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역사 | 원제 Happiness: A History/대린 맥마흔 (지은이), 윤인숙 (옮긴이) | 살림



철학, 역사, 심리학, 유전학, 스마일리 페이스를 망라하며, 행복 추구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야기하고, 또한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과 건축, 시와 경전, 음악과 테크놀로지, 문학과 신화를 포함한 많은 출처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지적 역사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를 서술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를 서술한다.



도시화의 패턴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정점을 이루지만, 1700년대의 도심은 이미 새롭게 집중된 시장, 즉 한 역사학자가 '소비자 사회의 탄생'이라고 묘사했던 것의 촉매제로 작용했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엄청난 해외 무역 붐, 신용 이용도의 확장, 인구 증가와 농산물 가격 상승의 '순조로운 결합'이 투자 증가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형태로 배당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중상층을 위한 소비재와 일용품의 공급은 10년 단위로 증가하고 있었다. 브라질 커피든, 서인도 설탕이든, 버지니아 담배든, 영국 도자기, 직물, 사치품이든 간에 현대식 의류의 폭발하는 시장처럼, 기분과 상상, 패션, 추세에 맞추어 다양한 층에 맞게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즐거움에 매료된 당대인들의 마음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프랑스 정부 관료이자 철학자인 안느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가 고찰한 것처럼, 현대의 상업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말하자면, 행복을 사고팔았다." (283~284쪽, '자명한 진실들' 중에서) |



대린 맥마흔 (Darrin McMahon) -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를 거쳐,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현재 플로리다주립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보스턴글로브」 등에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 관한 글을 다수 기고하며, 저서로는 『계몽의 적들(Enemies of the Enlightenment)』 등이 있다. 『행복의 역사』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하는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에 선정되었으며, 그 밖에도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이코노미스트」 「퍼블리셔스 위클리」 등 각종 매체의 찬사를 받았다. 윤인숙 - 서강대와 소르본(파리 4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2008년 현재 한양대에서 강의한다. 어느 자리에서건, 우리 인간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관심 분야의 양서를 번역한 작업성과를 내놓을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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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로크와 루소를 거쳐, 다윈과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복에 관한 숙고 - 뉴욕타임스 시종일관 견고하고 명석한 사고와 세련된 전개를 통해 독자들을 도발하며 자신의 견해를 흥미롭게 이끄는 탁월한 저서 - 퍼블리셔스 위클리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서술…… 행복에 대한 아이디어의 귀중한 발견 - 월스트리트저널 |



머리말∥행복의 계보를 찾아
서론∥행복의 비극
제1부 현대의 신념을 만들기까지
지고선
영원한 지복
천국에서 지상으로
자명한 진실들
현대적 의식
제2부 복음을 전파하며
증거에 대한 의문
자유주의와 그 불만들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며
즐거운 과학
결론∥행복한 결말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행복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이란 곧 미덕이었고, 로마인들에게는 번영과 신성한 은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행복은 하나님과 동의어였다. 이 책에서 맥마흔은 철학, 역사, 심리학, 유전학 그리고 스마일리 페이스를 망라하며, 우리의 행복 추구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야기하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맥마흔은 우리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불멸의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 속으로 우리의 여정을 이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맥마흔은 우리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불멸의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 속으로 우리의 여정을 이끈다...

행복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이란 곧 미덕이었고, 로마인들에게는 번영과 신성한 은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행복은 하나님과 동의어였다. 이 책에서 맥마흔은 철학, 역사, 심리학, 유전학 그리고 스마일리 페이스를 망라하며, 우리의 행복 추구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야기하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맥마흔은 우리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불멸의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 속으로 우리의 여정을 이끈다. 예술과 건축, 시와 경전, 음악과 테크놀로지, 문학과 신화를 포함한 많은 출처에 기반을 두고, 가장 잡히지 않으면서도 가장 갈망하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광범위한 지적 역사를 제시하는 역작이다.
