용기와 지혜를 반추하는 세기의 정치가다.
지난 40여 년 동안 백악관 기자실을 지키며 8명의 대통령을 취재한 원로 저널리스트 헬렌 토머스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관찰한 역대 지도자
가운데 케네디를 최고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백악관 취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 케네디였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으며 인류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악은 조지 W 부시 현직 대통령. "선제공격은 부도덕한 정책이며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정당화시켜 줄뿐"이라는 게 여든이 넘은 노기자의
논거였다.
부시가 내놓고 이라크전을 준비하던 2003년 초의 평가다. 자신에 대한 비판이 유쾌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 말 한
마디에 여든이 넘은 여류 언론인을 기자실 뒷줄로 몰아낸 것을 보면 부시의 그릇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토머스 기자의 대통령 평은 간결하여 분명하다.
"위대한 대통령은 인류를 위해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케네디는 가장
영감이 뛰어났다. 존슨은 투표권을 확대하고 공공주택을 늘리는 법안을 밀어부쳤다. 닉슨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중도사퇴로 기억될 것이다. 포드는
닉슨이 남긴 후유증을 지워주었다. 카터는 인권을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클린턴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그는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를 더럽혔다."
미국 국민들의 여론은 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올해 갤럽 조사에서도 케네디(13%)는 4년 전 조사에 이어 부동의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역시 링컨(15%). 3위는 부시와 클린턴
(11%).
재미있는 것은 세대별 인기도 차이다. 20대에서의 1위는 클린턴, 30-40대 링컨, 50-64세는 케네디, 65세 이상은
부시를 꼽았다.
이라크 종전 이후에도 끊임없는 자살테러로 부상자가 줄을 잇고 실직자들이 늘어나는 등 경기가 고개를 숙이자 케네디 열기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는 것은 당시(2003년)가 그가 서거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변호사 출신 작가 제럴드 포스너가 9·11 테러를 다룬 화제작 『왜 미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는 케네디가 졸업논문을 손질하여 출판한 베스트셀러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라는 에세이의 제목만을 패러디한 것이 아니다. 미국에 잠들지 않고 있는 케네디 신드롬의 현주소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같거나 또는 다르거나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와 조지 워커 부시는 모두 동북부 출신 부호의 아들로 가문의 절대적 후광과 부친의 적극적 후원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했으나,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 스스로 성공을 거머쥔 불굴의 정치인들이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행적, 집권 뒤의 정책은 그러나 그들이 속한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과 노선 차이 이상으로 거리가
멀다.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매사추세츠 브루클린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해였으며,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해다.
조부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이민 와서 양조장을 경영하고 매사추세츠 주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외조부 존 피츠제럴드는 보스턴 시장을 지낸 직업
정치인.
아버지 조셉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재산가인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돈줄 역할을 한 덕분에 증권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거쳐 주영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돈과 여자와 아홉 자녀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엄격한" 성격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아들이 보기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야심 찬 계획에 걸맞은 분"이었다. 미국을 휩쓴 대공황 당시 거리를 배회하던 실직자들을 불려들여 정원사로 고용한 것을 보면
온정도 있었던 것 같다.
케네디가의 부는 정부의 요직을 살 수 있을 만큼 환상적 티킷이었지만 "대학에서 강의를 하든지 신문에 글이나 쓰면서 소일하려던" 케네디에게는
놀고 먹고 좋을 정도의 여유.
그를 치열한 직업의 세계로 안내하고 드디어 정치의 꿈을 펴게 한 것은 짧지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 기자경력이었다. 언론재벌 허스트 소속으로
유엔을 탄생시킨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취재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으로 특파된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백인까지 식량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여인은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생지옥. 그리고 강간과 약탈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무자비한 군대를 앞세워 국제무대에 거대한 군화를 들이미는 소련.
그는 절박한 인간의 상황과 핍박받는 조상의 나라 아일랜드의 현실을 체험한 뒤 귀국 비행기 안에서 정치인이 되어 갑자기 전사한 형 조가 남긴
공백을 메우려고 결심한다. (졸역, 『대통령이 된 기자』 참조)
그러나 이것이 삶이고, 이것이 삶의 묘미일까.
포츠담 회담에 참석중인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영접 나온 유럽주둔 미군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기자 케네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찬을 함께
하며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논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머지않아 서로 자리를 물려주며 강대국의 최고지도자로 화려한 등장을 하리라는 것은
운명의 신만이 예감할 수 있는 장엄한 미래화였다.
