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제1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한국 선교
경교: 431년 에베소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하여
이단으로 정죄 선교사를 양성, 인도, 아라비아, 중국, 타타리까지 전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주후 635년 알로펜 일행이 당에 도착, 선교.
9세기 중엽 도교신자인 무종의 종교탄압으로 자연히 소멸
루부룩 : 로마교황청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을 '까울레(Caule;고려)라고 기록.
로마 가톨릭의 중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코르비노 신부가
도착한 1294년 이후 1305년 황제의 후원으로 선교가 크게 성공하여
수세자가 6천명(1307년 중국교구가 창설)
원나라가 1368년에 멸망함으로 소멸.
세스페데스 : 예수회의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1541년 프란시스 사비에르)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
세스페데스를 종군신부로 한국에 옴.
노예로 끌려간 한국인들에게 선교하여 2천여명의 기독교 신자들을 배출,
순교자들도 21명
소현세자 :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예수회 신부 아담샬과
친분을 맺다가 귀환시 서적, 교리서를 가지고 신앙이 돈독한 환관,
궁녀와 함께 귀국, 70일만에 세상을 떠남.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 등이다.
이들은 강학회를 열어 교리를 연구하고 계율을 지켰다.
이 승훈 : 정약용의 매제인 이승훈은 동지사일행에 딸려 중국에 가서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하며 교리강습을 받고 영세를 받은 후 1784년에 돌아왔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시작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로부터 100년 후인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 1785년(정조9년) 서울 명동의 김범우 집에서 모였다가
형리에게 발견되어 김범우는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중 고문의 휴유증으로 그 곳에서 순교하였다.
배 교자들 : 사학에 대한 탄핵의 소리에 유생들의 규탄의 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이승훈은 1791년 배교하였고 1801년 신유교난시 배교한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순교자는 아니었다.
정약용도 1797년 배교했고 이벽도 배교후 33세로 급사했다.
신해교난 : 무군무부의 종교로 오인된 것은 진산사건이다.
윤지충은 1791년 모친의 사망에 사복을 입고 호곡은 하였지만
시신에 절하거나 위폐를 모시지 않았고 후에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공서파는 천주교에 동정적이었던 채제공의 세력을 꺽을 목적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폐지문제를 트집잡아 결국 1791년 11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제사문제 :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제사를 단순한 정치적 의식으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도 유교의 발전된 형태라고 선전하여
유교의 상제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보유론(補儒論)입장에서 선교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해 교황청은
조상 제사의 금지를 명했고 한국 천주교회는 1790년 윤유일이
신부파송을 청원하기 위해 북경에 돌아오면서 비롯되었다.
신유교난 : 1795년 초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서울에 잠입했다.
정조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를 등용하였으나 순종의 섭정이 된 정순황후는
서교를 박멸하려 함으로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권철신,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이 배교하였다.
주문모는 6년간 숨어 포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되돌아가다가
자수하여 1801년 32세의 나이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