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과 이승만의 獨立運動의 方略: 反蘇路線과 外交論을 중심으로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
I.
4.19이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5.16군사혁명이후의 국정교과서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로 독재를 연장하려다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났다.’는 식으로 기술된 것이 일반적인 대세였다. 이런 식의 이승만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적 기술은 지금까지 계속되어서 금성출판사가 발간한 고등학교 교재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의 등장이후 전개된 ‘대한민국의 정체성 흔들기 작업’의 심각한 폐해를 몸소 체험한 국민들은 과거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건국 60주년을 전후로 해서 이승만연구모임이 활성화되었고, 건국사를 재조명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 분위기에서 지적된 점은 “광복절도 중요하지만, 건국절도 잊지 말아야한다”는 역사적 교훈이었다. 연세대학의 현대한국학연구소와 명지대학의 국제한국학연구소에서는 이승만 관련 사료집들을 편찬했으며, 추가적으로 올해 봄에 사료편찬집이 나올 예정이다. 인터넷상에서도 이승만 관련사이트들이 많이 생겨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초대 내각을 구성하고 남한의 공산화를 차단한 우남 이승만의 공이 지대하지만, 이승만의 공적이 지나치게 폄하된 것이 사실이다. 여론 조사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인기도는 약간의 상승세를 타지만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08년 8월 15일,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센터(KRC)가 정부수립 60주년과 광복 63주년을 맞아 실시한 국민의식 여론조사 결과,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정치지도자로 응답자의 56.0%가 박정희를 꼽았다. 이어 김대중(11.0%), 김구(3.9%), 이승만(2.6%), 노무현(2.5%), 전두환(0.7%), 김영삼 (0.5%) 등의 순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후세 史家들의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박정희와 더불어 권력의 절정에서 그 몰락을 통해서 권력의 비정함을 철저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의 초점은 ‘단정으로 인한 분단의 고착화’ ‘친일파 등용’ ‘장기집권(독재자)으로 민주발전 저해’ 등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찬양자들은 독립운동과 건국의 지도자로서 학식과 지성,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통찰력에서 이승만보다 뛰어난 인물이 없었음을 인정해야한다고 설파한다. 학계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 분위기가 감지된다. 건국 60주년을 맞은 2008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1875~1965)과 제1공화국에 대한 '진보' 학계의 평가에 미묘한 변화의 흐름이 보이고 있다. '분단의 책임자' '독재자'라는 부정적 이미지 아래 일방적으로 매도하던 데서 벗어나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47년과 48년간의 김구에 아리송한 ‘對北 行步’가 주목을 받아 자주 언급되고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는 형국이다. 이승만에 대한 연구업적의 경향은 1980년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시기까지 유행했던 운동진영의 분단 담론과 민족주의 인식에 근거하여 비판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점차 이승만의 재평가 작업은 건국 60주년을 전후 기점으로 해서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과 생존, 발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반운동권적 명제가 우익진영에서 강하게 전개되고 있다. 해방이후의 이승만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이승만의 전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운 점은 국내 학계의 분위기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이승만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먼저 내린 이후에 연구를 하려고 하기에 방대한 1차 사료에 대한 천착과 읽기 열중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태도는 젊은 신진학자들에게서 많이 눈에 띈다. 역사적 사실에서 먼저 접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II
대부분의 좌파 학자들은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와 건국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이 평생동안 일관적으로 추구한 반소․반공주의에 대해 의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이승만의 반러사상이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지적이나, 심지어 해방이후 좌파-공산당을 포용해서 정당과 국정운영을 했으면 훨씬 남북간 갈등이나 계급대립이 완화되었을 것이라고들 안타까워한다. 더 나아가 남북한의 민족문제를 직접 대화나 협상을 하지 않고 외세(미국을 지칭)를 통해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 유감을 표명한다. 또 이승만이 항일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 무장투쟁론을 배척하고 외교론에 집중했지만, 북한 동족에 대해서는 무력사용을 불사한 북진통일을 주장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좌파들의 논지에 반박하는 글의 형태를 띨 것이다. 즉 이승만의 완강한 반러·반공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승만의 일대기를 추적, 그 역사적 과정을 분석하는 글이 될 것이다. 이승만의 반러·반공주의는 불가피하게 미국의 협력과 지원을 얻어서 대일투쟁을 전개하고 주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의 방략에서 등장한 이승만 특유의 외교 노선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두 번째 목적으로 이승만의 태평양 전쟁기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하되 그의 핵심적인 외교 상대였던 미 국무부의 대외정책과의 길고 긴 투쟁과 교포사회에서 이승만에 도전한 라이벌들의 독립운동 방책을 함께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외교노선의 장단점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려고 한다. 시기적으로는 연구의 범위를 태평양전쟁 발발 시점에서부터 45년 해방직전까지로 국한하였다.
