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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 /교회의 질서:경배와 찬양 1.

Joyfule 2005. 12. 25. 00:57
교회의 질서:경배와 찬양

                                                                                           신대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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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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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찬양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교회 예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의무로 여기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기쁨으로 드린다. 어떤 사람들에게 예배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거나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감정의 문제인 반면 다른 사람들에겐 가르침을 받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문제이다. 어느 것이 옳으냐를 떠나서 현대 사회에서 예배는 점점 영적인 의미를 잃어가면서 일터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 혹은 오아시스로 여겨지고 있다.

예배 양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 예배가 따분하며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은사 예배나 현대 감각의 예배가 생겨나고, 각 세대나 기호에 맞는 예배가 더 호소력을 가지며 각광을 받는다. 게다가 성령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회중의 예배 형태는 여러 모양으로 나뉜다.

찬양은 어떠한가? 찬양에 대한 이해는 연령과 교단과 문화와 나라마다 차이가 심하다. 찬양은 곧 예배라는 의견에서부터 예배에는 최소한의 찬양만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이르기까지 그 이해 차이는 매우 크다. 찬양의 형태에 있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악기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여기는 반면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해야 한다는 자들도 있고, 심지어 랩송을 부르는 것을 시대의 조류에 따르는 찬양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이라고 할 때 그 의미의 혼란을 가지기도 한다. 곧 경배와 찬양이 찬양 예배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찬양이 섞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찬양이 곧 예배라는 말인지 이해에 혼란을 가진다.

과연 예배와 찬양의 의미는 이처럼 사람들의 이해 정도에 따라 내맡겨질 수 있는 것인가? 예배와 찬양의 양식들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중요성은 상관없는 것인가? 경배와 찬양이라고 말할 때 그 둘은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문화와 관점 그리고 시대의 차이에 따라 예배의 형태와 찬양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게 나타나긴 하지만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따를 수 있는 '성경적' 예배와 찬양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예배: 요한복음 4:23, 24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4장 23, 24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예배를 정의해주신 구절이며, 그 안에는 예배의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망라한 예배의 근간이 되어야 하며, 이 말씀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라야 어떤 배경의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영혼을 열고 젖어들 수 있는 ‘성경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신령으로(in spirit)’ 예배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진정으로(in truth)’ 예배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에 따라서 생각할 때 경배와 찬양은 어떤 관계인가? 경배와 찬양은 교회 예배에만 적용되는가?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나? 

예배―하나님의 요구


먼저 예배는 사람들의 이해 정도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구원 역사의 큰 서막을 연 출애굽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모세를 보내어 바로에게 말하라고 명하신 메시지 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가 확인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예배할, Worship, NIV) 것이니라’(출 8:1). 정녕 하나님의 구원이 담고 있는 요구는 예배이다.

장소에 메이지 않는 예배


이러한 예배는 장소에 메이지 않는다. 물론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호렙산으로 부르셨다. 하지만 막상 호렙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하나님은 호렙산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호렙산 위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이셨다(출 19:1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성막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을 안팎으로 채웠다(출 40:34-38). 더군다나 그 성막이 이동할 수 있는 장막이었다는 것이 예배장소가 한 곳에 묶일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심지어 벽돌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도 하나님의 계신 곳을 언급할 때에는 성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 8:48b, 49).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못 박으며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것을 선포했다(합 2:20). 하지만 이 때의 성전은 구속되지 못한 피조세계와는 구별된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하늘 처소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고 했으며(미 1:2), 다윗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시를 읊었다(시 11:4). 더욱이 하박국의 선포의 강조점은 성전 ‘건물’에 있지 않고, ‘성전’의 기능 곧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서의 성전에 있기 때문에 하박국의 이 선포를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를 성전 건물로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신학 안에 갇힌 주장이다.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성전에 계시고,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성전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온 천하가 담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예배 장소가 예루살렘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해를 고쳐주기 위하여 두 가지 점을 강조하셨다. 하나는 신령(in spirit)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곧 ‘이 때’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다(요 4:23, 24). 자세히 살피면 이 둘은 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영으로’ 예배하는 것의 언급이 나오고 그다음 하나님이 영이신 것이 소개된 것은 당연한 귀추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예배해야 할 때를 ‘이 때’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예배를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수님 ‘당대의’ 시대에 예배 장소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 깊었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앞에 놓고도 예표적 성전인 예루살렘을 고집하는 그들의 감긴 시야에 ‘긴박한 현재적’ 도전을 던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예배할 때가 ‘이 때’라고 강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이어 말씀하신 것은 예배 장소에 대한 고정관념에 재차 도전을 던지신 확실한 선포였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물질 안에 갇힐 수 없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이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이 만나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갖춰야 할 절대적인 전제 조건은 예배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신령한 예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온 천하에 운행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특정의 사람이나 장소에 강림하심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신령한 예배가 가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서 열려진 신약 시대에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부어지면서(욜 2:28; 행 2:16-18)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고 자기들의 발이 내딛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모든 생활에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예배’와 무교회주의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규모가 작으면 두세 사람일 수 있고, 규모가 크면 공동체를 이루는 조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코 교회는 ‘무(無)’교회일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교회의 모임을 인정하셨고, 또한 그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마 18:20).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히 10:24, 25), 주일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에 일곱째 날을 거룩히 하시고 그 날에 안식하시면서 창조 세계 안에 부여해 주신 삶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요, 안식 후 첫 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안식을 누리는 성도만의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주일에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의 차원으로만 볼 때 예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배 안에 있다가 예배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신령으로 예배하는 모습’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산 제사’(롬 12:1)라고 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의 예배 정의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필 것은 ‘진정으로(in truth) 드리는 예배’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진정으로(in truth)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예배하는 자가…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받는 성도의 삶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이 없이 사람의 주장이나 요구나 가치관이 중심이 된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래서 호세아는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을 아는 삶의 모범이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셨다(요 6:38, 39; 10:37, 38; 17:4). 예수님의 온 생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표현해 낸 온전한 예배였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성도들도 모든 생활에서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려면 우선 진리를 사모하고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6-7).

더 중요한 것은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진리가 행함으로 나타나야만 참 예배라는 것이다(마 7:20, 24). 진리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진리가 삶을 다스려가는 가치관이 된다는 뜻이다. 진리를 행하는 모습은 획일적이거나 수동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하고 능동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와 대인관계에서 균형 있게 표현된다. 곧 전인적인 삶의 표현이다. 여러 모습이 있겠으나 성경이 소개하는 모습을 조금만 소개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히 13:15), 복음 전파에 전적으로 헌신하며(빌 2:17), 그리스도인 서로 간에 순종하고(엡 5:21), 필요한 자를 돌보며(마 25:40), 베풀고(히 13:2), 긍휼과 공의로 행하는 것 등이다(약 1:27). 세상의 태도나 가치관을 따른다면 어떻게 이런 모습이 진실하게 표현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원리를 내포한 삶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기초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