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폴 F 브레임 저.
‘위대한 장군 밴 플리트’ 중에서)
6·25전쟁에는 미국의 정치 및 군 지도층 자제들이 대거 참전하였다. 1952년 미 대통령으로 당선된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John) 중령이 미3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하는 등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이들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특히 해리스 美 해병 제1항공사단장은 장진호 철수작전 중 항공지원을 담당했는데 이때 그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미 해병 제1사단 7연대 3대대를 지휘하여 아버지의 항공지원 하에 장진호를 돌파하다 하갈우리에서 장렬히 戰死했다.
전후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Van Fleet, Jr) 공군 중위는 1948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B-26전폭기 조종사로 1952년 4월4일 야간 폭격임무 수행 중에 실종되어 사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벤 플리트 장군은 아들을 잃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대지휘에 만전을 기했다. 장군은 아들에 대한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고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미국 사회 지도층의 헌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주1.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스티븐슨 대통령 후보,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하여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한국전선을 방문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시 1950년 7월 8일 미 제24사단 제34연대장 마틴(Martain) 대령의 전사를 비롯해, 해군 참모총장 셔먼(Sherman)제독 순직, 워커 미8군사령관은 교통사고 사망, 무어(Moore) 제9군단장은 전선 시찰 도중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 미 24사단장 딘(Dean) 소장은 실종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1951년 원주 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네덜란드 대대의 대대장 오우덴(Ouden) 중령, 1951년 설마리전투에서 전사한 영국 글로세스터 대대의 대대장 카네 중령, 터키 제1여단 소속의 제1대대장 울운루(Uluunlu) 소령과 제2대대장 빌진(Bilgin) 소령도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때 전사하였다.
주2.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53년 중공군의 춘기 대공세로 중동부전선이 매우 불안했을 때, UN군 총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선시찰을 위해 의정부를지나 축석령의 고갯길을 오르던 중 기상악화로 인해 한국군 트럭과 부딪쳐전사하고 말았다. 전시에 총사령관을 잃자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고 한국군 운전병을 당장 총살하라는 여론이확산됐지만 미국과 UN군의 입장은‘안개로 인한 불가항력적 교통사고며 과실치사인 만큼 중형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한국에 통보해왔다. 이로 인해 한국군 운전병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 전쟁 초기 대전근방에서 치열한전투 중에 본대와 이탈한 미 24사단장딘 소장은 인민군에게 포위돼 36일간이나 탈출을 위해 노력했지만 한국 밀고자에 의해 인민군 포로가 돼는 비참함을 맛봤다. 3년간 북한 수용소에서 혹독한 고문과 처절한 억류생활을 겪었던딘 소장은 휴전과 함께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리고 딘 소장을 5달러를 받고 인민군에게 넘겼던 민간인이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해이 민간인을 석방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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