III
이승만은 한국문제가 국제문제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에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문제를 포착했던 최초의 한국인 가운데 한 인물이었다. 19세기 구한말 당시에 약관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넓은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문제에 접근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한반도의 주변 강대국가들인 중국, 러시아, 일본을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려면 멀리 서구, 특히 미국적 가치와 체제를 도입하는 한편 미국과 같은 서구해양문명과 긴밀하게 협력을 추구하는 것이 최상의 국가이익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한국에 대한 중국, 러시아, 일본의 압도적 영향력이 컸던 시기에 국익의 연대 대상을 미국으로 정했다는 점에서는 이승만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승만의 젊은 시절의 국제관계의 인식에서 주목할 점은 서구 및 미국 지향 못지 않게 중국과 러시아, 특히 러시아에 대한 일관되게 흐르는 저항과 반감의식이다. 1898년의 제1차 만민공동회이래 이승만은 일생동안 추호도 변함없이 줄기차게 반러감정과 반러노선을 견지했다. 구한말 당시 러시아는 청국의 약화를 틈타서 동아시아로 팽창함에 따라서 한국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으며, 이 점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이승만의 반소노선은 객관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이미 이승만은 열강의 이권침탈 속에서 러시아에게 침탈당하는 이권에 대해 조정의 속수무책을 목격했고, 아관파천(1896)으로 인한 외교적 굴욕, 만민공동회 활동과 옥중에서 틈틈이 러시아의 팽창주의 야욕에 관한 국내외 문서를 접수하여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일본보다 더 러시아를 한반도에 더 해악을 끼칠 나라로 보았으며, 러시아를 ‘굶주린 호랑이’로 비유했다. 피터대제이후 짜르의 침략주의와 부동항 확보정책-1917년의 레닌 볼세비키 혁명과 스탈린의 공산독재정치-2차대전이후 동유럽의 공산화와 해방공간에서 공산당의 준동-70년대의 아프간침공이란 긴 러시아 역사의 긴 흐름을 살펴보건대 이승만의 판단력과 러시아 팽창주의에 대한 우려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 다가, 러시아에 근거지를 둔 좌파에게 당한 자신의 개인적 쓰라린 체험에서 반로노선이 우러나온 것도 있다. 이승만은 20년대초에 상해임정시절의 좌파로부터 탄핵을 받았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미 1921년 2월, 상해 임정의 개원식에서부터 외교노선과 무장노선과의 격렬한 노선투쟁이 있었다. 이승만 반대파는 주로 러시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한·중·러 3국과 협력하여 독립전쟁을 치를 것을 주장하고, 상해에는 외교기관만 두고 군사 관계기관은 노령이나 만주로 옮길 것을 내세웠다. 이승만이 워싱턴 군비축소회의(1921-22)에서 외교성과를 거두는데 실패하자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상해와 북경에 있는 독립운동가들 간에 그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 결과 그는 드디어 1925년 3월에 자기의 비판세력이 장악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면직을 당했다. 이 때 상해 임정은 구미위원부 폐쇄령도 함께 내렸다. 이승만은 자신을 배척·탄핵한 중국내의 좌파들이 러시아와 연대를 맺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들은 또한 나중에 거론되지만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론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소련정부에 대한 이승만의 개인적 체험도 쓰라린 것이었다. 그는 1933년 2월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회의를 참관하면서 그곳에 모여든 열강 대표들을 상대로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단신외교를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외교에서도 기대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7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정부의 외무성과 일제를 상대로 한․러․중 3국간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냉정한 태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 만에 모스크바에서 축출당하는 창피를 당했다. 이러한 일생의 세 번의 체험들은 그에게 강력한 反共反蘇의 태도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Ⅳ
이승만의 새로운 나라에 대한 건국구상이 언제부터 구체화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0년대와 30년대 독립운동의 암흑기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싸우기를 기다렸는데, 그럴 기회가 오지 않아서 그는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야욕이 멈추지 않고 중국대륙과 태평양으로 펼쳐나가자 언젠가는 미국을 공격할 것이므로 이 기회를 활용하여 나라의 주권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일생동안 거의 대부분 미국에 체류하면서 거대한 미국문명의 장단점을 만끽했으며 장차 자신이 봉사할 신생국가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한다고 믿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면 기독교국가가 되어야한다.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기에 親日에 경사된 많은 미국인들에게 일본이란 우상숭배의 나라를 경계해야한다고 설파했다. 이승만에게 독립의 절대 호기가 찾아온 것은 바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태평양전쟁이었다. 1940년 여름, 이승만이 그의 세번째 영문판 저서, Japan Inside Out<일본내막기>를 통해서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며, 그해 12월7일 진주만 공습으로 이승만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일본의 정치는 군사력에 의한 제국주의적 정복과 영토확장이라는 기본이념에 의거해 움직이고 있으므로 한국을 독립시킴으로써만이 일본의 위험한 야심을 제어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미국은 일본과의 최종 대결을 방지하기 위해 경제, 도덕, 군사 등 모든 힘을 동원해 일본에 제재를 가하라”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은 이승만의 혜안에 놀라움을 표현했고 이승만의 성가는 높아졌고 이승만은 일종의 예언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언젠가는 일본이 패망할 것이며 한국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해임정의 승인을 얻어내야 무기대여법에 의한 지원도 받을 수 있고, 후일 국가건설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가 있다.