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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5)|

Joyfule 2014. 9. 21. 08:15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5)|

 

삯꾼 목자를 피하라.

 

거짓축복의 위험과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짓축복을 퍼뜨리는 자들을 피하는 것이다. 누구나 손쉽게 구별할 수 있다면 거짓축복에 속아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겠지만 이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이태원이나 동대문에 가서 짝퉁을 살펴보라. 모든 짝퉁들은 하나같이 명품의 브랜드와 모양, 색깔을 흉내 내고 있다.

명품같이 않은 짝퉁을 누가 사겠는가? 최고로 비싸게 팔리는 짝퉁은 전문가가 식별해도 쉽지 않도록 정밀하고 교묘하게 만들었다. 짝퉁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진짜보다 더욱 명품처럼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에는 짝퉁가방이 허술하게 만들어져서 누가 보더라도 가짜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겉뿐만 아니라 안감의 재질과 장식에 이르기까지 명품을 똑같이 베낀다. 그래서 재질과 장식, 재봉기술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식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명품회사들은 자신의 상품에 은밀하게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집어넣어 짝퉁인지를 확인한다고 한다. 마치 위조지폐를 방지하고자 각국의 지폐에 집어넣은 홀로그램이나 정교한 암호부호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짝퉁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진짜는 아니다.

 

이처럼 거짓축복이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말씀을 줄줄이 나열하며 목청을 돋운다고 하더라도 참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쉽게 속는 이유는, 목사나 부흥사를 비롯한 목회자의 신분으로 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단에서 인정한 신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전도사로서 정해진 기간 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목사고시를 거쳐 안수를 받아 목사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처럼 힘들고 어렵게 공부해서 목사자격을 취득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신분이 바로 목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큰 교단에서 문교부에서 인정을 받아 신학대학교를 세우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을 초빙해서 가르쳐 신학생을 배출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를 비롯해 여러 교단에는 갈라져 나온 군소교단이 수없이 많다. 교회건물에 신학교 간판을 붙인 교단 신학교를 차를 타고 다니면 무수히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학문을 검증받은 교수도, 탄탄한 커리큘럼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곳에서도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안수를 받으면 목사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작은 교단의 신학교 출신 목회자라고 해서 목사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신학을 연구하고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기에는 부족한 여건이나 환경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교단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배출한 목사들도 훌륭한 목회를 하시는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한 목회자도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이들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큰 교회에서 초빙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목사라고 하여도, 모두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불타는 소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열심히 배워 졸업하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양떼들을 먹이고 입히며 가르쳤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소명도 희미해지고 열정도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다음부터는 그동안 해온 관성과 관행으로 일하게 되어 열정의 자리에 매너리즘이 자리 잡고,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목회가 소득을 얻는 직업이 되는 삯꾼목자로 변해간다. 차가운 골방에서의 뜨거운 기도와 서재에서 고된 노동의 성경연구 대신에, 기존 해왔던 설교를 재탕하고 각종 프로그램이나 외부 강사로 이를 메우려 한다. 그렇기에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는 교회와 매서워진 교인들의 비판을 잠재우는 방안으로 기복신앙의 거짓축복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빼어들게 된 것이다. 우리네 정서에 이만큼 효과(?)가 확실한 아드레나린 주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하나님의 뜻보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를 앞세우는 삯꾼목자에게서 신앙을 배운다면 오래지않아 허망하고 씁쓸한 열매만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삯꾼목자들을 피하려면 
   요 10:12~13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목자는 양떼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충족시키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이들은 양들의 유익함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좇아 행한다. 그래서 양떼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현대의 교회에서 삯꾼인지 진정한 목자인지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겉모습이나 학력, 경력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삯꾼 목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경건하고 진실한 목자로 위장하고 흉내를 내려고 애쓰기에 더욱 그 실체가 드려나지 않는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만으로 분별할 수가 있다.

