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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에 온 한약장수 - 장정식

Joyfule 2013. 4. 19. 09:31

 모국에 온 한약장수 - 장정식

 

 

서울 출장 길은 언제나 바쁜 일정이다. 덕수궁 앞을 지나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가에 노점상처럼 즐비하게 늘어 앉은 아낙네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중국에서 온 좋은 약이 있습네다. 좀 팔아 주시라요. 우황청심환이나 편자환도 많이 있습네다" 옷매무새도 눈에 설거니와 말씨도 귀에 설어서 알고 보니 중국에 서 온 교포들이다.

 

고향친척을 찾아 모국 방문 길에 노자나 보태려고 가지고 왔다며, 한국에 가면 우황청심원이나 편자환은 불티나듯 팔린다더니 생각보다 다르다며 투덜댄다. 잘 사는 모국에 와서 좀 벌어 가면 어려운 살림이 펴질까 했는데 먼저 왔다간 사람들이 재미는 다 봐버렸고, 파장 신세가 되었으니 본전 생각이 난다며 사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몽매에 그리던 고향 산천과 일가친척을 찾아 수십 년만에 조국을 찾아준 저들이 누구할 것 없이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무작정 있는 것을 몽땅팔아 그것을 밑천삼아 사온 한약을 모국에다 팔아서 한 몫 쥐어 보겠다는 빗나간 생각에는 입맛이 떱떨해진다. 중국을 여행한 한국인들이 동인당 한약을 싹쓸이하면서 졸부적 거드름을 얼마나 피웠으면 저들에게 그렇게까지 선전이 되었겠는가 생각하니 내가 왕부정 거리를 구경하던 때의 양상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

 

중국 여행을 했을 때다. 백두산 천지의 신령호수에서 심령을 씻고 청정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되돌아 500km를 넘어 달려 용정 중학교에 들렀다. 수십 년 민족교육을 해 왔다는 학교치고는 너무도 초라하다. 학교 시설은 누더기가 되어있고, 교지 또한 살풍경 하다.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출신자 중 저명한 인물들을 소개한 기념관은 비가 새고 허물어져 도괴 직전이어서 들어가면서도 섬쩍지근하다.

 

교장 선생님의 허름한 차림이며 초췌한 모습은 무서리에 시든 풀잎처럼 맥이 빠져 있는 몰골이다. 서울의 어느 기업인이 이 학교에 들렀다가 헐어빠진 교실을 보고 서울에서 보낸 기증한 칠판이라며 현관에 그득히 쌓아 둔 그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일행이 가지고 간 우리말 사전과 교과서 몇 권을 기증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연길시를 거쳐 심양 공항에 도착하니 8월 하순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낙조를 이루고, 대

평원의 풍만한 가을을 재촉하는 탐스러운 벼이삭이 황금물결로 일렁인다. 현지 안내를 맡아줄 k씨가 우리 일행을 맞으며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안내를 했다. 그는 일본계2세로서 일본인 관광객을 주로 안내하는데, 한국말을 잘하다보니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안내역을 두루 맡고 있다고 한다. 그는 역시 한국말을 썩 잘하는 편이지만, 말투는 함경도 사투리처럼 우리들 귀에는 거칠었다. 일모가 되었으니 숙소까지 가는 도중에 몇 군데 관광할 곳을 들러 가기로 하고, 첫 번째 들른 곳이 심양역전에 멋없이 우뚝 솟은 소련군 해방 기념탑이다. 탑보다 그 옆에 자리잡은 심양역이 눈에띈다.

 

심양역은 귀에 익지 않지만 봉천역이라고 생각하니 옛 듣던 이름이라 한층 친근해 진다. 심양역은 서울역을 연상케 하는 건축양식이라 구면처럼 느껴지지만 그밖에 주변에 있는 큼직한 건물이란 모두가 일제 치하에서 지어진 건물들이 고전처럼 남아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무슨 호텔이니, 병원이니 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네 같으면 이런 도심의 값진 땅엔 이미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섰을 법한데, 일제 때의 상황에서 변화가 없다고 한다.