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에 개입하자 상해임정의 승인문제는 이승만의 긴급한 사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미국 정부에 대한 기대는 태평양전쟁이 진행될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다. 우선 즉각적인 임정승인과 전후 독립에 대한 이승만의 구상과 미국 정부의 입장이 현저히 달랐기 때문이다. 1904년 겨울 이승만이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지 어언, 30여년이 흘렀다. 이승만에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외부의 일본과의 투쟁이 아니라 당장 자신이 의탁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미국정부 즉 대외정책을 주관하고 있는 미 국무부와의 기나긴 투쟁이었다는 점은 그의 독립운동의 아이러니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미 국무부의 핵심세력으로 일하는 리버럴-좌익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들은 루즈벨트 행정부가 뉴딜정책을 실행하고 소련을 승인한 이후 줄기차게 인맥을 구축하였으므로 이승만은 30년-40년대에 걸쳐 국무부에 심어진 친소친공세력과의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일생은 반일, 반공⋅반소와 미국의 대소유화정책에 대한 반대, 反託(미국의 신탁통치라는 한반도정책에 대한 반대)로 점철되었다. 이승만이 노린 외교목표는 미국 등 연합국으로부터 임정승인을 획득함으로써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적극 참가하여 전후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임정승인을 요청하는 문서를 진주만발발 전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진주만 사건 직후에도 미 국무부의 극동국장 혼벡에게 문서로 임정승인을 촉구했다. 미 국무부의 반응이 냉담하자 헐 국무장관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띄워서 임정 승인을 요청했다. 독립운동의 방략에서 무장투쟁론보다는 이승만은 강대국, 특히 미국에 대한 중경 임시정부의 승인이라는 외교적 노력에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미국 등 서방연합국과의 승인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구상했던 것이지만, 일본의 진주만공격이후, 이승만의 외교론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교포사회가 이승만의 독점 무대는 아니었다. 10년대 후반기부터 정치적 라이벌들이 등장하여 독립운동의 方略과 교포사회의 헤게모니를 놓고 본격적인 각축을 벌렸는데, 상호 투쟁이 심각했던 이유 중 하나는 교포들의 독립운동에 자금조달의 재정권 문제와 외교적 후원 등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에 근거지를 가진 흥사단의 안창호는 학식과 지성에서 이승만에게 밀리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조직력을 살려서 무실역행 등 準備論으로 무장하여 교포들에게 파고 들어갔으며, 이승만과 옥중동지이자 하와이로 이승만을 초청한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는 등 무력투쟁론을 역설하면서, 동지회를 조직한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노선에 대해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사탕밭에서 교민들이 힘들여 번 돈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허비하고 있다”고 보았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에 대해서는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안창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안창호가 좌익을 포용한 좌우익 합작노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박용만은 다른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유일한 방안은 무장 투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승만을 하와이에 초청하여 학교운영을 맡기려 한 점으로 볼 때, 그가 다른 방안의 효용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안창호는 두 노선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박용만에 대해서는 “무식한 동포들은 돈도 바치고 시간도 허비하여 속는 이가 많은 데 아무리 무식하여 판단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전쟁이 어떤 것임을 알고 오늘에 그런 문제를 제출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대해서도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승인을 요구하여 교섭한다 하는데 가만히 앉았다가 글 몇 줄로써 독립을 찾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이승만의 외교론과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이 안창호의 교육에 의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調和와 균형을 이루었을 때 가장 바람직한 효과를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독립을 이루는 데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셋은 서로를 불신하고 상대방의 노선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 지방색으로 인한 지지노선의 분열상이 심했다. 1910년대부터 시작된 한인사회의 지방색은 크게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승만은 주로 서울, 경기와 충청도 등 기호지방 출신들의 지지를 받았고, 동지회에도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독립운동 노선도 이승만의 외교 노선을 지지하는 편이었고, 이북 출신들은 지리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 땅과 가까운 때문인지 무장 투쟁론을 선호했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이 들 세 노선이 조화·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독립운동이 한층 활력과 단결을 이끌어 내었을 것이건만, 현실적 역사에서는 그런 이상적인 지도자는 존재하지 못했다. 1937년 안창호가 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옥살이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치료 중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승만에 필적할 강력한 라이벌은 미국교포사회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야에 젊은 세대중에서 이승만에 도전하는 단체와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도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승만의 대미외교에 대한 독점권 행사가 못 마땅했으며, 외교 노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무력투쟁론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었다. 