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왕의 역사
▲ 로마의 총독들
처음 세 명의 로마인 총독들은 이 나라를 지혜롭게 통치한 듯이 보인다. 유대인이 로마의 통치를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수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주후 6-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대를 통치한 총독들 가운데 첫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 당시 총독(總督)에는 두 종류(원로원 계급 출신, 유대와 같은 소영지를 통치하는 기사 계급)가 있었다.
♠유대의 첫 총독은 코포니우스였다. 그는 헤롯이나 아르켈라우스가 가지고 있던 특권 외에도 대제사장의 법의(法衣)에 대한 보호권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총독은 주후 9년경에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교체되었다. ♠세 번째 총독은 주후 15년경 디베료 황제에 의해 11년 재임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로 대치된다. 돈을 벌기 위해 그 기간 동안 무려 4명의 대제사장을 쫓아내고 다시 임명하였다. ♠네번째 총독은 주후 26년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주후 26-36)가 총독이 되니,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사형을 언도한 자이다. 필로에 의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고집불통이며 고집과 잔인으로 혼합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이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궁전에 도금한 방패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기에는 헌납자인 빌라도의 이름과 대상인 가이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유대 지방은 요단 지역의 동부와 에스다엘론(Esdaelon)의 남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말하며, 이 지방은 차례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11개의 지구(toparchy)로 분할되었다. 하나의 지구는 하나의 대도시와 수 개의 부락을 포함하는 인근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유대력에 의한 중요한 절기 때는 예루살렘에 머물곤 했어도 그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총독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다. 그의 직무는 “로마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 그 속주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보다 중요한 사건의 재판”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주(州)가 아니라 제국의 속주(屬州)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가이사에게 보내졌다(마 22:17).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징수에 종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한 개인이 어떤 군(district)에 매년 할당된 액수의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청구하며, 그는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서 만일 배당액을 초과하게 되면 자기가 가져도 되는 과정에서 부당이득(토색)의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따라서 세리(稅吏, 라틴어publicani)는 ‘외세에 봉사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들은 다양한 세금(도시에서 도시로 전입되는 상품의 수출세 및 수입세, 주에서 주로 가는 선편에 대한 세금, 세금에 부과한 세금, 다리의 통과세, 입항할 때의 세금 등)을 징수하였다. 사법기능 또한 총독이 관장하였으며 사소한 사건들은 보다 저급한 유대인의 법정이 다루도록 위임된 반면에 중요한 범죄들은 그가 판결하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을 선고할 권세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총독(總督)에게 회부된다. 일상적인 민사소송이나 형사사건은 지방의 공회(公會)에 위임되었다. 총독은 또한 군사적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들을 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전선이었던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의 파견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자 즉시 수리아인 총독은 한 가지 세금을 징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것은 유대인에 의한 반란을 조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총독들은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유대를 통치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10년간 총독의 직임을 수행하였지만, 결국 주후 36년에는 유대인에 대하여 매우 잔인하다는 이유로 가이사 티베리우스(Tiberius)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빌라도의 후일에 대한 기사로서,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가이우스가 황제로 다스릴 때, 빌라도는 “자살로써 스스로를 심판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를 무섭게 뒤쫓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
▲ 제2기의 총독들(A.D.44-66년 사이 팔레스타인의 7명의 총독들)
♠파두스(Cuspius Fadus, A.D.44-48): 자기가 통치하려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해보니 불안한 상태인 것을 깨달았다. 유대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파두스는 유대에서 강도들의 만연을 해소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제복을 빼앗아 안토니오 탑에 보관하였으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변인을 보내어 그 제복의 관리권을 갖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다. 처음 두 총독 파두스와 알렉산더의 행정은 비록 이따금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온건하고 평화스러웠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A.D.48-52): 통치는 심각한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유월절에 한 로마 군병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발발한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징계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쿠마누스의 추방을 초래하였다. 세 번에 걸쳐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 책임이 쿠마누스에게 있었다.
♠벨릭스(M. Antonius Felix, A.D.52-60): 황제의 모친인 안토니아(Antonia)의 해방 노예였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재정을 맡은 팰라스(Pallas)의 형제였다. 팰라스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음모의 위험에서 구한 일이 있어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고 재무장관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으로 벨릭스가 총독이 된 것이다. 그는 유대인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의 전임자들보다 더욱 거칠었다. 시카리(Sicarii, ‘단검을 찬 자’)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이 사람을 죽이는 흉포함 때문에 그들로 인한 공포가 나라 안에 퍼졌다. 시카리 단원들은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행21:38). 또한 메시야의 출현이 가끔 있었다. 행 24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바울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주후 60년에 총독 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베스도가 이어받아 총독이 되었고, 그는 전 총독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울 문제를 빠르게 처리했다. 즉 그는 바울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낸 것이다. 그는 명문 출신이었고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의 반 로마감정은 완화시키지 못했고 주후 62년에 죽었다.
♠베스도(Forcius Festus): 통치 기간은 상황이 괄목할 만하게 호전되었으나 그는 유대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환되었다. 주후 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며 피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알비누스(Albinus):,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다스렸다. |
헤롯 아그립바1세가 죽자,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B.C.10~B.C.54)는 41년에 제3대 황제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4번째 아내인 소(小)아그리피나는 자신과 전 남편 사이의 아들인 로마 5대 황제 네로를 만들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먹을 버섯 요리에 독약을 넣어 암살함, 율리아 아그리피나(형 게르마니쿠스의 딸)와 혼인하지만 율리아 아그리피나는 정치적 야심이 큰 여자로, 클라우디우스를 없애고 자신의 핏줄인 네로를 황제에 즉위시킴)
클라우디우스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아래 두었다. 이들 7명의 총독들이 다스리는 기간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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