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우르와 지구라트
갈대아(Chaldea) 뜻: 약탈
바사국의 서편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지방. 앗수르어갈두의 희랍어역 갈디아에서 온 이름.
(1)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는 이 남쪽 바벨론을 말한다(창11:31, 느9:7).
(2) 노아의 증손 니므롯이 니느웨 르호보딜 레센 갈라의 4성을 건설(창10:11).
(3) 그후 이곳에서 세계를 정복한 4대 강국이 일어 났다.
갈대아(주전 2300-1370). 앗수르(1370-606). 바벨론(주전606-538). 메대파사.
(4) 갈대아 인이 욥의 재산을 약탈해 간 일이 있다(욥1:17).
(5) 여호와가 갈대아인의 노략군을 보내어 여호야김과 유다를 쳐서 멸하셨고 (왕하24:2). 유다왕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빼고 구리줄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데려감(왕하25:6-15).
창세기의 11장에는 셈과 아르박삭의 후손들이 잠깐 나열된다. 다시 대홍수 이후의 족장들의 나이가 후계자가 출생할 때까지로 주어진다. 이 출생 이후에 그가 산 연도도 또한 주어진다. 이들 족장들에게 주어진 전체 나이는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셈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는 602년으로 주어져 있지만(이것 자체도 므두셀라의 969년에 비하면 훨씬 감소한 것이다), 여덟 세대 후인 데라(Terah)1)는 겨우 205년만 살았고, 그의 직계 후손은 200년도 되지 않는 수명만을 살았다.
나이들을 합쳐보면, 데라의 아들인 아브람(Abram)은 홍수보다 292년 후, 즉, 대략, 기원전 2100년에 태어났다. 이것을 성서 외의 어떠한 자료와도 점검할 수 있는 방도는 없지만, 만일 그의 출생이 역사적으로 약간 나중에 놓여진다면, 아마도 기원전 2000년 직후 정도가 된다면, 성서의 나중 사건들이 일어난 때가 더 잘 들어맞게 된다.
지금에 와서, 아브람과 그의 직계 후손들이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을 나타내는지, 혹은 니므롯의 경우에서처럼, 여러 사람을 끼워 맞춘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성서의 이야기를 액면가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개별적인 한 사람이며, 잘 서술된 사람이기도 하다. 창세기는 그가 실존했건 아니건, 역사적인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아브람(그의 이름은 나중에, 지금은 더 잘 알려진 이름인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된다2))은 후세의 유태인들이 육체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신들의 혈통을 거슬러 가는, 최초의 족장이다. 그보다 먼저 있었던 사람들에 비해 아브라함이 중요한 이유는,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는 처음으로 가나안으로 간 사람이고,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전설에 따르면, 그는 우상 숭배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충실한 일신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서는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제작자였고 아브람이 화가 나서 그것들을 깨버렸다고 설명한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성서의 처음 11 장의 중심이었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역에서 시작한다.
창세기 11:27. . . .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Nahor)과 하란(Haran)을 낳았고 하란은 롯(Lot)을 낳았다.창세기 11:28. 하란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idees)에서 자기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따라서 우르(Ur)가 아브람 가족의 고향이며 아브람 자신의 출생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르는 최소한 기원전 3500년 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 세워진 수메르 도시였다. 그것은 바빌론에서 남동쪽으로 약 140 마일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의 오른쪽 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의 페르시아 만 해안이 바로 부근이었다. 그곳은 수메르 시대에 중요한 도시였으며, 달의 신, 씬(Sin)3) 숭배의 중심지, 장엄한 지구라트의 소재지였고, 해안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아마도 중요한 원양 교역으로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우르는 “1 왕조(first dynasty)” 치하에서 상당한 권력의 기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 세기 반 만에 끝이 나는데, 그 때 우르는 루갈자게씨, 나중에는 아가드의 사르곤의 개선군에게 함락 당했다.
우르의 거주자들과 역사가들은 이 정복자들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것이다. 만일 니므롯이,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루갈자게씨와 사르곤의 흐릿한 기억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유태인의 전설에서 니므롯이 아브람이 출생할 때의 바빌로니아의 왕을 나타내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아브람을 죽이려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일이다.
아카드 제국의 몰락 이후, 우르는 “3 왕조(third dynasty)” 치하에서 또 한번의 위대하고 상업적으로 윤택한 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수메르 정권의 이 마지막 시기는 기원전 2050년과 기원전 1950년 사이에 해당하며, 그 시기 동안이 아브람이 태어난 시기이다.