또 기존 보수성향의 독립운동 인사들의 노령화 현상에 대한 염증내지 피로감이 교포사회에 분명히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후에는 젊은 세대 중에서 한길수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중한민중동맹을 결성하여 미 해군부와 국무부를 자주 드나들면서 이승만 격하운동을 하였고 대미외교를 독점적으로 장악한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공공연하게 도전했다. 이승만보다 25년 연하인 한길수는 경기도 장단 출신으로 6세때 1905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자랐다. 한길수는 김규식이 1932년 상해에서 조직, 1년 뒤 재미한인교표사회에 부식한 중한민중동맹(the Sino-Korean Peoples' League)라는 대일방첩단체의 미주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한길수는 1938년 워싱턴으로 거처를 옮겨서 중한민중동맹단과 1937년 漢口에서 金元鳳(호 若山)이 조직한 조선민족전선연맹(The Korean National Front Federation)의 워싱턴 대표로 행세했다. 30년대 말에 한길수는 미국인들 간에 일본 정보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길수는 1942년 이후 김구의 중경 임정 내에서 야당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원봉-김규식 세력에 연계된 미주 내 이승만 거세운동의 선봉이었다. 한길수는 ‘고집불통의 노인’ 이승만이 표방하는 무저항주의 외교독립노선과 반소반공주의가 비현실적이고 비효과적이고, 그 대안으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무장투쟁노선과 대소협조주의를 옹호했다. 한길수의 그런 논리는 해방 후 좌우합작과 연립정권 수립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의 입장은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 있어서 소련과의 협력이 필수라고 보는 미 국무부의 구상과 맞아 떨어졌기에 그 당시 미 행정부의 호감을 샀다. 이승만은 어떻게 그의 라이벌에 대응했나?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길수를 미국 내 한국 ‘빨갱이들’의 두목이요 왜놈의 ‘사냥개’(이중간첩)로 지목하고 그를 예민하게 경계하였다. 동시에 그는 한길수가 미정부 요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내분을 지나치게 과장 부각시켜서 결과적으로 임정승인을 방해했다고 분격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절실히 요구되는 대동단결과 민족통일전선의 결성, 이를 통한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에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특히 한인단체의 통합에서 이승만은 분열주의자로서 각인되고 말았다. 이승만이 대미외교에 집착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망명으로 자신의 국내 조직기반이 와해되었고, 이미 국내는 오랜 식민지상태에서 저항운동의 씨앗이 제거되었고, 또한 중국대륙에서도 한국민들의 자주적 독립투쟁 역량에 대해서 인적, 물적 조건에서 그다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안창호의 준비론과 박용만, 한길수 등의 무장투쟁론이 노력에 비해서 성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이런 판단력은 국제정치를 전공한 자신이야말로 강대국의 힘을 제대로 평가한 것으로 확신하였다. 미국의 정가와 군부를 상대로 한 이승만의 로비는 집요하였고, 미국 외교가의 관계자나 언론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외교론에 무장투쟁론을 적절하게 접목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비판적인 후대의 역사가는 이구동성으로 “지나치게 외교적 방법에 의존하여 강대국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하는 무장독립운동은 자신의 외교론을 뒷받침하고 자신의 외교역량을 선전하는 홍보용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으며 무장투쟁에 과도한 투자를 하기를 꺼려했다. 또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한길수와 같은 인물들은 만주등지에서의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는데, 이승만이 혐오하는 좌파-공산계열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독보적 위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대미외교의 독점권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1년 4월, 재미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재미한족 연합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 발족대회에서는 첫째 임시정부 지지, 둘째 워싱턴에 외교위원부 설치, 셋째 독립금을 각출해 3분의 2를 임정에, 나머지는 외교위원부에 송금할 것을 결의했다. 위원장에 이승만의 측근인 임병직이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6월에는 임정에 의해 이승만은 워싱턴 전권대사의 자격을 인정받아 대미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신분적, 물질적 기반이 제공되었다. 김구가 이끄는 임정은 교포사회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고, 이승만은 대미 외교의 권위를 확립하여 김구-이승만의 상호의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승만이 대미 외교에 집중했지만, 임정승인을 얻기 위해서 항일전에서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전혀 몰랐던 인물은 아니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서 망명단체들의 무장투쟁이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승만은 미 육군전략처(OSS)와 협력하여 한국인 청년 20여명을 OSS특공대 요원으로 선발하여 특수훈련을 받게 한 다음 그들을 대일전쟁에 참여시켰다. 또 이승만은 법무장관 비들과 육군장관 스팀슨을 설득하여 전쟁 중 미 정부가 한국교포들을 일본인과 구별하여 ‘우호적 외국인’으로 취급하도록 조처했다.