인류 2천 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행복’에 관한
장쾌하고 치밀한 탐구가 펼쳐진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스웨덴인은 덴마크인보다 행복한가? 미국인이 일본인보다 행복하며, 러시아인이 터키인보다 더 행복한가? 과연 다른 문화보다 더 행복한 문화가 존재하는 걸까? 그런가 하면 아이슬란드,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노르웨이 국민들의 평균 행복 지수가 일본, 독일, 미국 그리고 프랑스보다 더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득 분배와 불평등, 사회복지 사업, 특정한 종교-역사적 특성이 작용한 때문일까? 또는 긴밀한 가족 관계나 정치 참여도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더 나은 유전자와 관계가 있는 걸까? 실제로 가능한 이유들은 끝이 없다. 더구나 주관적 행복이라는 복잡한 현상에는 단일한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욱 복잡하다. 최근에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민족의 주관적 행복 또는 상대적인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이며, 예의 편차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출발점 중 하나이다.
행복의 개념을 찾아 나서는 지적인 여행
그리스와 로마 철학의 산물, 그리고 수세기에 걸친 유대-기독교가 반영된 산물인 현대의 행복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계몽시대라고 부르는 17세기와 18세기에 탄생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현세의 삶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를 처음으로 가진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고전적인 철학과 기독교적 실천에서는 온 우주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다양한 행복이란 아주 드물었다. 고대의 행복은 빼어난 미덕이나 예외적인 은혜에 힘입어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행복한 삶이란 신성에 준하며,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것’이었다.
계몽사조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이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행복을 이 지상의 삶에서 모든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제 행복은 남녀노소 모두 원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인간에게 부여된 당연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신과 같은 오나전성에 대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달성할 수 있는 자명한 진실이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복에 대한 계몽사조의 약속은 초기에는 사회적, 지적 엘리트들만의 영역이었으며, 이후 점차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말에 이르러 행복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더불어 동기를 부여하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행복추구권은 ‘자명한 진실’이라고 했으며, 1789년 인간과 시민의 인권선언을 했던 프랑스인들도 선언문의 서문 마지막 줄에 ‘모든 이의 행복’이라는 고귀한 목적을 명시했다. 드디어 인간은 엄청난 추구를 시작했고, 지금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행복: 신의 선물 혹은 신의 분노
믿기지 않을 만큼 부자였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의 현자 솔론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크로이소스는 내심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왕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솔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한창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평범한 가장인 텔루스라고 답했다. 인생의 한창때 생을 마감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일까? 대체 우리는 솔론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행복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늘날의 개념들은 그리스 시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공포를 자아내는 일식과 월식, 주기적인 역병과 기아의 도래,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 이런 세상에서 삶이란 무언가 추구해나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견디어내는 것이었다. 세상이란 잔인하고 예기치 못한 것이며,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힘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므로 진정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행운과 축복이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되었음을 확신시켜주었다. 죽음이 아닌 그 중간 과정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시기상조였고, 착각일 수도 있었다. 신은 변덕스러웠다. 결국 크로이소스는 죽음에 이르러 “살아 있는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라고 외친다.
로마시대의 행복: 로마인의 남근상에 깃든 행복
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수세기 동안 잿더미 속에 묻혔던 도시의 빵가게 벽에 걸려 있는 표지판에는 남근상이 그려져 있다. 로마인들이 남근상이라 말하는 파시눔(fascinum)은 번영, 풍요, 권력, 행운의 상징이다. 후에 말발굽이 그랬던 것처럼, 남근상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상당수의 로마 건축물 입구를 장식했다. 파시눔은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단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그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풍요’였다. 풍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펠리키타스는 생명을 부여하는 힘의 현존을 암시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결혼식에서 하객들은 행운과 다산, 행복과 성공을 뜻하는 ‘펠리키테르(Feliciter)’ 또는 ‘펠리키아(Felicia)’를 외치며 축하했다.