우르는 구약의 시대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존재하였으며 기원전 324년이나 되는 최근에도 문서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창세기가 쓰여지던 시기에, 우르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쇠퇴해버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게 된 마을에 불과했다. 아브람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덕분에 독자들에게 엄청난 흥미를 끌게 된 마을을 언급하게 된 창세기의 저자들은 어느 정도 그곳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카스디인들의 우르(Ur kasdim)”, 즉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 혹은 그보다 낫게는, 현대어역판에서처럼 “갈대아인의 우르(Ur of the Chaldeans)”라고 불렀다.4)
갈대아인들는 기원전 약 1150년 무렵, 아람인들의 뒤를 바로 이어(54쪽 참조), 남쪽으로부터 바빌로니아로 압박해 들어온 아라비아인 부족이었다. 따라서 우르가 실제로 갈대아 영토의 일부가 된 것은,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 거의 천 년이나 지나서였다. 갈대아인들이 도시 바빌론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9세기(900년-800년)였고, 잠시나마 패권을 다투었던 것은 기원전 700년 무렵이었다. 당시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앗시리아왕 샬만에쎄르 5세가 죽자, 722년 갈대아 족장이었던 메로다흐 발라단(Merodach-Baladan)이 바빌론에 입성해 바빌로니아 왕임을 선포했다(열왕기하 20:12-19 참조). 여기에 나오는 ‘갈대아의 우르’는 이 때를 반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의 시기 동안, 갈대아인들은 바빌로니아 인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족이었으며, 따라서 “갈대아의 우르”는, 그 시대착오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마을을 알게 해 주는 가장 경제적인 말이었다.
1) ‘테락흐’라는 발음이 맞으며,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발리크 강 분지에 있는 <틸투라히>와 이름이 일치한다.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아브라함의 증조부이자 테락흐의 할아버지인 ‘세룩’(공동번역 성서에는 ‘스룩’으로 나와 있다)의 이름도 하란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도시의 이름과 같다.
2)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3) 씬(Sin)은 아카드어로, 수메르 어로는 쑤엔(Suen), 난나(Nanna)라 했으며, 때로는 난나쑤엔이라고 하기도 했다.
4) ‘갈대아’는 공동번역 성서에 나온 명칭이며, 실제 발음은 ‘칼데’일 것이다. 또한 이것이 히브리어로 ‘카스딤’ 즉 ‘카스디 인들’이 된 것은 히브리어에서 <르(l)> 발음이 <드(d)> 앞에서 <스(s)>로 변한 경우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이민수 옮김>
갈대아 우르(우르 카스딤)
하란 지역에서 우르를 찾으려는 시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바로 ‘갈대아 우르’라는 구절이다. 갈대아 민족은 서기전 900년경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하며 서기전 612년 이후 앗시리아를 점령하고 새로운 제국 바빌로니아를 건설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는 바빌로니아의 한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창세기의 여러 구절에서는 분명히 족장들의 고향이 밧단 아람, 즉 하란 지역으로 나타나는데 왜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이 생겨났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본격적으로 창세기를 편집할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세력은 바빌로니아, 즉 갈대아 민족이었으며, 이 지역에는 우르로 불리는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브라함 고향의 두 후보지인 이라크 남부의 우르와 터키 동부의 하란은 모두가 달신을 섬겼던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 때문에 당시의 기록자들이 하란과 우르를 혼동할리는 없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록하며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왕이면 아브라함을 당시 세계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로니아의 우르와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로마 교황은 서기 2000년 대희년 성지순례의 여정에 당연히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우르행이 취소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속사정은 아직도 우르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잘 모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국민일보 2001.02.10 김 성 교수(협성대·성서고고학)>
1929년 3월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의도는 그가 창세기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원래 그의 고향인 우르에서는 엄연히 대도시의 귀족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나아가 아브라함은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의 법과 도덕,천지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T.E.Lawrence)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 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우르는 1922년 울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즉 역청의 언덕’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울리와 우르의 발굴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 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 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증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앗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 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 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 넣기도 했다.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 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 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 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 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왕들의 무덤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 세계 신문의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
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 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 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 진흙 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발견자라는 공로로 울리는 1935년 영국의 조지 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지만, 그의 해석은 아브라함의 고향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우르는 오늘날 터키의 하란 북쪽에 위치한 우르파(Urfa)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민일보 2001.02.09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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