Ⅴ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관하는 미 국무부는 이 고집불통의 해외망명객을 활용할 가치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승인요구 등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내거는 이승만을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진주만 공격이전까지 미 국무부의 한국문제 내지 한국임정에 대한 정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과 그로인한 한국인들의 꾸준한 임정승인 운동으로 인해, 한국문제는 다시 미 국무부 관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 임정만이 아니라 유럽 8개국의 망명객들이 세운 임시정부로부터도 승인 요청을 받고 있었기에 어떤 확고한 원칙이 필요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의 총선거에 의해 설립된 정부만이 인정한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만약 어느 망명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부 행세를 하게 되는 경우, 그 정권이 실패할 경우 본국의 백성들은 연합국, 특히 미국을 신랄하게 증오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또 미국은 한국민의 독자적인 국가운영 능력을 의심하는 한편 한반도를 에워싼 중국과 소련의 각축을 염려하여 4개국(미영중소)의 신탁통치를 제안한다. 처음에 루즈벨트는 그 기간을 30년 동안이라고 했었고 루즈벨트가 사망한 이후에도 기간은 줄었지만 신탁통치에 대한 미 국무부의 입장은 종전에도 변함이 없었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눈치를 살피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조심한 나머지 여러 차례 처칠의 반발을 초래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이미 親蘇派들이 핵심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리 홉킨스는 1943년 8월 퀘벡회담에서 ‘홉킨스메모’를 통해서 전시에 태평양전쟁의 소련참전이 필요할 뿐만이 아니라 전후에도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과 대적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련과의 협력체제를 구축할 것을 역설했다. 국무부의 실력자인 정치국장 앨저 히스는 이승만의 임정승인 요청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소련의 협조를 얻어내야 한다고 하여 이승만을 문적박대하기 일수였다. 1942년 1월 2일, 존 스태거스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와 함께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앨저 히스와 극동문제담당국장 스탠리 혼베크 박사를 만나러 국무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나치스 점령하의 유럽으로부터 탈출한 여러 망명정부와 마찬가지로 자기 정부에게도 동일한 승인과 원조를 주도록 미국에 요구했다. 히스 보좌관은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미국 정부에서 볼 때, 이승만은 실제로 한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종전 후 미국 관리들이 실시할 선거에서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대한민국을 승인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승만은 지적하기를, 소련은 시베리아 무역 통상의 돌파구로서 사계절 얼지 않는 한국 항구들을 장악하려고 반세기 이상의 세월을 노려왔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을 미국이 미리 승인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선수를 쓰지 않으면 일본 패망 후 소련이 반드시 끼어들어 한국을 强占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앨저 히스는 이승만의 청산유수와 같은 진술을 가로막으면서 자기는 미국의 주요한 전시 맹방의 일원인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앉아 들을 수 없다고 쏘아부쳤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은 일본 패망이후로 미루어야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승만이 말한 바와 같이, 소련의 기본 정책에 위배되는 선취 특권행위를 미국은 취하려 하지 않는 점이 분명했다. 그 당시 이승만은 히스가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지 못했다. 다만 미국 정책이 이렇게 젊고 이토록 세계 문제에 미숙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개탄하여 상심 속에 국무부를 떠났다. 미 국무부에는 히스뿐만 아니라 극동국장 존 빈센트를 비롯하여 핼도어 핸슨, 존 서비스, 올리버 클럽 등 수많은 친소․친중공 인사 내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인사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확고한 반소반공주의자인 이승만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국무부 한국담당인 조지 맥큔도 비우호적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맥퀸은 같은 평양출신인 안창호와 그의 흥사단 동지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었기에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자연히 비우호적이었다. 총 55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주면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루즈벨트의 전시 불승인정책에 발이 묶여서 전시중 이승만은 단돈 1달러도 미국정부로터 지원받지 못했다. 이승만의 정치자금은 주로 하와이와 재미교포들의 성금에 의존했는바,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학교는 비용이 많이 들기에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효과면에서 가장 막강한 일본군에게 얼마나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무장투쟁론에 대한 인식에서 좋은 단서를 제공하고 그의 행적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으로 미국외교관이며 친일파였던 스티븐스(Durham W. Stevens)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한 장인환을 변호하기 위해서 교포사회는 이승만을 통역으로 샌프란시스코로 데려왔던 일화가 있다. 재판이 지연되자 이승만은 “자기는 기독교인으로 살인자 변호의 통역은 맡을 수 없다”고 하면서 여비와 1개월여의 체재비만 쓰고 돌아갔다. 일부 교민사회에서는 그러면 오지 말 것이지 동포들이 애써 모은 비용만 쓰고 갔다는 비난도 있었다. 미국의 전시 정책에서 상해 임정은 전시의 세계전쟁전략과 유럽의 여러 임시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보류된 상태였다. 모든 임시정부 중에서 드골의 임시정부만이 전시말에 승인을 받았다. 드골 휘하의 군대가 전쟁에 참여한 보상이었다. 미 국무부가 보기에 한국 임시정부는 프랑스나 폴란드 임시정부보다도 문제와 결함이 많은 단체였다. 