기독교의 행복: 구원에 이르는 행복한 고통
서기 203년, 현재의 튀니지에 해당하는 카르타고에서 젊은 북아프리카 여인이 로마 병사들에 의해 구속되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결혼해서 한 아이를 낳아 기르던 22살의 페르페투아는 바로 그 전해에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공포한 기독교 개종 금지법을 위반한 죄로 고발되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던 그녀와 그녀의 하녀 펠리키타스를 포함한 몇몇 동지들은 구속 중에 완전한 신자가 되었고, 종교의식을 통해 서둘러 스스로를 정화하고는 비명 속의 최후를 맞이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들은 3월 7일, 당시 세베루스의 아들 게타의 생일 축제일에, 야유하는 군중들 앞에서 맹수에게 물어뜯기고, 맞고,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동지들은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가는 것처럼 침착한 표정으로, 환희에 넘쳐 떨며 감옥에서 원형극장으로 즐겁게 걸어 나왔다. 채찍질과 조소가 쏟아졌지만 그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박해당하고 욕설을 들을 때도 분명히 즐거워했다. 관중은 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전혀 보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탄 속에서 행복을 찾고, 고통 속에서 기쁨을, 슬픔 속에서 환희를, 죽음 속에서 황홀경을 구하는 것, 이것은 정말 기이한 도정이었다.
거룩한 사랑의 황홀한 극치, 해방과 무아경, 지복의 도래라는 행복은 총체적이고, 영원하고, 끊임없으며, 완전하다. 기독교는 세계만방에 이러한 보편적인 약속을 퍼뜨리며 새로운 길을 다져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왕국을 재건할 순간을 갈망하며, 그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 자신의 짐을 져야 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언질에 기운을 내고, 성인들의 모범에서 용기를 얻고, 다가올 영원한 지복의 약속에서 기쁨을 얻으며 그 짐을 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이르러 인간의 욕망이 보상될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는 왜 그리도 완전히 부정되어야만 하는 걸까? 만약 행복이 자연스런 상태라면,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의 안내 없이는 행복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일까?
계몽시대의 행복: 천국이 아닌 지상에서
18세기 유럽인들은 영국의 복스홀과 라느라그 등의 정원, 그리고 파리의 팔레 루아얄 같은 공간에 거대한 ‘오락 정원’을 세웠다. 그들은 그저 즐기고 ‘재미’를 느끼기 위해 그런 곳을 찾았다. 재미(fun)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으로 새로운 말이었다. 이는 중기 영어(1150~1500) ‘fon’의 변형으로, 17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인 오락 정원은 게임, 레크리에이션, 구경거리, 음식, 음악을 제공하는 현대판 놀이공원의 전신이다. 이런 곳들은 지상에 행복을 위한 장소를 창조하려는 18세기의 열망을 완벽히 상징하고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즐기며 동반자와 우리의 신체를 마음껏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의도한 대로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지상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차츰 벗어났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엄청난 해외 무역과 인구 증가, 농산물 가격 상승의 ‘순조로운 결합’이 투자 증가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형태로 배당금을 지불했다. 브라질 커피든, 서인도 설탕이든, 버지니아 담배든, 영국의 사치품이든, 기분과 상상, 패션, 추세에 맞추어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즐거움에 매료된 당대인들의 마음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프랑스 정부 관료이자 철학자인 안느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고찰한 것처럼, 현대의 상업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사고팔았다.”
현대의 행복: 현대인의 문화적 열망의 상징, 스마일리 페이스
하비 볼이라는 광고인은 매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 있는 한 생명보험사에 의해 합병된 회사에 속한 고용인들을 달래려고 ‘스마일리 페이스’를 창안했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볼은 커미션으로 45달러를 받았다. 그는 상표나 저작권 중 아무것도 등록하지 않았는데, 순수하게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그것은 아주 애석한 일이다. 1971년 한 해에만 5,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마일리 배지를 구입했고, 오늘날 그 이미지는 전 세계를 망라해 티셔츠, 문구류, 열쇠고리, 자동차 범퍼 등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잡지, 할리우드 영화, 광고, 텔레비전에서는 ‘실제’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유례없을 정도로 넘쳐났다.
스마일리 페이스는 좋은 느낌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완벽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이 상징을 광고인이 창안해냈다는 것은 더욱 어울린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영원한 쾌락을 향한 기대를 영속시키는 데 그들만큼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 만약 광고를 꿈을 파는 비즈니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제 그 꿈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종종 행복이라는 주제의 변주곡이다.
