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제일 잘 사랑할 수 있는 길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10, 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고 챨톤 헤스톤이 주연한 걸작 영화 벤허에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벤허가 자기 집을 들락거리면서 항상 대문 오른쪽 기둥을 손으로 만지는 모습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쉐마라고 불리는 본문의 말씀을 적어서 문설주 상단에 넣어 놓은 곳을 만진 것이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신 6:6-9)
쉐마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는 본문에 이어진 계명대로 따랐던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암송했고 자녀들에게 철저히 가르쳤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 민족은 없었다. 아니 참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는 못했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랑에 실패했다.
사랑이란 쌍방이 서로 사랑해야 하고 또 당연히 상대의 마음에 합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향한 유대인만의 짝사랑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도 신실하고도 무한하신 긍휼로 그들을 사랑하셨다. 각기 서로 핀트가 어긋나는, 대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다른, 사랑을 했다.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질 수 없었음은 필연적 결과였다.
벤허 영화에서 보듯 유대인들은 성실하게 본문을 문자적으로도 엄격히 준행했다. 말하자면 사랑의 행동에는 성공했다. 그럼 사랑하는 마음에 실패한 것인가? 본문대로 하자면 쉐마를 자기들 마음 판에 새기는 데에 실패했는가? 만약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이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어야 하는데,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새겼어야 하는데, 그분을 더 열심히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최선, 최고의 사랑 행위를 하려고만 노력한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들 마음 가운데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면 자연히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자기들 열심과 의지를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려 한다고 해서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
오늘날의 신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또 정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여러 사랑하는 방안을 동원한다. 혹시 그 방식에 자신의 정욕과 죄악이 스며들까봐 각별히 조심도 한다. 그런데도 막상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혹은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리 자신이 없다. 아직 그분을 사랑하는데 모자람이 많다고 여긴다. 그럼 참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유대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둔 데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원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했다. 포로 귀환 후에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 노력했다.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쏟아 지켰다. 명시적 언급이 없는 사안들은 장로들이 토라에 비추어서 판단한 의미와 절차에 따랐다.
히브리 본문은 우리말 번역과 달리 “이스라엘” 대신 “들어라”가 먼저 나오는데, 그 히브리 단어가 쉐마라서 통칭 쉐마라고 부른다. 그 의미가 단순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hear) 것이 아니다. 계명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유치원선생이 아이들에게 “Listen! Be Quiet!"이라고 말할 때에, 듣는다(listen)는 단어의 뜻은 실제로 장난을 그만두고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벤허 영화처럼 문설주에 쉐마를 붙여놓고 출입할 때마다 만졌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계명을 순종하면서 그분을 사랑했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 그 증거다.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힐렐 학파의 바리새인으로써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자부했다. 철저히 계명대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또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을 열심히 핍박했다.
하나님을 멀리 했던 죄를 회개하고 열심히 그분을 사랑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는 엄격한 계명 준수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소한 문자적 불이행도 허용될 수 없었다. 차츰 초기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계명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중시하기보다는 계명을 실천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결국은 형식적 종교로 변질되어버렸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율법을 순종하려 노력은 했었다. 반면에 오늘날의 신자에겐 순종하려는 성의, 아니 인식조차 없다. 대부분 내가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도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타산적 사랑에 그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계약 내지 흥정일 뿐이다. 그런대로 믿음이 좋은(?) 일부 신자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열심만으로, 다른 말로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사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과 똑같이 메마르고 열매 없는 껍데기 종교생활로 흐를 뿐이다.
사랑의 본질
사랑이란 인위적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점령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유가 붙으면 엄격히 따져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기에 만약 그 이유가 되는 배경 혹은 근거가 사라지면 사랑도 함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냥하고 애교가 많아 사랑하여 결혼까지 했는데 생활에 찌들려 상냥한 애교가 실종되면 사랑도 식어지지 않는가?
물론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런 남녀 간의 사랑에 비길 수는 없다. 그나마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에 가장 견줄 만할 것이다. 자녀는 혈연관계의 본성상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부모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때로 부모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식기도 하고 미울 때도 있을지라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방식을 열심히 모색해 실천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사랑이란 사랑하는 방식에 따라 사랑의 질과 양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사랑에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사람들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구태여 사랑의 본질이나 특성을 따지지 않는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그 상대를 정말로 더 열심히 사랑하려는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꾸 베풀기 원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누군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분명 진실이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는 한결 같을지라도 명절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사드리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듯이 말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정말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문제는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 그것도 종교적 행위에 헌신적인 여부로 그 사랑을 가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최선을 다해 봉사 헌신한다. 기도와 말씀에 열심이며 헌금이나 전도를 힘에 넘치도록 한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당장 어떤 마음이 드는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렇게까지 열심을 다해 헌신 봉사했는데 왜 어렵게 만드십니까?”라는 의심과 불평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그럼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간혹 싸울 수 있듯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윗이 시편에서 보듯이 하나님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선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기다 역으로 힘든 일을 겪지 않으려는 동기로 봉사와 헌신에 열심을 보였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선물 공세로 부부간의 사랑을 유지하려 드는 것은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하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랑이지 않는가?