국무부에서 중국통으로 알려진 혼벡은 한국사람들이 아직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여 한국의 독립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국무장관 헐은 소련이 친소정권을 만들어 임정과 대립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했으며, 임정승인이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중대사 고스는 한국의 독립문제는 인도를 포함한 동양 각국의 독립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이므로 미국이 인도문제 대해서 성명을 발표할 준비가 될 때까지 한국문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식이었다. 영국은 미국이 혹시 상해임정을 승인하면 인도를 포함한 영국 식민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미국의 속셈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미국의 일반적 입장을 마지못해 찬성하는 쪽이었다. 이승만은 임정 승인의 획득을 위해 호소와 협박을 동시에 사용했다. 1942년 12월 31일 이승만은 헐 국무장관에게 “거의 13개월 동안 본인은 귀하의 국무부가 2,300만 한국민의 전쟁수행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본인이 사무실에 들려서 직접 간청드릴까요?”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헐은 그의 요구를 사절하였다. 이어 2월에 이승만은 소련의 야심을 들추어내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최근의 신문지상에 러시아가 한국에 소비에트식 공화국을 설립하려고 한다는 보도가 실렸으므로 본인과 한국에 호의적인 미국인들이 국무부에... 미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면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서 초래될 불가피한 결과로써... 결국 [한국에] 공산국가가 창출될 것이라고 일년 넘게 경고하였다는 점을 본인은 이 편지에서 정식으로 기록으로 남겨 두기를 원한다.” 또한 그해 5월에 이와 같은 취지에서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미국이 40년 전에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팽창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서신에서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에게 “지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과”과 “우리의 공통의 적인 일본”과 싸우고 있는 “한국인에게 모든 원조와 용기를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이런 간청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소련의 對韓 야심에 대한 보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미 국무부는 한국문제의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는 소련의 이해를 고려해야만 한다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루즈벨트가 처칠을 두 번이나 만난 퀘벡회담(1043.8.23; 1944.9.11)과 루즈벨트의 후임 트루먼 대통령이 포츠담에서 연합국 원수들과 회담할 때(1945.7.21)도 이승만은 전보로 한국문제를 처리해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는 극성을 부렸다. 1942년 이승만은 한국독립에 관심을 가진 미국인들로 구성된 한미협의회(The Korean- American Council)라는 후원단체를 조직하여 이 단체의 명의로 미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이승만의 이런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는 끝내 상해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카이로 선언 이후 중국 국민당측에서 임정승인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도 제동을 걸었다. 1945년 2월, 장졔스 총통 비서 샤오위린과 극동국장 발렌타인(Josehp W. Ballantine) 간의 대담에서 중국정부와 미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당분간 보류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테헤란에서 루즈벨트는 처칠, 장개석과 더불어 ‘적당한 시기에(in the course)’ 한국을 독립시켜준다는 카이로선언을 채택하였는데 이승만은 연합국의 진정한 진의를 의심하였다. 이승만은 한반도 문제에서 소련의 개입을 항상 경계하고 미 국무부에 소련의 한반도 야욕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하였었다. 이승만으로 볼 때, 미국이 소련의 이익을 배려하기 위하여 한국의 독립을 늦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Ⅶ
루즈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은 30년대까지 거슬러가는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다. 그 구상은 처음에는 선의로 출발하였다. 1942년 2월 미 국무부내에서 한국통으로 알려진 랭던은「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이라는 메모를 통해서 한국신탁통치의 골격을 마련했다. 한반도에서 소련, 중국, 일본과 같은 주변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독주하지 못하도록 새로 창설할 유엔의 신탁통치이사국에서 관리하는 방안이었다.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통한 세력균형이 형성되면 미국에게도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발언권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1943년 전세가 유리하게 되자, 전후 처리문제가 거론되면서 신탁통치문제는 본격화된다. 3월 27일, 루즈벨트는 헐에게 암시하기를, “한국은 중국, 미국 그리고 참전국 1, 2개의 기타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신탁통치하에 둘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후 루즈벨트는 전후 처리문제에 관하여 헐 국무방관을 대동하고 영국의 이든 수상과 의견을 교환하여 동의를 구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도차이나반도에는 신탁통치를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반환하고, 한국은 중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2개국이 더 참여한 신탁통치하에 두자고 시사했다. 1942년 송자문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루즈벨트는 송자문의 견해를 물었다. 송자문은 전후 한국이 독립되면 김규식, 김두봉, 조소앙과 같은 온건좌파들이 정권을 잡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송자문은 장개석의 처남으로서 친소적인 인물이었다. 송자문은 김구의 임정이 좌파가 포함된 좌우합작 정부로 바꾸도록 계속 압력을 넣었고, 1942년 12월에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 1943년 여름, 루즈벨트는 태평양전쟁협의회의 한 모임에서 송자문에게 한국민들의 저항운동의 가치를 평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송자문은 이승만에게 30만 재일교포들에게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길수와의 제휴하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이승만은 서로가 불목하는 악의적인 제휴에서 무슨 지도력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박하였다. 