행복 DNA
1996년, 행동 유전학자 데이비드 리켄과 아우케 텔레겐은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에서 일란성과 이란성 쌍둥이 3,000명의 기분, 행동 그리고 성격 특징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일란성 쌍둥이들의 경우 같이 자랐건 아니면 태어나면서 헤어졌든 간에, 그들의 기분 혹은 주관적 행복이 내내 매우 유사했다는 점이다. 이란성 쌍둥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행복에 환경보다 유전자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당시 리켄과 텔레겐은 감정에 대한 유전 가능성 정도가 80%까지 이를 수 있다는 추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켄은 “더 행복해지려는 것은 키를 더 크게 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한마디로 행복의 추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의 유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들은 그보다는 조금 낮은 수치를 제시하지만, 그래도 50% 이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다. 다윈이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고찰했듯이, 인간 역시 동물처럼 자신의 유전자 상태에 따라 명랑, 변덕, 우울 또는 기쁨 등을 나타낸다는 견해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일반적 견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시작 단계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DNA 속에서 ‘행복 표지’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유형의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행복의 유전 가능성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유전자의 운명 앞에 그저 절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약을 거래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더 나아가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우리의 유전자를 실제로 조작할 가망성도 아주 먼 것만은 아니다.
행복 추구의 역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행복한 인생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행복과 자유는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할까? 행복은 단지 기분, 즉 기쁨과 고통의 미적분학일까? 아니면 때론 고통스런 희생을 감내하고 얻게 되는 값진 상이자 대가일까? 18세기가 지나고 나서도 이러한 질문들이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은 계몽사조가 행복을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과거로부터 분리해내는 데 전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행복은 아직도 마법에 빠진 채 초월성의 매력과 신성을 넌지시 품고 있다.
그러나 행복 추구의 본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변하고 있다. 이 사실은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불안한 전망을 안겨준다. 행복의 추구는 행복 자체의 몰락을 일으키게 되지는 않을까? 행복해야 한다는 현대의 지상과제는 그 자체로 불만의 형태를 낳지는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로크,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밀,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맥마흔은 우리 인류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얻어낸 행복에 대한 불멸의 사유를 되짚으며, 동시에 미술품과 시, 소설, 심지어는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사 속으로 우리의 여정을 이끈다. 예술과 건축, 시와 경전, 음악과 테크놀로지, 문학과 신화를 포함한 많은 출처에 기반을 두고, 가장 잡히지 않으면서도 가장 갈망하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광범위한 지적 역사를 제시하는 역작이다.
인류 2천 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행복’에 관한
장쾌하고 치밀한 탐구가 펼쳐진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스웨덴인은 덴마크인보다 행복한가? 미국인이 일본인보다 행복하며, 러시아인이 터키인보다 더 행복한가? 과연 다른 문화보다 더 행복한 문화가 존재하는 걸까? 그런가 하면 아이슬란드,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노르웨이 국민들의 평균 행복 지수가 일본, 독일, 미국 그리고 프랑스보다 더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득 분배와 불평등, 사회복지 사업, 특정한 종교-역사적 특성이 작용한 때문일까? 또는 긴밀한 가족 관계나 정치 참여도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더 나은 유전자와 관계가 있는 걸까? 실제로 가능한 이유들은 끝이 없다. 더구나 주관적 행복이라는 복잡한 현상에는 단일한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욱 복잡하다. 최근에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민족의 주관적 행복 또는 상대적인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이며, 예의 편차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출발점 중 하나이다.
행복의 개념을 찾아 나서는 지적인 여행
그리스와 로마 철학의 산물, 그리고 수세기에 걸친 유대-기독교가 반영된 산물인 현대의 행복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계몽시대라고 부르는 17세기와 18세기에 탄생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현세의 삶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를 처음으로 가진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고전적인 철학과 기독교적 실천에서는 온 우주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다양한 행복이란 아주 드물었다. 고대의 행복은 빼어난 미덕이나 예외적인 은혜에 힘입어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행복한 삶이란 신성에 준하며,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것’이었다.