조지 워커 부시는 1946년 7월 6일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예일대에 재학 중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장남으로 태어나 두 살 때
정치적 고향이 된 텍사스로 이사했다. 할아버지는 코네티컷 출신 상원의원이었다.
부시는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군 복무, 텍사스 석유회사 경영, 하원의원 출마 등.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조지 W 부시는 조지 부시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늘 아버지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아버지는 파일럿을 지원한 2차대전의 영웅이었으나, 그는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최전선을 피해 텍사스주
방위군으로 근무했다.
아버지는 일찍이 사업에 두각을 나타내서 이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 야망을 펼치고 있었으나, 그는 오일 달러 한번 제대로 만져보지 못한
기대이하의 기업인이었다.
아버지 조지가 "정치적 곤경"에 빠진 것은 대통령 제럴드 포드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막강한 비서실장 노릇을 하던 도널드 럼스펠드(현
국방장관)가 경쟁자이던 그를 "음모의 상징" CIA의 국장으로 밀어 넣고 자신은 국방장관이 되어 백악관에 한 걸음 앞서 가던 시절뿐이었다.
(졸역 『부시는 전쟁중』)
이에 비해 아들은 술고래에다 대학 다닐 때는 폭력행위로 두 번씩 입건되었으며 빈번한 여자문제와 마리화나 복용의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은,
말 그대로 탕아(蕩兒)였다.
그를 사람으로 만든 것은 순전히 사서 출신 부인 로라의 노력이었다. 부시가 그녀에게 끌린 것 자체가 자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 때문.
텍사스의 노총각 "부시보이"가 빠진 로라 웰치의 매력은 신중하고 사려 깊고 교양 있는 태도였다. 그의 부모들이 결혼한 나이―스무 살에
약혼이 파기된 적이 있는 부시는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만난 지 6주만인 1977년 11월 5일 약혼했다. 로라의 생일 다음 날로,
서른 한 살 동갑이었다.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려간다"고 조롱을 받던 "부시 주니어"는 아무튼 백악관의 주인이 됨으로써 또 한번 대통령직 선후배가 되었다. 그리고 이라크를 폭격함으로써 걸프전의 선후배로 기록되게 됐으나, 개전의 명분이나 전후 처리과정을 보면 여전히 한 수 아래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마이너리티 vs. 평범함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하는가.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케네디는 엄청난 특권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생래적 "단점"을 안고 있었다.
그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s. 백인 앵글로색슨계 개신교도)가 주류를 이루는 거대한 땅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 3세에 가톨릭을 믿는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일찍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아버지가 상원의원으로, 부통령으로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음양으로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불혹의 나이를
넘겼을 때까지도 성공이 따라주지 않는 불운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에 뜻을 세운지 정확히 14년만에 모두 초강국의 지도자로 우뚝 선다.
케네디는 1960년 역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한 살 적은 나이에 백악관 주인이 되었으나, 그는 암살당한 윌리엄
맥킨리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케네디는 20세기에 출생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의 전임자 트루먼은 1884년, 아이젠하워는 1890년 생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직을 정확히 한 세대 젊게 한 셈이다.
케네디는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자 현재까지 미국의 유일한 가톨릭 대통령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이 아직도 깊은 골을 이루고 있고, 마흔 세
명에 이르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다섯 명을 빼고는 전부 개신교일 정도로 종교적 편향이 심한 미국에서 케네디는 여지없는
마이너리티였다.
부시는 앤도버 고등학교에서 C 이상의 점수를 맞아본 적이 없어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이 다닌 예일에는 합격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치른 영작문 시험에서는 빵점을 맞기도 했다.
예일도 굴지의 명문임에 틀림없으나, 공화·민주당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네 명 가운데는 가장 학벌이 처졌다. 그의 러닝 메이트 딕 체니,
민주당의 라이벌 앨 고어와 리버먼은 모두 하버드의 우등생이었다.
게다가 눌변에 지명도 또한 떨어졌다. 그는 아버지와 중간 이름이 달랐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여전히 "부시의 2세"였을 뿐이다. 그는
기껏해야 "가망 없는 방랑" 끝에 "서서히 역사로 걸어 들어온" 사람이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프랭크 브루니 저 『Ambling Into
History-An Unlikely Odyssey of George W. Bush』)
그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준 것은 장점과 단점의 절묘한 상승작용이었다.