송자문은 한국민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기에 지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성급하게 보고하였다. 이로써 승인이나 무기대여원조를 받을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루즈벨트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즉각 독립이 아니라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구상이었다. 처칠은 인도 식민지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의 구상에 대해서 별다른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전시초부터 1945년 4월 사망할 때까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보다는 중국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야심에 의혹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에 미군의 사상자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미 군부는 대통령에게 소련의 참전을 강하게 건의했다. 조급해진 루즈벨트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소련에게 일정한 양보를 각오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이미 압력을 가해서 抗日국공합작을 성사시켰고, 전후 한반도에서도 소련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좌우합작 정부의 구성이 필요했다. 한국문제에서 소련의 양해를 구하려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노력은 정중하게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카이로 선언 발표 전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테헤란 회담기간 중 스탈린 원수와 협의하여 카이로 선언의 내용에 대해서 그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또 1945년 2월 4-11일간 개최된 얄타회담에서도 미국은 모든 극동문제에 관해 소련의 양해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Ⅷ
전시동안 미 국무부의 임정승인반대와 지나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친소정책의 지속은 이승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미·영·소 간의 비밀협약에 대해서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미 국무부에 대해 행했던 최종적 공격은 1945년 5월 유엔창설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였다. 이승만은 미소가 일본의 패망 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는 ‘얄타밀약설’을 발표하여 회의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국무부를 난처하게 만든 이승만은 그 소식을 공산당 출신의 소련인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샌프란시스코 회의기간 중 미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인대표단들에게 일본 패망 후 한반도에서 좌우익합작정부(공산세력과 자유세력간의 연립정부) 구성제의를 완강히 반대했다. 미 국무부가 부인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이승만이 비난을 계속하자 백안관이 전면에 나서서 부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영국 하원에서도 문제가 되어 처칠수상에게 이승만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묻는 질문에, 처칠의 답변은 비밀협약은 없었고, 논의된 많은 문제 가운데는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은 있었다고 답했다. 처칠의 궁색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얄타협정에 관한 이승만의 의심을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고정휴 교수(포항대)는 이승만의 얄타밀약설을 뚜렷한 증거 없이 제시한 “고도의 정치적 선전술”로 평가한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얄타에서 정확하게 한반도에 관한 밀약은 아니었지만 미·소간에 동아시아관련 비밀협약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정한경은 이승만을 “예언가적 통찰력과 전세계의 여론에 반하여 자신의 신념을 밝힐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진정한 정치가”라고 했다. 1945년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조오지아주에서 사망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후임자가 되었지만, 루즈벨트의 두 가지인 미 국무부의 친소․친공 인맥은 청산되지 않았고 또 한반도의 신탁통치·좌우합작정책은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아직 일본과는 전쟁중이었기에 미국 정부는 소련의 협조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종전이 다가오면서,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이미 좌우합작을 원하는데,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참여가 배제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올리버와 이승만 박사의 지인들로부터 나왔다. 이 우려에 대해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파느니 보다 나는 차라리 아이오와주의 조그마한 양계장으로 가서 은퇴하겠습니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이승만은 만약 한반도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면 결국 좌파의 우파에 대한 제압을 통해서 공산화가 되며, 한국민이 소련의 노예가 된다는 점을 굽히지 않았다. 8월 14일 밤, 이승만은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측근의 동포들과 조국해방의 기쁨을 나누면서도, 향후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다....미국이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걱정했다. 이승만은 귀국을 위한 제반수속을 위해 미 국무부와 접촉했지만, 얄타밀약설로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귀국에 순순히 협력할 리가 없었다. 국무부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은 10월 4일이었고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귀국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이승만의 귀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이와 같은 냉대는 김일성의 귀국에 대한 소련의 특별배려나 김구의 귀국에 대한 중국 장개석 정부의 우호적 환송과 크게 대조된다.
