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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前이나 지금이나

Joyfule 2015. 6. 24. 00:00

 

 

 

100년 前이나 지금이나

 

김성곤 /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온 어느 외국인은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당시 조선사회에 대해 흥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는 웃고 넘길 만한 것도 있고, 지금은 사라져 해당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그 외국인은 “한국인들은 단순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과연 우리는 아직도 사춘기 청소년처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좋고 싫은 것을 금방 표정으로 드러낸다. 한국이 외교에 능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고, 세계적인 포커 선수가 없는 것이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교육의 목적이자 교양의 척도 중 하나는 감정을 통제하는 것인데, 우리는 세계 최고의 교육국가면서도 좀처럼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 외국인은 또 “한국인들은 당장 눈앞의 은혜(恩惠)에는 감동하고 위엄(威嚴)에도 복종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은혜를 베풀면 당연하게 생각하며 위엄을 가하면 곧 원망(怨望)한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어려울 때 이웃과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인지 우리는 은혜를 쉽게 잊고 신세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우리는 권위나 계약에도 잘 승복하지 않는다. 법이 엄정하게 집행되지 않아서인지 정부나 경찰을 존중하지 않으며,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잘못을 지적하면 ‘네가 뭔데 시비냐’고 대들어 오히려 봉변(逢變)하기 쉽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의심환자’로 격리 중인 사람이 병원을 탈출하거나, ‘자가격리’ 대상자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당국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스포츠 경기의 판정이나 각종 선거의 결과에도 승복(承服)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국가 대표끼리 서명한 협상도 무효라고 떼를 쓰면서 재협상을 하라고 데모를 벌인다.

또 그 외국인은 한국인들은 “급하면 우선 그 자리만 피해 보려고 하며, 결코 멀리 보지 않는다”고 썼다. 실제 우리 정치인들은 우선 그 자리만 피해 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 돈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나중에는 돈 받은 사실이 다 드러난다. 또 우리는 사고가 터질 것이 뻔한 데도, 좀처럼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지 않는다.

상인들도 멀리 보지 않고, 어찌 됐든 우선 팔고 보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어떤 물건이 잘 팔리면 곧 비인기 품목을 끼워서 세트로 팔거나 가격 인상을 시도한다. 예전에 외국 어느 대학에서 열린 국제 푸드 페스티벌에서 우리 음식이 잘 팔리자 값을 올렸다가, 어처구니없어하는 그 나라 학생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는 것을 보았다. 또 명절 때면 값을 내려 박리다매(薄利多賣)를 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는 명절이 다가오면 우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해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한다.

다음으로 그 외국인은 “한국인들은 나태하고 위기를 못 느끼며 무사태평(無事太平)하다”고 지적했다. 과연 날마다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로 위협받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살면서도 우리는 도무지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경제위기나 국가적 위기가 다가와도 우리는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설마 어떻게 잘 되겠지 하면서 그저 무사태평이다.

“한국인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국제 정세에는 더욱 어둡다”는 지적에는 도저히 반박의 여지가 없다. 지구상에 우리처럼 세계정세에 어두운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별 관심이 없으며, 현재 국제 정세가 얼마나 긴박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고 융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한국은 유교 국가라고 자랑하지만, 도덕과 윤리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과 허례허식(虛禮虛飾)에만 얽매인다”는 지적도 가슴을 뜨끔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유교의 장점인 도덕과 윤리보다는, 유교의 단점인 형식과 허례허식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명분과 체면에만 매달려 실리를 챙기지 못한다.

“남의 일에 호기심이 많고 구경을 좋아한다”는 지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 민족의 특성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에 관심이 많아서, 예컨대 누가 이혼하면 꼭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또 우리는 길거리 무료 단체관람을 좋아해서, 거리 공연이 있으면 금방 구름처럼 모여들고, 싸움이 나면 말리는 대신 재미있게 구경한다.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한국에 온 미국 작가 잭 런던은 “한국인은 모여서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는 자기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도, 일단 도망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싸움구경을 한다”고 썼다.

그 외국인은 우리의 장점도 인정했다. 예컨대 “한국인은 공예품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며, 의관(衣冠)이 운치가 있다”고 칭찬했다. 우리의 장점이 어찌 그것뿐이랴. 세계가 놀라는 경제발전과 역동적인 에너지, 그리고 비상시에 드러나는 국민단합과 위기 극복 능력 또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인의 장점이다.

그 외국인이 다녀간 뒤로,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외국인이 지적한 문제점의 상당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상존한다. 그러한 단점을 인정하고 고쳐나갈 때, 그리고 선진국의 특성인 관대함과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중도덕을 갖출 때,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