케네디는 실패에는 분노했으나 승리의 순간에는 침착했다.
그는 유럽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의 실현이라는
고결한 이상과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마이너리티로서 "자살행위"와 같다는 친지의 현실적 설득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 뒤에도 늘 그랬듯이 그의 선택은 이상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그는 공조직 보다는 혈연 지연 학연과 전우들을 활용하여 이듬해 하원의원으로
워싱턴에 무사히 진입하고, 6년 뒤인 1952년 미국을 휩쓴 공화당 바람―"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 선풍" 속에서도 당당히 상원에 진출한다.
그러나 그를 정작 전국적 인물로 키워준 것은 초선 상원의원이던 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로 급부상하였다가
처음 경험한 아슬아슬한 실패였다.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의 시원한 패배인정과 인상적인 양보 연설은 무려 4천만 가정에 그대로 전달되어 하룻밤사이 유명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급부상한다. 4년 뒤 있을 본격적인 TV정치의 시작이자 세계를 무대로 화려한 스타탄생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두 배의 열정" 없이는 백악관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 정치인 케네디는 이것을 계기로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이름하여 전국투어.
케네디는 1957년 이틀에 한번 꼴로 연설을 하고 다음 해에는 2백 번 이상 연단에 서서 "지난 해 저를 찍어주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했다. 지명실패가 더 큰 진전을 위한 일보후퇴였으며 결과적으로 화가 복이 된 셈이었다.
"훌륭한 정치인은 개개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청년 시절의 낙서는 그래서 지금도 시사적이다.
60년 대선에 나선 그는 자신이 먼저 종교적 터부를 이슈화시켰다. 일단의 휴스턴 목사들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고,
신교 우세지역인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휴버트 험프리를 꺾음으로써 구교도는 안된다는 미신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분수령은 1억 명 이상이 시청했을 것으로 추산되는 역사상 첫 TV토론. 나이와 용모, 명료한 화법 등 케네디의 타고난 장점이 돋보인 것이
사실이나, 아이크의 정책을 옹호하는 리차드 닉슨과의 더욱 현격한 차이는 신선한 "뉴프론티어" 정신과 "우리나라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자"(Let's get this country moving again)는 패기 넘치는 호소였다. 경제발전 5단계설을 주창한 로스토우 교수 등
하버드를 중심으로 한 케네디 사단의 승리였다.
부시의 무기는 비판받을 때 인내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승자로 당당히 등장하는 불굴의 용기였다.
그는 하버드 MBA 학위, 아버지의 명성 그리고 5만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1975년 한창 경기가 달아오르던 석유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3년 뒤 32살에 하원에 도전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진다. 사업으로 돌아간 그를 맞은 것은 급격한 경기하강.
1983년 말까지 근근히 버티던 그는 다음 해 초 합병를 추진해 기사회생한다. 아버지의 배경이 숨은 힘이 된데다, 중간성적에 만족하면서 늘
관계를 돈독히 한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부시의 인생은 그야말로 40부터 였다. 1986년 생일 다음날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고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조깅에 나선 뒤, 당장 술을
끊었다. 끝간데를 모르던 고주망태가 개과천선하는 순간이었다. 로라의 오랜 정성과 본인의 의지가 투합한 결과였다.
그 뒤부터의 인생은 전반부와는 딴판이었다. 부시는 1988년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 자극 받아 2년 뒤 텍사스 주지사 출마를
선언하지만, 아버지 지위를 이용하려 한다는 비난과 경험부족을 우려한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포기한다.
그가 대신 손 댄 것은 야구사업. 아버지의 이름, 가족, 친구, 사업실패 경험 등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다 끌어모아 텍사스 레인저스를
친구로부터 사들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 덕에 투자액은 구입가격 3천5백만 달러의 5%에 지나지 않았으나 공동 매니저 자리를 차지하여
주지사 자리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주지사가 되고 난 뒤 세제개혁을 밀어 부쳤으나 동료 공화당원들마저 등을 돌렸다. 그를 구해준 것은 이번에도 평범이 맺어준 강력한 교우관계,
폭넓은 인간관계였다. 1998년 재선에서의 흑인 및 히스패닉계 표는 기록적이었다.