계몽사조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이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행복을 이 지상의 삶에서 모든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제 행복은 남녀노소 모두 원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인간에게 부여된 당연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신과 같은 오나전성에 대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달성할 수 있는 자명한 진실이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복에 대한 계몽사조의 약속은 초기에는 사회적, 지적 엘리트들만의 영역이었으며, 이후 점차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말에 이르러 행복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더불어 동기를 부여하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행복추구권은 ‘자명한 진실’이라고 했으며, 1789년 인간과 시민의 인권선언을 했던 프랑스인들도 선언문의 서문 마지막 줄에 ‘모든 이의 행복’이라는 고귀한 목적을 명시했다. 드디어 인간은 엄청난 추구를 시작했고, 지금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행복: 신의 선물 혹은 신의 분노
믿기지 않을 만큼 부자였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의 현자 솔론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크로이소스는 내심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왕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솔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한창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평범한 가장인 텔루스라고 답했다. 인생의 한창때 생을 마감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일까? 대체 우리는 솔론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행복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늘날의 개념들은 그리스 시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공포를 자아내는 일식과 월식, 주기적인 역병과 기아의 도래,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 이런 세상에서 삶이란 무언가 추구해나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견디어내는 것이었다. 세상이란 잔인하고 예기치 못한 것이며,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힘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므로 진정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행운과 축복이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되었음을 확신시켜주었다. 죽음이 아닌 그 중간 과정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시기상조였고, 착각일 수도 있었다. 신은 변덕스러웠다. 결국 크로이소스는 죽음에 이르러 “살아 있는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라고 외친다.
로마시대의 행복: 로마인의 남근상에 깃든 행복
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수세기 동안 잿더미 속에 묻혔던 도시의 빵가게 벽에 걸려 있는 표지판에는 남근상이 그려져 있다. 로마인들이 남근상이라 말하는 파시눔(fascinum)은 번영, 풍요, 권력, 행운의 상징이다. 후에 말발굽이 그랬던 것처럼, 남근상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상당수의 로마 건축물 입구를 장식했다. 파시눔은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단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그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풍요’였다. 풍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펠리키타스는 생명을 부여하는 힘의 현존을 암시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결혼식에서 하객들은 행운과 다산, 행복과 성공을 뜻하는 ‘펠리키테르(Feliciter)’ 또는 ‘펠리키아(Felicia)’를 외치며 축하했다.
기독교의 행복: 구원에 이르는 행복한 고통
서기 203년, 현재의 튀니지에 해당하는 카르타고에서 젊은 북아프리카 여인이 로마 병사들에 의해 구속되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결혼해서 한 아이를 낳아 기르던 22살의 페르페투아는 바로 그 전해에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공포한 기독교 개종 금지법을 위반한 죄로 고발되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던 그녀와 그녀의 하녀 펠리키타스를 포함한 몇몇 동지들은 구속 중에 완전한 신자가 되었고, 종교의식을 통해 서둘러 스스로를 정화하고는 비명 속의 최후를 맞이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들은 3월 7일, 당시 세베루스의 아들 게타의 생일 축제일에, 야유하는 군중들 앞에서 맹수에게 물어뜯기고, 맞고,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동지들은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가는 것처럼 침착한 표정으로, 환희에 넘쳐 떨며 감옥에서 원형극장으로 즐겁게 걸어 나왔다. 채찍질과 조소가 쏟아졌지만 그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박해당하고 욕설을 들을 때도 분명히 즐거워했다. 관중은 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전혀 보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탄 속에서 행복을 찾고, 고통 속에서 기쁨을, 슬픔 속에서 환희를, 죽음 속에서 황홀경을 구하는 것, 이것은 정말 기이한 도정이었다.
거룩한 사랑의 황홀한 극치, 해방과 무아경, 지복의 도래라는 행복은 총체적이고, 영원하고, 끊임없으며, 완전하다. 기독교는 세계만방에 이러한 보편적인 약속을 퍼뜨리며 새로운 길을 다져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왕국을 재건할 순간을 갈망하며, 그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 자신의 짐을 져야 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언질에 기운을 내고, 성인들의 모범에서 용기를 얻고, 다가올 영원한 지복의 약속에서 기쁨을 얻으며 그 짐을 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이르러 인간의 욕망이 보상될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는 왜 그리도 완전히 부정되어야만 하는 걸까? 만약 행복이 자연스런 상태라면,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의 안내 없이는 행복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일까?
