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100년사] 1946 朝-美 친선야구대회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한국야구 100년사 화보 |
[한국야구 100년사] 동래고보 포수 출신 원로 박봉조 옹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일본 팀과 경기할 때는 관중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였습 니다. ' 과거를 회상하는 박봉조(경남 양산시 교동) 옹의 입가에 미소가 떠돈다. 85세인 야구 원로 박 옹은 9살이던 지난 1929년 처음 야 구 공과 글러브를 잡아봤으니 올해로 야구 입문 77년째를 맞는다. 박 옹은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다. 당시 이웃이었던 하라다 양조장의 주인이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동네 아이들을 모아 야구 를 시킨 것. 이때 야구를 시작한 인연으로 동래고보(현 동래고)에 들어가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포지션은 포수였다. 동래고보 3학년이던 1938년에는 당시 부산 최강이던 일본인 팀 부 산1상을 '조선인 팀'으로는 처음 꺾는 감격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 다. 일본인 팀과 시합할 때면 거의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박 옹은 '1938년 서울에서 열린 일본갑자원대회 한국 예선 준결승에 서 일본 학교인 경성상고와 시합 때 일본인 심판이 노골적인 편파 판정을 일삼아 한국과 일본인 응원단이 서로 돌을 던지며 패싸움 을 벌였다'고 말했다. 학교 선수로서 활약을 인정받아 1939년 일본인 실업팀이던 부산철 도에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50원을 받고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박 옹은 '부산철도에 수많은 선수가 거쳐갔지만 한국인 선수는 나 말고 이상문,김필수,박인홍,박상화 등 모두 5명 뿐이었다'고 말했 다. 박 옹은 부산철도에 소속돼 만주원정길에 부산을 찾은 와세다,메 이지 등 일본 대학 팀들과 수시로 시합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박 옹은 1943년 일본 군부에 의해 야구금지령이 내려질 때까 지 부산철도 선수로 활동했다. 박 옹은 '당시 부산에 제대로 된 실업팀으로는 부산철도와 부산세관 팀이 있었지만 세관팀은 오래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박 옹은 해방 이후 1946년에는 야구 국가대표 창단 멤버가 돼 주 한미군과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으며 1950년 선수 생활을 접고 은 퇴했다. 박 옹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과거 화려했던 야구 선수 시절이 너 무 그리웠다'면서 '야구인들이 일제 강점기 때 한국 야구의 발판 을 다진 원로를 제대로 대우해줬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남태 우기자 |
[한국야구 100년사] 1982 세계야구선수권 첫 제패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한국야구 100년사 화보 |
[한국야구 100년사] 1905 황성YMCA 야구단 창단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한국야구 100년사 화보 |
[한국야구 100년사] 시름도 울분도 한방에 날려보냈다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야구는 일본 사람의 손을 거쳐 한반도에 첫 선을 보였다. 일본은 지난 1873년에 야구를 처음 시작했고 정부 차원에서 학원스포츠로 적극 장려했다. 대륙 진출을 위해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한 일본 은 각 역마다 야구팀을 만들었다. 한국인에게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킨 사람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 A)의 필립 질레트 선교사였다. 그는 1905년부터 YMCA에서 한국인 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야구라는 '서양 운동'을 신기 하게 생각한 젊은이들이 짚신을 신은 채 공을 던지고 치고 받는 게 고작이었다. 야구는 처음에는 '서양식 격구,서양식 타구'라고 불렸다. 황성YMCA에 뿌리를 내린 야구는 덕어학교,영어학교 등 각 외국어 학교로 번져나갔다. 1906년에는 국내 팀끼리 사상 첫 경기가 펼쳐 졌다. YMCA와 덕어학교가 YMCA운동장에서 열린 대운동회 도중 처 음 시합을 가진 것. 이어 휘문의숙이 1907년 사립학교로서 가장 먼저 야구부를 창단했 다. 경신학교,중앙학교,배재학당,보성학교,오성학교 등에서 야구 단이 차례로 만들어졌다. 1910년 이전까지 국내에는 13개 팀이 창 단됐다. 1909년에는 일본 도쿄유학생 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첫 경기에서 당시 국내 최강이던 황성YMCA를 19-9로 대파했다. 이 후 도쿄유학생 야구단은 1937년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모국을 방문,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개성 등 전국 각지를 돌며 국내 팀들과 야구 경기를 가졌다. 