대선에서 그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그의 온정적 보수주의 슬로건이 아니었다. 논리정연하고 자신만만한 우등생 고어와 정리되지 않은 사고와
투박한 화술 때문에 TV토론을 기피하던 열등생과의 대결에서 그리 크게 밀리지 않은 것이 주요 원인이다.
박빙의 대결에서 "생각보다 덜 똑똑한 우등생보다 생각보다 덜 멍청한" 평범한 친구를 선택한 평범한 유권자가 조금 더 많았던 것이다. 용기와
결단이 평범을 평범하지 않게 만든 결과였다.
영웅 앞에는 단점이 없다.
이상주의 vs. 현실주의
정치인의 리더십을 분석하기 위해 그의 퍼스낼리티를 먼저 살피는 것은 아직도 유효한 하나의 방법이다.
케네디는 타고난 엘리트였다. 게다가 지적 욕구가 강하고 이안 플레밍의 007소설을 앉은자리에서 읽어치울 정도로 속독을 자랑하는
독서광이었다.
쿠바의 위기가 고조되던 어느 날, 그는 국무부에 카스트로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개요, 일대기, 세부자료가 바로 그의 책상에 놓여졌다.
그는 세부자료를 집어들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타인에게서 얻었다"는 역사가 제임스 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케네디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책에서 얻습니다."
기자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언론인 출신 선배 정치인 처칠을 존경한 그는 사물을 보는 안목이 날카롭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종전 직후 패전국 독일에서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 소련군을 질타하는 것과 똑같은 강도로 미군과 미국 정치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의원들은
시찰보다는 휴대용 썰매와 카메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학에서 럭비를 하다 디스크를 다쳐 육군 입대가 좌절되어 아버지의 힘을 빌려 입대한 해군
시절. PT-109 어뢰정이 일본 구축함의 공격으로 파선되자 부하의 허리띠를 물고 2마일을 헤엄쳐 구한 용기는 부하들을 모두 사지에서 탈출하게
만든 강렬한 생의 의지로 발전했다.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도 결국 전쟁통의 유럽에서 목격한 인류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을 확고한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인간주의와 이상주의의
발로였다.
상원의원 시절, 인권신장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에 대한 원조를 지지했고 프랑스에 대해
알제리 독립을 촉구해 워싱턴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 루스벨트도 마찬가지 경우이고, 그의 정치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슨도 대통령에 두 번 출마하며 이상주의에
호소하여 민주당을 변모시킨 주역이었지만, 부호집안 케네디 가가 서민과 소수민족의 이해에 더 민감한 민주당과 인연을 맺은 것 자체가 일종의
휴머니즘이었다.
따뜻함은 케네디의 정치적 신앙이었다. "민주당은―(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표현대로―'양복 안쪽에 따뜻한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일하던 동생 로버트에게 핵전쟁의 가능성을 우려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너와 나 그리고 어른들은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좋은 시절을 살아봤으니까. 정말 끔찍한 것은 그런 기회를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어린이들이 전쟁 때문에 죽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시도 눈물을 보였다. 9·11 테러에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 앞에서 진행된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눈물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식량을 투하하라고 명령한 것도 부시였다. 국무회의를 기도로 시작하는 독실한 개신교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당연한 인간적
정책인지도 모른다.
그가 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증오한다"고 한 이유도 "인민을 굶주려 죽이고 있으며" 고문을 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식량투하 명령과
동시에 내린 것은 대규모 폭탄투하 조처였다. 폭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부시는 선제공격을 통해 "악"의 싹을 잘라버림으로써 "전쟁을 통해 다른 전쟁을 예방"하려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빈 라덴의 목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자 놀란 CIA 공작 책임자가 묻는다. "정말 죽여도 됩니까?" 클린턴의 표현으로는 그것은 단지
"혼을 내주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부시는 편가르기를 즐기는 2분법적 성격의 소유자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단순한만큼 명쾌하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은 동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이다.
부시 진영의 전쟁기획자들까지 두 패로 갈려있는지 오래다. 콜린 파월은 대통령에 도전하려는 야무진 꿈을 부인의 "이혼 협박" 때문에 포기한
전국적 명사로서 국무장관이라는 지위가 작아 보이는 인물이지만, 부시에게 있어서는 일방적 전쟁을 반대하는 "소극적 협력자"일뿐 이너서클 멤버는
아니다.
