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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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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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삶에 대한 구체적
돌아봄
교회 예배
먼저 가장 실제적으로 교회에서의 예배 태도는 어떠한가? 온전하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단에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고 경고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이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모이는 교회로 예배하러 나아올 때는 하나님을 향해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지고 나오지 말아야 한다.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걸리는 모든 부분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소한의 시간투자, 책임 없이 지위만 지켜가는 헌신, 옆도 안쳐다보는 냉랭함, 예배
종료 바로 전에 슬그머니 빠져 나가는 공동체 기피태도, 쓰다 남은 물건 처분식 구제, 체면치레 헌금, 생색용 한턱 등…. 이것에 더하여 교회의
일을 할 때 항상 ‘가난한’ 기준과 최소 경비에 맞추려 하면서 자기 일은 최고의 기준으로, 아깝지 않은 투자로 진행하려는 것…. 이 모든 것은
이중적 외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바이다.
예배는 관람도 아니고 자선(慈善)도 아니다. 결코 혼자드릴 수
없고, 얼굴 도장 찍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기준은 마냥 가난함이어야 하고 자기 기준은 언제나 부요함일 수 없다. 개인주의 기준을 버리고
공동체의 기준을 찾아야 하며, 사유재산의 축적에서 돌아서서 공동체의 나눔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최선의 기준을 부과할 줄 아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신다. 또한 혼자 흘리는 눈물로만 교회 예배를 회복할 것이 아니다. 그 눈물이 다른
성도들의 마음과 함께 흘릴 줄 아는 눈물이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교회에서의 예배의 회복이 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예배 형태의 다양성은 어떠한가? 전통 예배, 현대 감각의 예배, 멀티미디어 예배, 새대별 예배 등…. 앞에서 다룬 성경적 예배를 따라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예배 형태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찬송가만 부르는 예배에서는 은혜를 못 받는다든지, 드럼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나가버린다든지, 통성기도가 방해가 된다든지… 이러한 문제를 먼저 걸고 나오는 성도는 예배의 본질을 모르는 자이다. 찬송가만 부르던, 드럼을
치던, 목청을 높여 기도하는 성도 옆에서 예배를 드리던 그리스도인은 어떤 예배라도 수용할 수 있는 기본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성도들의 모습을
포용하지 못하는 성도가 어찌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예배를 드리며 앉아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마냥
포용력 없음만을 비판할 일도 아니다. 예배의 기본 이해와 태도가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서, 노인이 신세대예배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호소할 때 왜 포용의 선을 넘어서 배타적인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가 생길 때는 어느 한쪽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예배의 공통요소를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세대예배’라든지 ‘노인예배’라는 형태를 굳혀버리면 성도 간의 일치보다 배타적 문화를 교회 안에 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세대간에 교류 없는 교회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게 되며, 끝내는 세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단명하는 교회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문화와 스타일은 도움의 요소일 뿐 본질이 아니다. ‘백인 교회’, ‘흑인 교회’, ‘노동자교회’,
‘경영자교회’, ‘지식인교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포근한가? 아니면 거부감이 이는가? 문화와 계층과 이해의 다양성을
고려하자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해는 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시대가 교회를
잡아먹은 모습이다. 문화와 특수성만을 고려하고, 교회 예배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모든 형태의 예배는 땅의 문화에 희생을 당할 위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문화는 ‘천국 문화’이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따라 어떤 부류와도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될 때, 그것이 ‘천국 문화’의 예배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모습인
것이다.
노래로 드리는 찬양
노래로 드리는 찬양은 왜 중요한가? 혹 찬양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진 않는가? 물론 성경은
찬양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한 예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그들의 기도와 찬미 소리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일이 있었다(행 16:26). 하지만 찬양 자체는 어떤 주문을 외는 식의 마술적인 힘이 아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날 때에 능력을 가진다. 바울과 실라의 찬미 소리가 기도 소리와 동반되었다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찬양은 결코 대상이 없는 노랫가락이 아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
찬양이며(시100:1-4; 22:3),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찬양이다(시29:1-2). 이런 점에서 찬양을 담은 음악의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랩이든 클래식이든 재즈이든 합창이든, 동원되는 악기가 현악이든 관악이든 북이든 장구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락에 심취하거나 흥에 취해 노래하거나 대중 인기에 편승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이것은 찬양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라도 사단의 음악을
담을 수 있고, 판소리라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찬양을 담을 수 있다. 찬양의 회복은 ‘하나님 중심의 마음의 회복’이지 드럼 소리의 회복이나
스피커 시설의 첨단 회복이나 전문 성악인의 회복이나 대중 인기의 회복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모든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집고 넘어갈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첨단 기기에 대한 의존성이다. 멀티미디어 시설이 잘 갖춰진 환경 속에서 찬양을 드려온 사람은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는 쉽게 마음을 열어 찬양하지 못한다. 마음을 열더라도 더디다. 똑같은
곡을 찬양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다. 때로는 장비 탓도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보다 기계로 드리는 찬양에 이미 익숙해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변함없고 동일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을 내면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기본이 충실한 자는 다른 더해지는 축복에 대해서 더 감사할 줄 안다. 마룻바닥에서 육성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가진 성도는 피아노 소리가
더해지면 감사가 더 충만하여 찬양한다. 최첨단 기기만 가지고 찬양하던 성도는 스피커 볼륨만 조금 달라져도 찬양보다 비판을 하기 쉽다. 바울의
찬양하던 곳이 어디였는가? 감옥이었다. 가장 기본만이 있던 곳이었다. 찬양은 악기의 선율에 노래를 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가락
소리에 악기의 선율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찬양인 것이다.
삶에 임하는
태도
마지막으로는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예배 모습이다. 매사에 일을 행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행하는가? 계획을 세우는 것? 이리 저리 연락할 사람을 뒤져보는 것?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기도하는 것?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은 단순한 생활의 진행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바로
사단과 싸워 이기는 영적 무기이다.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부터 자신이 서있는 그 땅이 거룩한 땅임을 알게 되었고, 신을
벗음으로써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인정했다.(수 5:14-15) 또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할례를 받고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수5:8-9, 10). 이 두 사건은 예배가 영적 싸움의 무기인 것을 보여주는 삶의
실례이다. 형식을 차려서 드린 예배는 아니었지만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자기가 서 있는 땅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신을 벗음과
같이’ 자기 의지로 행하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그 삶의 영역을 구별하여 드린 것과 하나님의 명하신 바를 잠잠히 먼저 행하면서 그 이후의
삶의 싸움을 진행해 나아갔다는 것이 예배하는 삶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예배와 이웃 사랑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이웃 사랑의 근간이다. 예배가 없는 자는 이웃 사랑이 없는 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1장 27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로마서 14장 18절의 말씀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 사랑의 모습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 두
모습의 성경적인 틀을 자기 안에 갖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5장 19절의 ‘찬양으로 서로 화답’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예배―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 예술
결국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 예술이다. 그 예술은 개인 작품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자기 재능과
자랑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아랑곳없이 자기 세계에 도취되어 빚어내는 예술은 이기적 예술이며, 자기를 신의 경지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의 경배를 자아내는 우상숭배의 촉발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이 녹아있는 예술을 창조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고, 참 생명의 길을 사모하게 하며, 의롭게 살려는 의지를 불어 넣어주고, 영원한 가치를 소유하려는 소망을 심어주며, 참 사랑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케 하는 ‘능력 예술’인 것이다. 삶 그 자체가 예배와 찬양인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에 도전을
던질 수 있고,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통해, 그리고 찬양을 통해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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