황성YMCA는 1912년 사상 첫 해외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첫 경기 에서 와세다대학에 0-23으로 패하는 등 7차례 시합에서 1승1무5패 의 비참한 성적을 안고 돌아왔다. YMCA는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고 한다. YMCA 야구단은 연이은 패배에다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해외 유학에 나서는 바람에 결국 1913년 팀을 해산하고 말았다. 한국 야구는 1920년대를 맞아 꽃을 활짝 피웠다. 당시 전국적으로 청년회 결성 붐이 일어 1921년에 446개나 생겼다. 청년회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운동을 적극 권장했다. 야구는 축구와 함께 특히 인 기 종목이었다. 1920년 11월에는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 회는 현재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1922년에는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선수를 주축으로 메이저리그 선수 2~3명이 보강된 미국 올스타 팀이 한국을 방문했다. 전조선 선발 팀과 경기를 가졌다. 미국 팀이 21-3으로 크게 이겼다. 한국 야구 는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1943년 야구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거의 소멸 위기에까지 몰렸다. 광복 이후 다시 모인 야구인들은 1946년 3월 18일 조선식산은행에 서 조선야구협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두달 뒤인 5월 17일에는 광복 이후 처음 경성,부산,대구,인천이 참가한 가운데 4개도시대 항 야구대회가 열렸다. 이어 같은 해에 청룡기 쟁탈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가 처음 열렸다. 49년 지방에서 는 처음 쌍용기쟁탈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현 화랑대기 전국고교 야구)가 개최됐다. 한국 야구는 이후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1977년 슈퍼월드컵세 계야구,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및 2000년 시드니올림픽 3위 등 국제 무대에서 빼어난 성적을 남겼다. 1982년에는 프로야 구가 출범,온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로 거듭났다. 남태우기자 leo@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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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100년사] 2000 시드니올림픽 감격의 銅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한국야구 100년사 화보 |
[한국야구 100년사] 부산야구의 기원 | ||
[부산일보 2005-01-01 00:03] | ||
부산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은 어느 팀이며 언제 창단했는지 등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부산의 야구 기록은 부산상고가 지난 1999년에 발간 한 '백양 삼세기-거룩한 발자취(Ⅱ)'에 나와 있다. 이 책에 부산 상고 13회 졸업생 윤언두씨가 쓴 '초창기 체육 이야기'에 보면 '(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개화운동이 급진전할 무렵 전국적으로 체육이 성행했다. 부산에서도 부산진교회를 중심으로 양성봉씨가 주최하는 야구가 시작됐다. 양씨가 주장 겸 1루수로 활약할 때 초량 청년들도 야구 팀을 만들었다'라고 돼 있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같은 해에 펴낸 '한국야구 사'에 따르면 '1920년 7월 17일 일본 도쿄유학생 5차 모국 방문야 구단이 부산을 찾아 초량구락부,부산진과 경기를 가졌다'고 돼 있 다. 당시 유학생 팀은 7-4,4-2로 모두 이겼다. 같은 책에 따르면 1921 년 한국인의 초량구락부가 일본인의 부산세관팀과 경기를 치러 8- 6으로 이겼다고 한다. '한국야구사'는 이밖에 '1920년에 동래고보 일부 학생들이 야구놀이를 했다'라고 전한다. 이 같은 기록을 종합해볼 경우 일본인들이 야구를 즐겼던 부산에 서는 이미 1910년대에 한국인들로 구성된 팀이 존재했으며 일본인 과,또는 한국인끼리 경기를 펼쳤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 팀은 부산상고(올해부터 개성고 로 개칭)다. 부산상고는 1923년 운동장이 넓은 서면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야구부를 만들었다. 윤씨는 '내가 주창하여 정영호,추경 수 등 동급생과 교내 희망자 20여명을 규합하여 매일 방과후 교정 에서 연습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이어 1926년에는 동래고보가 야구부를 창단했다. 일본인 영어교사 인 고지마씨의 후원을 받아 9명의 부원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남 태우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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