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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4)

Joyfule 2014. 9. 20. 08:50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4)

 

먹고 사는 일을 걱정 말라.

 

토종닭을 키우는 양계장에 가 본 일이 있다. 넓은 비닐하우스에다 수백 마리는 족히 될 만한 닭들이 부대끼면서 살고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닭똥냄새와 더불어 수많은 닭들의 꼬꼬거리는 합창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 닭들은 주인이 문을 열고 나타나면 무섭게 주인에게로 다가선다. 주인의 손에 사료포대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먹이를 줄 걸로 알고 몰려든다. 주인은 내게 요즈음은 닭 시세가 형편없어 사료 값도 안 나온다고 푸념이었지만, 닭들이 그 사실을 알까? 닭들은 주인이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식사가 끊이지 않고 나올지 어떨지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

만약 눈치 빠른 닭이 있어 주인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알아채고 다른 닭들에게 알렸다면 걱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상상에 불과하다. 닭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주인이 오늘도 어김없이 사료포대를 들고 와서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음이 당연하다. 왜냐면 닭의 소유자인 주인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닭 시세가 예전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귀중한 재산인 닭들을 내버려두고 도망갈 리가 없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지칭할 때 부르는 주(主)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אדני)이며 헬라어로 ‘퀴리오스’(κυριο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권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행사해 경배를 받아야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인간적인 주인을 가리킬 때도 사용했다.

즉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주인인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 분의 권세를 인정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을 만드실 때 그들이 충분히 먹고 살고 있는 환경을 마련해 놓으셨다.

 

주인이 그들의 소유를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한다면 주인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동식물이나 사람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면 이 역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피조물이 넉넉하고 풍성하게 먹고 살고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먹고 사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히 마련해 놓으셨고 넉넉하게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장의 삶으로 돌아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불황의 골이 깊어가면서 치열해지는 경쟁으로 불투명한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다. 고유가로 인해 나날이 물가는 치솟고 공공요금이나 교통비, 자녀 교육비는 걷잡을 수 없이 비싸지는 데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나마 적자 보지 않고 버틸 수만 있어도 행복하다.

각종 공과금과 더불어 밀린 신용카드 고지서이다. 어디 그 뿐인가? 자동차 할부, 주택마련 대출, 마이너스 통장, 카드론 등 빚더미에 올라앉아 숨쉬기도 힘들다. 그러데 회사는 점점 내리막길이라 언제 해고당할지도 모른다. 미리 회사를 나가 퇴직금을 털어 프랜차이즈 치킨집이나 열심히 공부해 자격증을 취득해서 부동산 사무실을 연 직장동료들도 파리 날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마저도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끌어 쓴 게 화근이 되어 잘못하면 길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어떻게 편히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냐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버틴 것도 벅찬 일인데 앞으로 살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새벽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기도제목을 다시 한 번 더욱 간절히 반복하고 있다. 이참에 피곤하지만 수요예배나 금요일 철야예배에도 참석해서 더욱 뜨겁게 기도하고, 아내에게도 매일 저녁마다 시행하는 예배에 참석해서 기도에 더욱 힘쓰라고 할 참이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총제적인 기도작전을 벌여 하나님의 도장을 찍어 이자가 천정부지로 늘어나는 빚을 갚고 고통스런 재정상황에서 벗어나 성공적인 사업체로 바꾸어 부유한 가정을 이루는 데 올 인을 할 참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거의 모든 강단에서 목청을 돋우는 설교자들의 방법으로, 교회를 오래 다닌 크리스천이라면 오랜 설교를 통해 곤경에 빠진 사업체나 가정의 재정쇄신 방안이 낯설지 않겠고 그 효력에 대해서도 의문을 달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고 축복의 통로를 열어주는 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힘쓰고 애쓴 기도의 노동을 통한 수확의 결과가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쉼 없는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기도시간을 늘리고 강도를 높이면 더 많은 축복이 내려오고 그렇지 않으면 힘들게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아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과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신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넉넉하게 먹고 살만한 환경을 공급해주신다고 했지, 우리의 기도나 신앙행위의 정도에 따라 기도응답에 대한 합격의 여부를 통보하고 등급을 정해서 시행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을 숭배하는 무속인들이 값비싼 제사를 차리거나 치성을 드리는 기도의 행위에 따라 복이 온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마 6:26~30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는 삶의 걱정과 염려로 불안에 떠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어 염려하는 행위는 부질없다는 것 일게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해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나 들과 산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꽃들조차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새와 꽃들이 새벽예배에 참석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철야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라고 여기는 이는 없다. 그렇기에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염려해서 불안에 떠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는 질책을 받을 마땅한 행동으로 귀결이 된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모르기에,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 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밤낮없이 먹고 사는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불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환율등급이나 원유가격의 등락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래서 매일 아침 저녁뉴스에 눈을 떼지 못하며 아나운서들이 뱉어내는 부정적인 소식에 가슴을 졸이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아는 자녀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염려를 이미 제거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 시간 후 교회 문을 박차고 세상에 나가면 다시 이러한 고민을 뒤집어쓰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이해를 했어도 진정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세상의 불안요소가 눈에 보이자 슬그머니 두렴과 걱정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다.

