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2)
탐욕을 없애라.
탐욕이란 세상의 재물을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말한다. 지나친 욕심인 탐욕의 해악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이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타고나면서 욕심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둘러보면 눈에 띄는 세상의 재물을 보면 볼수록 탐이 나서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이를 억지로 없애려고 애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를 속편하게 인정하고 욕심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편을 택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주요한 목표이며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만이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간다. 이를 성취하는 한 방법으로, 기복신앙이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탐욕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라고 선전하는 기복신앙의 폐해에서 벗어나려면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을 없애야만 가능한 일이다.
탐욕은 스스로 덩치를 키우며 건전하고 정상적인 세포들을 잡아먹고 끝내 숙주인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자멸하는 암세포처럼 인생을 위험에 빠뜨리며 평안한 삶을 가로막는 주된 원인으로, 이를 없애려면 날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성품을 기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의 관대한 평가와는 아랑곳없이, 성경의 탐욕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며 엄격하게 금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크리스천이라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에 대한 제사조차도 뜻을 달리하는 부모형제와 절교를 각오하며 폐지하였을 정도인데, 하물며 다른 종교의 신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와 뿌리를 같이하는 가톨릭에서는 선교초기에 순교자가 너무 많이 나와 눈물을 머금고 이를 인정해 줄 정도였으나, 개신교는 조상신일지라도 귀신으로 간주하여 전통문화로 인정되는 의례적인 행사조차도 금할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타 종교의 신에게 숭배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성경에서 엄격하게 경고하는 탐욕의 해악에 대한 가르침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탐욕은 기복신앙의 가면을 쓰고 성공이나 축복의 이름으로 교회의 깊은 곳에 은밀하게 들어와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우상숭배에 대한 형식적인 행위를 금지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태도이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은, 돌이나 쇠로 만든 신상(神像)에 절하거나 섬기는 행위를 말하고 있지만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말도 못하며 보는 눈과 들을 귀가 없는 돌조각이나 쇠붙이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하여 일컫는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행하고 소유하려는 행위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탐욕으로 망한 사람들
성경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지만 그 반대의 인물들도 적지 않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년의 광야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믿음으로만 무너뜨린 여리고성의 승리의 기쁨과 환호성이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던 아이성 전투의 패배의 원인은 휘황찬란한 금덩이와 값비싼 의복에 순간 눈이 멀게 한 아간의 탐욕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아무런 죄도 없는 가족들과 함께 땅속에 생매장되는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준다면 천만금을 준다는 제안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고 다니던 나귀에게 조차 힐난을 받았던 발람도 마음을 고쳐먹어 다급한 화는 면했지만, 그 탐욕의 대가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며,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던 초대교회 시절에 하나님의 능력에 감동을 받아 전 재산을 드리고도 아까운 마음에 그만 탐욕에 눈이 멀어 성령을 속이고 목숨을 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안타깝고 측은하기조차 하다.
행 8:20~23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생각해 볼 사람이 마술사 시몬이다. 그 당시의 마술사는 현대의 마술사처럼 도구와 손재주를 이용하여 눈을 속이는 방식이 아니라 주문이나 부적, 마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속였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신이 더 위대한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마술을 종종 이용했다.
위대한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능력 없는 신으로 간주되어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술적인 능력은 고대종교에 필수적인 조건이었으며, 놀라운 능력을 지닌 마술사는 지금의 스포츠 스타나 인기 연예인처럼 존경을 받아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렸다. 그래서 마술사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경쟁적으로 놀라운 능력의 배후에 있는 원천을 알아내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대에 유명한 마술사인 시몬은 바로 이러한 명예와 존경을 얻고 사마리아성의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놀라운 기적을 보여 불치의 병자가 나음을 입고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자, 시몬은 이러한 능력을 놀라워하면서 그 힘의 원천을 얻고 싶어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누렸던 호사의 근원이 마술의 능력에 있었으므로,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새로운 도전자(?)에게 지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은밀히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평생 먹고 살만한 엄청난 돈을 줄 테니까 자신에게 이러한 능력의 비결을 팔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을 보자마자 시몬이 악한 영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채고, 탐욕의 근원인 악을 없애지 않는다면 비참하게 죽고 영혼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거침없이 선포한다.
그러자 시몬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위대한 능력에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이러한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에 이른다. 시몬도 마술을 통해 귀신이나 악한 영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귀신이 도저히 필적할 수 없는 베드로와 요한이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오그라들었으리라.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들이 현대의 교회에도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와 명예, 성공 등을 거머쥐고 자신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행태이다. 이러한 탐욕의 배후는 베드로와 요한이 단박에 알아챘던 악한 영이다. 그래서 성경은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행위가 악한 영을 섬기는 우상숭배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대교회에 기복신앙을 앞세운 거짓축복은 초대교회 시절에 사마리아성의 마술사 시몬이 가지고 있었던 탐욕과 같은 근원이다. 그렇다면 시몬에게 내려졌던 저주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내려질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기복신앙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알고 행했든지 알지 못한 채 삯꾼 목자에게 속아 행했든지 간에, 탐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망하고 죽어간 위의 성경 인물이 걸어간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탐욕을 없애려면
탐욕을 없애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탐욕의 잘못과 위험을 알고 있겠지만, 생존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에 어쩌지 못하고 몸에 지닌 채 살아간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너무 지나쳐서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성냥을 쌓아둔 화약고처럼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일처럼 위험하기 그지없다.
어떤 수술이든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엄청난 고통이 존재하지만, 이를 무릅쓰고 해야 하는 것은 병을 키우는 것이 확실한데도 수술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의 근원을 없애지 않고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 비록 뼈를 깎는 고통이 있을 지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탐욕을 없애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기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며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생명을 유지하며 종족을 번창하게 만든 요인이다. 그렇기에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소유하며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평안하고 넉넉한 삶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이기적이 되고 탐욕스러워진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를 따르는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자기중심의 뜻에 반한다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자기욕심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은 철저한 자기부정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결심과 더불어 굳은 의지로 날마다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딛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점차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조목조목 밝혀놓았으므로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된다는 간단한 해답이 생각나겠지만, 성경내용을 해박하게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성경에 전개된 사건이나 내용의 배후에 숨겨진 은밀하고 세미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원칙을 날마다 묵상하며 깊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 깨달아지게 된다. 또한 이 같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절대로 필요하므로 기도 때마다 끊임없이 요청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분명하게 매듭지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통찰력을 가지고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오랫동안 설교 때마다 들어 성경 내용을 환하게 꿰차고 있다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녀 성경에 해박할지라도 하나님을 뜻대로 살지 못하는 교인이 많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물론 깨달아 아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과도 차이가 많다.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잇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는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셈이다. 이는 마음속에 들어찬 믿음이 행위를 통해 들어나야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는 비교적 쉬운 일도 있겠지만 때로는 많은 손해를 보며 뼈를 깎는 고통을 요구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견고하게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각오가 남달라야 자신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결연히 살아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탐욕을 없애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은 말한다. 하루 종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소리뿐이다. 물론 이 말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업이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위해 속삭이는 광고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광고는 파괴적이고 위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광고를 바라보며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말을 따르며 그들의 논리에 생각을 지배당하게 된다. 이렇게 세뇌된 두뇌는 그들의 상품을 사주는 소비 노예가 되어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대로 그들의 수중에 넣게 된다. 이렇게 하는 행동이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채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교묘한 전략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세상의 상품을 사며 문화에 빠져 보내는 시간만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시간들이 하나님을 찾아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깊은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들이다. 이러한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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