그러나 부시는 동양의 힘, 기다림의 묘체를 터득한 무서운 지도자다. 아프가니스탄을 치기 위해 두 눈은 카불에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온건파까지
합의에 도달하도록 분명한 언명을 삼가고 있다.
이라크전 당시에도 그랬다. 마음으로는 열 번도 더 사담 후세인을 잡고도 남았지만 파월이
UN의 동의를 얻자고 설득하자 이를 용인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일방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비난을 거부하고 여론에 이처럼 민감한 그가 오히려 신문을 보기 싫어하고 언론을 혐오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까,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중적 태도일까. 케네디가 취임한 이래 백악관 근처 신문 잡지 매장 A.T. 스크럿의 매출이 두배로 늘었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케네디는 세 차례에 걸친 위기일발의 대결에서 지혜와 패기, 결단을 무기로 노회한 소련총리 니키타 후르시초프를 제압, 3차대전의 발발을
막았다.
학창시절 친구와 베를린을 여행하다가 체포위기를 넘기며 포연을 감지하고 2차대전이 임박했음을 보고한 케네디의 예지, 극비에 붙여졌던 맨해턴
프로젝트에 대해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던 탁월한정보력 그리고 불굴의 용기. 케네디를 케네디답게 하는 특유의 강점을 고려할 때, 그의 가장 현저한
업적 중 하나가 1963년 소련과 체결한 핵실험금지협정이란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부시는 반면에 "테러"에 대한 보복과 "대량살상무기" 제조 가능성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21세기의 첫 번째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케네디가 평화봉사단을 만들고 세계평화에 최고의 가치를 둔 이상주의자로 화합과 조정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면, 부시는 미국의 국익과
"민주주의의 수호"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는 현실주의자로, 분열과 갈등확대를 통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현대적 모델이다.
케네디가 학자와 문인, 예술가 등 이상주의자들로 자문그룹을 이루었던 데 비해, 부시는 실제 특정이익을 대변하면서도 외견상으로는 국익에 가장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주의자―"신보수주의자"(네오콘, neo-conservatives)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현실은 이를 증언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최고의 정책은 대통령의 마음과 머리에서 나온다. 이것은 최소한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의 신념과 열정은
가족과 학교, 젊은 날의 경험에 의해 초기에 형성된 인상과 항상 연관을 맺고 있다.
"대통령은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고 믿고 자문할 만한 전문가를 곁에 둘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은 혼자이고 그의 직관이나 타고난 지성, 교육, 경험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에 의존해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케네디의 마지막
6년을 취재한 원로 언론인 휴 시디의 말이다.
시디의 견해가 다만 케네디나 부시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마치며
나는 조지 W 부시에 대해 명확한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를 찬양하거나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우리나라의 운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미국 대통령으로서, 그를 그 모습 그대로 보고자 한다. 선악과 호오(好惡)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미국인들은 부시를 다시 선택했다. 그것도 초선 당시보다 압도적 차이여서 정교한 여론조사조차 틀릴 정도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그늘과 오랜 잠재적 컴플렉스로부터 벗어나게 됐으며, 적어도 재선에서만큼은 조지 HW 부시를 능가했다. 부자(父子) 대통령은 재선되지 않는다는
징크스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미국과 북한간의 핵 줄다리기와 한반도 안위에 모아지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지난 2년간 부시와 스파링한 뒤 새로운 부시의 임기를 맞게 되는 일은 우리에게는 유리한 점이다. 이것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가 앞으로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필자 소개:
워싱턴포스트 부국장 밥 우드워드의 『부시는 전쟁중-워터게이트 특종기자가 파헤친 미국의 극비 전쟁파일』과『공격 시나리오』 존 F 케네디의 『대통령이 된 기자-케네디의 유럽 취재일기: 폐허 사이로 희망이 비치는 풍경』을 옮기고 뉴욕타임스의 아시아통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쓴 『중국이 미국 된다』를 편집했다.
'━━ 지성을 위한 ━━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미`·`숭미`·`혐미`·`용미`…당신은 어느 쪽? (0) | 2006.07.26 |
---|---|
펀드투자요령 (0) | 2006.07.25 |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들 (0) | 2006.07.23 |
강력한 항노화, 항암 작용 (0) | 2006.07.22 |
미국의 재정적자와 한국경제 (0) | 2006.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