계몽시대의 행복: 천국이 아닌 지상에서
18세기 유럽인들은 영국의 복스홀과 라느라그 등의 정원, 그리고 파리의 팔레 루아얄 같은 공간에 거대한 ‘오락 정원’을 세웠다. 그들은 그저 즐기고 ‘재미’를 느끼기 위해 그런 곳을 찾았다. 재미(fun)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으로 새로운 말이었다. 이는 중기 영어(1150~1500) ‘fon’의 변형으로, 17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인 오락 정원은 게임, 레크리에이션, 구경거리, 음식, 음악을 제공하는 현대판 놀이공원의 전신이다. 이런 곳들은 지상에 행복을 위한 장소를 창조하려는 18세기의 열망을 완벽히 상징하고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즐기며 동반자와 우리의 신체를 마음껏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의도한 대로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지상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차츰 벗어났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엄청난 해외 무역과 인구 증가, 농산물 가격 상승의 ‘순조로운 결합’이 투자 증가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형태로 배당금을 지불했다. 브라질 커피든, 서인도 설탕이든, 버지니아 담배든, 영국의 사치품이든, 기분과 상상, 패션, 추세에 맞추어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즐거움에 매료된 당대인들의 마음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프랑스 정부 관료이자 철학자인 안느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고찰한 것처럼, 현대의 상업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사고팔았다.”
현대의 행복: 현대인의 문화적 열망의 상징, 스마일리 페이스
하비 볼이라는 광고인은 매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 있는 한 생명보험사에 의해 합병된 회사에 속한 고용인들을 달래려고 ‘스마일리 페이스’를 창안했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볼은 커미션으로 45달러를 받았다. 그는 상표나 저작권 중 아무것도 등록하지 않았는데, 순수하게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그것은 아주 애석한 일이다. 1971년 한 해에만 5,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마일리 배지를 구입했고, 오늘날 그 이미지는 전 세계를 망라해 티셔츠, 문구류, 열쇠고리, 자동차 범퍼 등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잡지, 할리우드 영화, 광고, 텔레비전에서는 ‘실제’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유례없을 정도로 넘쳐났다.
스마일리 페이스는 좋은 느낌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완벽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이 상징을 광고인이 창안해냈다는 것은 더욱 어울린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영원한 쾌락을 향한 기대를 영속시키는 데 그들만큼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 만약 광고를 꿈을 파는 비즈니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제 그 꿈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종종 행복이라는 주제의 변주곡이다.
행복 DNA
1996년, 행동 유전학자 데이비드 리켄과 아우케 텔레겐은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에서 일란성과 이란성 쌍둥이 3,000명의 기분, 행동 그리고 성격 특징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일란성 쌍둥이들의 경우 같이 자랐건 아니면 태어나면서 헤어졌든 간에, 그들의 기분 혹은 주관적 행복이 내내 매우 유사했다는 점이다. 이란성 쌍둥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행복에 환경보다 유전자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당시 리켄과 텔레겐은 감정에 대한 유전 가능성 정도가 80%까지 이를 수 있다는 추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켄은 “더 행복해지려는 것은 키를 더 크게 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한마디로 행복의 추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의 유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들은 그보다는 조금 낮은 수치를 제시하지만, 그래도 50% 이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다. 다윈이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고찰했듯이, 인간 역시 동물처럼 자신의 유전자 상태에 따라 명랑, 변덕, 우울 또는 기쁨 등을 나타낸다는 견해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일반적 견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시작 단계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DNA 속에서 ‘행복 표지’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유형의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행복의 유전 가능성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유전자의 운명 앞에 그저 절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약을 거래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더 나아가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우리의 유전자를 실제로 조작할 가망성도 아주 먼 것만은 아니다.
행복 추구의 역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행복한 인생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행복과 자유는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할까? 행복은 단지 기분, 즉 기쁨과 고통의 미적분학일까? 아니면 때론 고통스런 희생을 감내하고 얻게 되는 값진 상이자 대가일까? 18세기가 지나고 나서도 이러한 질문들이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은 계몽사조가 행복을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과거로부터 분리해내는 데 전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행복은 아직도 마법에 빠진 채 초월성의 매력과 신성을 넌지시 품고 있다.
그러나 행복 추구의 본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변하고 있다. 이 사실은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불안한 전망을 안겨준다. 행복의 추구는 행복 자체의 몰락을 일으키게 되지는 않을까? 행복해야 한다는 현대의 지상과제는 그 자체로 불만의 형태를 낳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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