Ⅸ
젊은 시절 이승만은 조선말, 한반도에 대한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한국의 주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국제적 시각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기본적 독립구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등 서양해양문명과 협력을 취하는 한편, 반러·반소 노선을 취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 이승만의 국제적 인식의 기조가 된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이승만은 건국에 대한 기본적 구상을 본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대미승인외교를 강화하여 무기대여법에 의한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에서 아쉬운 것은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인물들을 적절하게 포용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많은 인물들이 중국과 러시아의 좌파-공산계열과 깊은 연대를 형성하여 반이승만 라인을 구축했을 때, 이승만은 무장투쟁론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천명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운동그룹이 드골의 지휘권을 인정했던 반면에, 일제식민지 상태가 장기화되면서 한국독립운동은 너무 분열되어있었다. 지정학적으로도 중국, 러시아, 미국 등지로 구획이 나뉘면서, 태평양 넘어 멀리 이승만이 무장독립투쟁을 추진할 인적, 물적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말기 미 육군부도 한인교포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 계획을 포기하였다. 자연히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통해서 독립운동 방략의 기본 지침을 마련했는데, 그 당시의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당연히 군사활동과 외교 노선의 긴밀한 협력과 조정이 필요했었다. 임정이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서는 대일전 교전단체의 하나로 직접 대일전에 참전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군대와 무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포사회의 총체적 역량 미흡과 한인사회의 오랜 분열과 파쟁으로 인해 군사활동과 외교노선은 함께 병진하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이승만은 병역을 체험하거나 집단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고 일찍이 해외 망명생활을 하였다. 성격적으로 토론에 익숙하기 보다는 자신의 직감과 통찰력에 의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여론과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을 취하는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진주만 기습은 미국에게 한국이 일본의 일부라는 인식의 對韓 無關心을 재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개입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게 된다. 그런데 30-40년대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추축국과 대항하기 위한 좌파-공산주의와의 통일전선이 용인된 분위기였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국무부는 어느 부처보다 친소파가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전시는 물론 전후에도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정부요직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반소반공노선은 미 국무부의 친소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승인과 한반도 신탁통치문제가 공공연하게 이승만과 갈등 대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고 교포사회의 분열상을 거론하면서 이승만의 국내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여전히 전략적으로 적국 일본을 중시한 점과 미 국무부 내에서 공산주의나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아서 전후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염두에 관리들이 포진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관심사 밖의 문제였다. 재미한인사회의 분열은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지 않으려는데 필요한 좋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이점을 간파했다. 그는 내심으로는 미 국무부의 불승인정책이 소련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이승만은 한편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국 정부 내에서의 친소친공세력과의 힘든 ‘2중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의 승인외교 노력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테헤란, 얄타, 포츠담에서 3거두들이 한국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역시 국제사회에 여론을 환기시킨 이승만의 끈질긴 외교 홍보 노력이 일정 부문 기여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이승만이 미 국무부를 상대로 힘든 투쟁을 하는 것은 성경에 나온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승만은 전시에는 물론 해방이 된 직후에도 좌우익합작노선에 끝까지 저항했는데, 그것은 좌익과의 합작은 결국 한반도의 공산화를 의미한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의 그런 반공신념을 미 국무부 관리들은 ‘옹고집 노인’의 고집으로 파악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전후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던 소련을 가장 경계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협력을 얻어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한국의 국익을 위한 최선의 가장 이상적인 독립운동의 방책은 아니었을지언정 그 당시의 역사적 환경과 주어진 여건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해방이후 중국의 공산화, 냉전체제의 도래, 48년에 있었던 남한내에서의 4.3제주폭동, 여수반란사건, 대구폭동과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이 공조한 한국전쟁의 발발이라는 긴 여정을 돌이켜 본다면 이승만의 좌우익합작의 불가론은 역사적 설득력을 가진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 학자들은 좌파-공산당을 포용하여 분단을 막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고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비판한다. 전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소수당으로 남아 있었지만, 소련이 미칠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경우와는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 환경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은 한국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이념형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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