 

변화라가 보다는 일제 때 식민지의 농토 개척에 주역을 한 동척 회사의 사원 아파트가 지금은 중국 공산당 고급 간부들의 관사 아파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재개발을 위한 투자 흔적은 한결같이 찾아볼 수 없으나 교외에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평야는 일제 치하에서 경지 정리가 되었고 바둑판처럼 닦아 놓은 논밭은 영원한 식민지의 곡창이라는 허황된 일제의 야망도 덧없는 망상의 역사로만 끝났음을 묵시하고 있다. 욕심나는 것은 가이없는 지평선으로만 이어지는 무한한 광야 그것이다. 국토의 남단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기가 바쁘게 내려야 하는 우리의 국토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저 광활한 땅 속에 묻혀 있을 무진장한 자원의 저력, 그러면서도 제도에 묶여 개인의 신장이 억제된 사회라는 안타까움이 交錯된다. 신바람이 난 안내원은 심양의 장점만을 소개 하느라 열을 올린다.

 

"여긴 얘, 전국에서 평야가 제일 넓고 식량이 제일 많이 납네다. 중국은 이제 식량 문제는 해결 했디요. 얘, 이제 중국에서 밥 먹고 살기는 걱정 없시오. 그러니까늬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 얘, 북조선에 갈려믄 얘, 자기 식량을 가져가야 합네다 얘, 북조선 사람들은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아주 부러워하고 있디요. 얘, 그리고 얘 심양에서는 공산품도 많이 생산됩네다. 그러니끼늬 심양은 중국 요녕성, 흑룍강성, 길림성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디요. 얘, 아무튼 이제 중국은 먹고사는 것은 해결이 됐시오. 이젠 걱정 없시오"

함경도 말투이면서도 자기 말을 다짐하는 식의 "얘"를 붙여 애교스럽게 말하려 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성공을 은근히 홍보하려는 낌새다.

 

"이제 밥 먹고살기는 걱정 없어요"를 연거푸 선전구호처럼 되뇌며 10억이 넘는 인구가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된 것은 대단한 성공이라며 싱글벙글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안내원의 어설픈 계략에 거부반응이 솟구친다. "여보세요, 이 세상에 밥 굶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자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인생을 보다 멋지게 즐기느냐 하는데 여념이 없는 판국인데 하루 세끼 밥먹고 사는 것이 뭐그리 대단하다고 열을 올리시는 거요"

일행중 한 사람이 것지르듯 핀잔을 하니 모두를 폭소를 터뜨렸다. 모두들 으스대는 기분들이다. 신바람이 나던 안내원은 터지는 폭소에 무색한 듯 시무룩하다가 는 "하지만 우리 중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것이디요" 라며 끝내 응수를 했다. "밥 굶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 고 힐난을 했지만 지구촌의 한쪽에서는 아직도 굶주림에 허기지다 못해 생명을 잃어 가는 인류가 줄지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11억의 중국인이 기아선상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저들로서는 크게 자랑할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진다.

 

개구리 올챙이적 모른다는 식으로 거만해지고 있는 우리네도 "초근목피"니 "보릿고개"니 하는 대서특필의 기사가 신문에서 사라진 지가 불과 25-6년 전이라고 기억되니까 말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사는 시장이나 상점에서의 우리네의 쇼핑은 거의 분별이 없다.

 

"부자나라의 고국에서 온 동포들을 환영한다"며 "만리 타국에서 소수민족으로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 좀 도와달라" 는 애조 섞인 말에는 어깨가 몇 센치씩 올라간 기분으로 흥청망청 허세를 부리기 일쑤다. 그것을 본 저들은 결코 우리를 허세라고만 믿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저들의 모국 방문이 한약 장사로 둔갑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물밀 듯 중국을 여행한 우리네는 너나 없이 졸부의 행세로 거드름을 피운 소이연으로 결국 저들을 한약장수로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이제 와 저들을 처리하기에 정부 당국은 골몰하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모두 졸부적 행위의 자업 자득이 아닌가?

 

수필가. 전남승주출생. 한국수필등단. 한국수필작가회장.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다도해 천백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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