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
그 시절 놀이터에서
글 공광규(시인)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고, 뚝섬에서 유아기를 보내다가, 충남 홍성 옥암리 큰할아버지 댁과 보령 청나 광산촌을 거쳐, 청양으로 내려가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성장기 내 놀이터는 ‘자연’이다. 지금은 도시에 살면서 생업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자연 제재(題材)가 시에 많이 등장한다. 시에 풀과 나무와 꽃과 동물을 비롯하여 자연 사물이 자주 등장을 하는 것을 보면 성장기에 자연을 놀이터로 삼아서 지낸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내 놀이의 첫 기억은 신발에 흙을 담아서 실어 나르는 자동차 놀이였다.
도락꾸(트럭의 일본말) 놀이라고 했던 것 같다. 보령에 살다가 아버지의 고향인 청양 집으로 막 이사를 갔었는지 잠시 다니러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보다 세 살인가 더 많은 낙연이 형과 그의 동생 수연이와 같이 했던 놀이다. 놀이를 하다가 그 형제들과 다투었던 기억은 확실하다. 그래서 기억이 나는 것 같다."
그 놀이를 하면서 들판 건너 면소재지에서 부여군 외산면으로 오고가는 길로 트럭이 광석이나 소나무를 싣고 오고가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니 자동차 놀이는 그 트럭들이 짐을 싣고 다니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일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하니 트럭들이 실어 나르던 소나무들은 광산 갱도를 받치는데 사용하던 갱목이었다. 그런 소나무들 가운데 꺾이거나 상처가 난 부분은 공처럼 뭉툭하게 자라는데, 이 부분은 곧지 않아 대부분 갱목으로 쓰지 않고 땔감으로 버리는데 그걸 구해서 놀기도 하였다.
당시 청양에는 유명한 금광인 구봉광산이 있었고, 구봉산 자락에서 금방아를 찧는 소리가 동네까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동네 고개 너머 온암리 용주골에도 금광이 있어서 여전히 금방아 찧는 소리가 산을 넘어왔고, 호롱고지와 고실에도 폐광이 얼마 안 된 굴과 폐석 더미가 있었다. 우리 동네 홍구네가 살던 산막집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폐광된 굴과 버럭 더미가 있었다.
고향 부근은 일제 때 광산이 성업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변에 광산이 많다보니 폐광된 굴이나 파쇄 된 폐석 더미가 좋은 놀이터였다. 폐석 더미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비가 내려도 빗물이 잘빠져서 신발에 진흙이 묻지 않았다. 그러니 흙과 진흙투성이인 시골에서 폐광된 굴이나 폐석 더미는 좋은 놀이터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로 하는 놀이는 동네 형들을 따라서 하는 전쟁놀이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어른들은 모두 전쟁을 체험하고, 전쟁 경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시절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상경이 삼촌이 파병을 가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열심히 반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던 때라서 전쟁놀이는 주로 국군과 인민군으로 나누어서 했다. 이런 놀이는 폐광 굴과 폐석 더미에서만 한 게 아니다. 뒷산 바위가 소의 뿔을 닮아서 소골이라고 부르는 동네 이름 유래가 된 뿔바위나 오래된 소나무가 많은 청주 한씨네 입향조 모이마당(뫼 마당)에서도 했다.
"동네 앞산 너머에 폐광된 석면광산이 있었다. 그 아래 동창생 흥진이가 살았다. 컴컴한 굴속이니 바닥이 보이지 않아 공포감을 주었고, 돌은 던져 넣으면 한 참 후에 소리가 날 정도로 깊었다. 굴에서 파낸 돌은 표면이 파랗거나 흰 비늘을 달고 있어서 손톱으로 긁으면 떨어져나갔다. 매끈한 표면이 햇살에 반짝여서 아름다웠다."
석면이 몸에 축적되고 암을 유발하는 광물인 것은 한참 후에야 언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예쁜 돌을 주워 책상 책꽂이 앞에 올려놓고 감상을 하였다. 수채와 물감으로 석면 돌에 꽃을 그려놓기도 하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 보니, 아버지가 오십대 중반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것은 폐광된 석면광산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석면광산은 집에서 서쪽에 있었는데, 서북풍이 불면 집 쪽으로 먼지가 날라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석면 돌을 표면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아끼고 책상 앞에 애지중지 모셔놓고 지냈다니 아찔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청양 읍내와 외산면을 오고가는 신작로와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 만나는 길목에 곱돌광산도 있었다. 어려서는 폐광 상태였다. 그 앞에서 하루에 한두 번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를 탔다. 물론 읍내로 가는 버스나 외산면 쪽으로 가는 버스도 거기서 탔다. 곱돌광산은 폐광을 하였지만 곱돌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지금도 눈에 띄게 굴러다닌다. 재질이 다른 돌보다 무른 곱돌은 좋은 놀이감이었다.
"곱돌을 돌에 갈아서 둥글거나 각이 진 모양을 만들고, 딱딱한 땅이나 돌에 그으면 흰 자국이 나오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서 도장을 파기도 했다. 쇠로 구멍을 뚫기도 했다. 이런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성인이 되어서는 넓은 곱돌로 삼겹살 불판을 사용하기도 하고, 곱돌벼루를 만들어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 지금도 아파트 베란다에는 시골에서 주워온 곱돌이 여러 개 있다.
이 곱돌 폐광산에서 샛길로 고개를 넘어가면 중학교가 나왔다. 고개 이름이 분토고개이다. 그 고갯길 옆 구부능선 쯤에 남향의 묘가 있었다. 이 묘 마당 또한 내 놀이터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묘 마당에서 쉬었다. 한참 성장기이니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항상 피곤하고 졸렸다. 혼자일 때는 모자를 얼굴에 덮고 한숨 자고서 집에 갔다.
어느 날 묘 마당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옷을 털면서 정신을 가다듬는데, 가까이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바위와 돌이 많은 메마른 땅이어서 키가 작고 꽃은 한 송이만 피어 있었다. 이 가녀린 도라지꽃은 오랫동안, 지금까지 나의 심상에 남아있고, 이 도라지꽃을 소재로 시를 쓰려고 무척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시골 동네는 산의 서쪽이었다. 그래서 항상 들 건너 맞은 편 동네인 지초실보다 햇볕이 늦게 왔다. 그러나 높은 산이 들판 건너 멀리 있어서 하늘은 훤히 열려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을 자주 볼 수 있는 동네였다. 당연히 구름이 온갖 사물의 모양을 만들면서 지나가는 것을 오랫동안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옮겨 <구름>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이것을 김재홍 화가의 그림과 합하여 한 권의 책을 냈다. 그림책 『구름』이 된 것이다.
이 시의 발상은 인생은 한조각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같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원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을 순차적으로 구름이 생겨서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돼지를 만든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성장기 놀이터의 경험을 시로 쓴 것이다. 오랜만에 하늘을 보자.
-『구름』 전문
별 하늘에
구름 한 덩이가 일어나더니
쥐를 만들었다가
소를 만들었다가
호랑이를 만들었다가
토기를 만들었다가
용을 만들었다가
뱀을 만들었다가
말을 만들었다가
양을 만들었다가
원숭이를 만들었다가
닭을 만들었다가
개를 만들었다가
돼지를 만들었다가
또, 뭘 만들지?
하늘에는 열두 동물 눈들이
말똥말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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