엊그제 신문에 필리핀에서 11살의 나이어린 소녀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뉴스가 맘을 아프게 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1,500원의 학비가 없어 며칠 학교를 결석하게 되자 빈곤한 생활을 비관해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으나 일이 없어 수개월간 일을 하지 못했으며 어머니는 국수공장에서 일했으나 하루 1,000원도 못 벌었다고 한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어머니와 자신이 돈을 받고 이웃의 빨래를 해왔으나 학교 갈 교통비도 마련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아이에게도 삶의 희망을 잃게 하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극도로 고통스러운 가난한 삶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스산해온다.

 

 이러한 모습이 먼 이웃나라인 필리핀에서만 있는 일일까? 그렇게 오래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필자가 어렸던 시절인 60년대에도 이러한 일이 다반사였다. 겨우내 저장한 곡식을 다 먹고 떨어지는 이른 삼월이면 먹을 것이 없어 이제 겨우 푸른 잎을 피운 나물과 보리를 섞어 죽을 끓여 먹었기에 영양이 부족해 어른들은 얼굴이 퉁퉁 붓고 어린아이들은 배배 말라 다리가 비틀어지기 일쑤였다.

필자의 동생이 영양실조로 인해 걸음을 잘 걷지 못한 것을 웃으며 놀려대던 철없던 어린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나 구한말시대는 어떻겠는가? 굳이 아프리카나 중동의 나라들인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우리네 조상들의 삶은 이 나라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호사스럽게 사는 것은 차치하고 굶어 죽지 않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고민거리는 무엇인가? 생존의 문제인가? 부유의 문제인가? 분명한 것은 생존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를 조금 못 미치는 경제대국이고 아무런 학력이나 경력이 필요 없는 막노동이나 식당일을 한다 해도 한 달에 100만원은 넘게 벌 수 있는 노동환경에 있다. 부지런히 일만 한다면 먹고 사는 일은 해결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의 나라들의 처지는 일하고 싶어도 변변한 일거리가 없기가 일쑤이다. 아프리카의 평균 임금이 월 30만원을 넘는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일거리는 변변찮은데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탓에 임금이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존의 문제라기보다는 편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환경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풍족하게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마련해 주셨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굶어 죽지 않고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들풀조차도 생존하고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셨다.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유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권력욕으로 인한 내전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중동의 이라크는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지금도 막대한 석유매장량으로 유명하지만, 종족간의 싸움과 외세의 전쟁으로 먹고 살기 힘든 나라로 변해 버렸다. 하나님이 풍부한 환경을 마련해 놓으셨지만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저지른 결과는 인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부지런하게 노동을 하기만 하면 세계 어디서든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축복해 놓으셨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탐욕과 미련함으로 저지른 죄악으로 스스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망쳐 놓은 대가를 받을 뿐이다.

우리의 염려는 나쁜 환경이 아니라 잘못된 성품 때문이다.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방탕함이란 탐욕스럽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방탕함의 결과는 천국 문 앞에서 거절 받는 무서운 결과를 빚는다. 우리가 먹고 살기 어렵다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자. 우리가 얻는 노동에 대한 소득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우리가 먹는 음식은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온갖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어와 웬만한 맛에도 쉽게 싫증을 내며 까다로워진 입맛을 만족시켜주어야 하는 식단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입는 의복은 추위와 부끄러움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첨단의 패션에 걸 맞는 고급브랜드여야만 만족하는 것들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30평 이상의 맨션아파트 정도가 되어야 겨우 만족한다. 열 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아야 한다면, 이렇게 가난한 삶에 찌들어 살기보다 차라리 자살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엊그제 필리핀에서 자살한 열한 살짜리 소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생존의 문제로 걱정하고 고민하기보다 방탕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충분히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마련해 주셨으나, 눈이 높고 목이 뻣뻣해져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지 못하며 자족하는 습관을 배우려 하지 않고 절제하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결과라면, 눈앞에 놓인 환경을 바라보기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진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탕함을 없애려면 절제와 자족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방탕함은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소득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피조물이요 종의 신분이다. 피조물은 만드신 이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하며 종이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이유도 우리가 자녀의 자격을 갖추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성품으로 아무런 대가없이 인정해주시는 은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할 것임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을 자기마음대로 방탕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하다면 절제하며 사용하여야겠고, 남겨두었다가 지혜롭게 저축하고 투자하였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곳에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주어진 소득이나 시간은 늘 부족하다. 부족한 이유는 절대 부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지 못하는 버릇과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성품에서 기인하다. 이 성품을 갖추지 못한다면 엄청난 재물이 있더라도 펑펑 써버려 얼마 있지 않으면 바닥이 들어나 또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의 세상풍조나 주변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생각한다면 늘 초라해지고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기보다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비싼 것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세상의 부를 소유한 아버지라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켜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열심히 일하고 지혜롭게 살아간다면 풍성하고 넉넉한 재물을 공급하고 계시는 부자 아버지이다. 이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불신앙이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날들을 돌이켜보고, 주변의 다른 크리스천의 삶을 주의 깊게 지켜보라.

버티기 힘든 시절이 있었을지라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시간들은 없었을 것이다. 늘 가난에 찌들어 살며 매사에 불평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삶은 나쁜 환경에 있기보다 자신의 잘못된 성격과 절제하지 못하는 성품을 고치지 못한 이유가 먼저이다. 넉넉하고 풍부하지 못할지라도, 가진 것에 만족하며 절제하는 성품을 기른다면 평안한 천국의 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