하나님을 오래 참아주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앞선 글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사랑의 정의를 한마디로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에게도 똑 같이 행하면 된다. 하나님을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끝까지 그분을 참아줄 수 있다. 신자가 하나님께 참아준다는 것이 무례하고 어불성설 같은가? 아니다. 상기 구절에 사랑하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대입해보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에 대해 오래 참고, 그분께 항상 온유하며, 그분과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하여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분 앞에 나를 내세우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분께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그분께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그분께 성내지 아니하며, 그분 앞에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세상의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분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에 대해서 참아준다는 표현이 조금 이해되는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목적도 결국에는 그분을 끝까지 참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역으로 따져 보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베푸셨지 않는가?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과 원수 된 우리에 대해 오래 참고, 흉악한 죄인에게조차 온유하며, 세상 어느 것에 대해서도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그분의 사랑은 당신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누구에게도 성내지 아니하며, 어떤 악한 것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인간이 범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일방적 짝사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짝사랑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가슴에 품었던 짝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련한 모습 그대로다. 인간끼리 서로의 잘못과 욕심으로 갈등하지 않기에 아무 상처도 생기지 않는다. 평생 가슴에 일방적으로 품고만 있으니까 때가 묻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짝사랑을 하시는데 우리 중에 그분의 짝사랑에 걸 맞는 사랑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성경적 정의에 따라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말 진지하게 따져보자. 그리고 현재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행태와 비교해 보라.
우리 앞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들이 쌓여도 그분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는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그분을 끝까지 기다리는가? 아무 의심, 불평, 불신을 갖지 않고 말이다. 초기에 생기는 자연스런 부정적인 반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선 그분의 선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가? 등등
그분에 대해 항상 온유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가?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께 기도하면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는가?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천국에서 내려오는 따뜻함으로 자신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가?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자유와 안식을 그분에게서 찾을 수 있는가? 그분만 생각하면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 분노, 초조함이 사라지고 온유해질 수 있는가? 등등
세상에서 출세한 자, 권력을 지닌 자, 재물이 많은 자에 대해 정말로 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왜 나에게는 그런 형통을 안 주는지 하나님께 불평을 품지는 않는가? 나의 안전과 행복을 하나님보다는 다른 데서 찾지는 않는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질투는 선한 것이다. 하나님 그분보다 다른 이의 현실적 형통에 질투가 생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나보다 현실적 형편은 훨씬 못한데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영적 교제는 나보다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운 성도를 부러워한 적이 있는가? 등등
혹시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한 것을 하나님께 나와 자랑하지는 않는지? 헌금한 액수로 교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생색을 내지는 않는지? 대표기도를 은혜롭게 잘하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전부 수료한 것이 어깨의 계급장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훈련과 헌신에서 남보다 앞서도 아무 표도 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진정과 겸손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행할 바는 다했다고 자부하고 이젠 하나님이 보상할 차례라고 믿고 그분께 자꾸만 더 요구하지는 않는지? 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빚진 자로 자신을 온전히 낮추며 살고 있는지? 등등
자기 삶의 모든 활력과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옮을 확신하는지? 혹시라도 자기 능력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착각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잘 처리해내리라 자신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지성과 영성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여기지는 않는지? 범사를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 맡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앞서기보다는 자신을 과신하기에 기도하지 않고 처리하는 일은 없는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낮추고 비워서 그분께 내어드리지 않는 교만이 남아 있지는 않는지?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와 인생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등등
교회 내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직접적인 말과 행동으로 무례히 행치는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먹든 마시든 과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거나, 그들의 죄악에 부화뇌동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또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해져도 예수 믿는 자답게 거룩하게 행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가? 어떤 핍박과 멸시가 닥쳐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고 있는가? 등등
하나님 앞에서 혹시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은 어떻게 되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지?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을 정확히 인식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을 성취하려 하는지? 그보다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원하는 것마다 떼쓰며 기도하지는 않는지? 기도하는 제목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것은 아닌지?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제목들이 과연 있는지? 비록 그분의 뜻을 몰라 무엇이든 기도하더라도 정말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는지? 최소한 그분의 응답이 나의 기대와 달라도 가장 나의 유익을 위한 길임을 확신하는지? 등등
자신에게 어떤 위급한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께 성내지 아니할 자신이 있는가? 분에 넘치도록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겼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비례해서 축복을 받지 못해도 그럴 수 있는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욥과 같이 졸지에 모든 것들을 다 잃어도 그분께 끝까지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가? 등등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있는가? 세상의 악에 쉽게 굴복하지는 않는가? 세속적 방식과 교묘히 타협하려 한 적은 없는가? 잠간 눈을 감으면 매사가 형통할 것 같아서 일부러 국외자인척 한 적은 없는가? 하얀 거짓말을 하여서 사태를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끌지는 않는가? 하나님께 거짓을 한 적은 없는가? 헌신하거나 바치기로 결단하고서 준행하지 않은 적은 없는가? 등등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가? 정말로 저주하며 싫어하는가? 죄와 사탄과 사망에 대해 정의로운 분노를 터트리는가? 날로 완악하고 썩어져가는 이 땅을 보고 진정으로 애통해하며 그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을 두고 깊이 갈등해 본 적은 있는가? 반면에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뻐해본 적은 있는가? 자신의 삶 가운데 그분의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는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면서 그분의 진리를 지키고 키우는 기쁨을 누리는가? 진리를 알기에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최소한 진리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아는지? 등등
사랑의 특성 별로 대충 생각나는 대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적어 보았다. 더 구체적으로 깊이 따져 들어가면 이보다 훨씬 많은 사항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출석하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각종 종교 활동에 열심인 정도로 그분을 힘껏 사랑했다고 여기는 우리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알 수 있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준행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다. 그중 일부라도 성실히 행하면 아주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것이다. 그리고 상기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남은 특성이라도 제대로 부응하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과 열매 맺는 사랑을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래 참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기에, 최소한 그분의 인도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며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줄 확신하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분에 대해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앞선 글대로 그분에게 강청함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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