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율리우스 벨 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

Joyfule 2018. 5. 23. 09:41


 

 율리우스 벨 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

 
   1.일 생


  독일에 있는 하멜린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벨 하우젠은,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괴팅겐 대학으로 갔다.(1862). 그는 이 학교의 보수적인 모습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고전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새로운 비평적 운동과 게르만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에발드(Heinrich Ewald)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Geschichte des Volks Israel)을 읽게 되는데 이것이 그는 비평학적인 연구에 열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에발드의 결론들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괴팅겐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셈어를 연구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강사가 되었다.(1870).  

  그는 1872년 그리스발드에서 구약과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성경역사에 관한 그의 비평적인 입장은 교회의 심각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그는 1882년 사임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의 『이스라엘의 역사Ⅰ』(Geschichte Israel Ⅰ. Marbug, 1878: res. ed., 1883;ET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서론』<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 Edinburgh, 1885>)의 출판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한 일들이었다. 이후 그는 할레에서 셈어를 가르치다 1885년 말부르그에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1892년, 그는 폴 드 라갈드의 후임으로 셈어를 가르치기 위해 괴팅겐으로 다시 돌아와 1918년 1월에 사망 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2. 연구 업적

  성경역사와 해석에서의 벨하우젠의 작업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히브리 언어학과 본문비평, 그리고 좀더 광범위하게는 문학구성, 자료분석, 구약성경 처음 6권과 이 6경에 나타난 내용의 연대적 나열 등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대 이스라엘백성들의 발전, 성장, 그리고 점차적인 쇠퇴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주요한 기관들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스라엘-유대 백성들의 국가적 정신이나 경건에 대한 평가와 기독교 출현을 위해 준비된 유대 종교역사에 대한 평가도 다루었다.


세 번째는 20세기이후의 연구인데, 그는 마가복음에 시작하여 초대 기독교 전통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다(1903). 물론 이러한 연구들에서도 구약성서에서 보였던 그의 비평적이고 날카로운 방법은 진가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발전연대를 확립하기 위해 사상들에 대한 설명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3. 구약에 대한 연구
  
  19세기에 들어와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적인 발전에 대한 재구성의 우선적인 문제는 바로 육경의 복잡한 문학적인 구조를 밝히는데 있었다.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 벨하우젠은 1870년대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육경과 구약 역사서의 구성』(The Composition of the Hexateuch and the Historical Books of the Old Testament, 1876-1877년 저널의 논문으로 처음에 출판됨)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기존의 그 주제에 관련된 논문들을 모은 것이었다.

 


벨하우젠은 초기 엘로히스트(First Elohist)라고 불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최초의 문서라고 간주되었던 자료가 사실은 후기에 기록된 것임을 인식하고 이 자료를 그는 Q문서라고 불렀다.(Quattuor, 네 번째 주요 자료이고, 네 개의 주요 언약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묘사한다고 해서) 이를 오늘날에는 제사장(P.Priestly) 문서라고 불리운다.


그는 이문서가 포로생활 후의 문서로서 모세의 예식적인 규례들을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율법서의 종교는 대선지서들 이후의 것으로 보고 율법적인 유대신앙을 대변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이후 벨하우젠은 육경의 문학적인 기원과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네 개의 문서 가설(J(여호와 혹은 야웨)문서, E(엘로힘)문서, D(신명기)문서, P(제사)문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도달하게 되었다. 육경이 결국 이러한 주요 문서의 자료분석에 포함하게 되었고, 그는 이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까지 다루었다. 즉 그는 서기관들이 직접 기여한 바는 적고 주로 편집하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설은 책으로 출판되고 25년이 채 못되어 육경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문학적 설명으로서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벨하우젠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 항목인 “이스라엘”(1880; 사적으로 인쇄된 독일원판이 1965년에 재인쇄되었다)에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삶의 모습을 재구성한 짧은 논문을 기고하고, 『이스라엘-유대 역사』(Israelitische-Jüdische Geschichte, 1894)라는 책에는 이 문제를 좀 더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이 책은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특히 서문인 이스라엘 역사Ⅰ) 동시에 유대학자들의 반대도 심했다. 또한 정통과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벨하우젠의 입자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세속적이고 비계시적인 면만 보게 만든다고 해서 그의 입장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