말씀의 분별력을 가져라
삯꾼 목자와 참 목자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가르치면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겠지만,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목회를 수단으로 삼았다면 소득을 얻으려고 직업으로 목회를 택한 목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들이 예배시나 교육시간에 가르치는 설교나 교육내용이 성경적인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판단행위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겉으로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말하기 때문이다. 다만 인용한 구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토대위에서 정립하였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설교나 교육의 속내나 동기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는 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 또한 속내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두 번의 설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르치기 때문에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데 분별력을 갖추는 능력에 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정치권력을 둘러싼 파벌싸움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당파싸움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모함을 당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파벌은 악전고투 끝에 다시 정권을 잡으면 피의 복수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파벌에 속하였는가가 개인의 출세는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과 재앙을 가름하곤 했다.

이러한 성향은 후세에 들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파벌을 조직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거나 상대파벌을 상대로 칼끝을 겨누는 일이 모든 사회조직에서 암암리에 행해졌다. 교회에도 이러한 일이 바로 이단 시비이다. 이단은 초대교회부터 존재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시비가 유독 심하다. 피해의식에 민감한 민족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교단이나 세간에 인기를 입은 목회자의 설교가 유명해지면 너도나도 여기에 동참하여 기존의 교단이나 기득권층의 목회자들은 이를 못 마땅히 여기거나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질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상하고 모함하는 수단으로 이단으로 몰고 가는 경우이다.

 

이러한 이단시비는 오래지 않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를 통해 빈번하게 나타나곤 했다. 이단 시비의 판단은 설교내용이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단으로 몰리는 측들도 성경에 없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부분에서 입장차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 차이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공격하고 폄훼하여 시비가 붙는 것이어서, 이단으로 몰리는 당사자나 교단들은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며 이를 몰아붙이는 상대방을 되받아쳐 이전투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 같은 이단시비는 시간이 지나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그 정체가 정립되게 된다. 아무리 이단이라고 공격했어도 그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정통적이며 복음적인 교단이나 목회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집단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드러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밝힌 성경해석이나 설교내용이 성경에 해박한 전문가들의 검증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단인지 알지 못하고 휩쓸려 들어간 사람들은 수많은 시련과 고통스런 회환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들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설교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기에 이 같은 인생의 시련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기복신앙에 의한 거짓된 축복관은 비성경적이라 이단으로 보기에 충분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빗나가는 성경해석을 하는 이단들에 대해서는 뾰쪽한 눈으로 서릿발 같은 공격을 서슴지 않던 이들이 기복신앙의 비판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자신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이 비성경적인지를 잘 알고 있지만, 손쉬운 목회방법에 대한 이의 유익이 너무도 크고 그동안 관행으로 일삼았던 행위인지라 묻어두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해서 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교인들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축복도 없을뿐더러 세상 풍조를 좇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평생을 헛된 이론과 사술을 좇아 재물과 시간을 허비하였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으랴? 비단 비성경적인 내용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교묘하게 가르치는 것이 기복신앙뿐만이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도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외치며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지만 이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비성경적인 성경해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 당사자는 교인들이다. 그렇기에 성경말씀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치겠거니 하는 신뢰도 필요하지만,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배우고 통찰력을 갖추어야 하는 책임의 우선순위는 본인의 몫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록하고, 묵상하며, 다른 번역본, 본문에 가까운 주석, 성경사전을 참고서로 삼아 말씀 뒤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건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러한 습관을 들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건강을 위해 적당한 운동을 평생 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 해박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분별력을 갖추는 습관은 믿음을 탄탄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삯꾼목자의 음흉한 덫을 피하기위해서도 꼭 맞아야 할 예방주사이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판단하라.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 교회에 다녔다가 낙담해서 현재는 그만둔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는 교인일지라도 과거에 실망해서 여러 번 교회를 옮긴 이유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들이 실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목회자에 대한 것이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섬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품이나 행위가 기대에 어긋나고 속마음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섬기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그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도 사람이니까 실수도 할 수 있고,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므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도 위험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의 성품이나 행동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례는 주변에 일어나는 흔한 일에 불과하다. 삯꾼목자라면 일찍 자리를 들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지만, 목회자의 속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행동한 것이라면 조급한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리에 맞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    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구약시대에도 권력자의 곁에 붙어 왕에게 선한 일을 말하면서 아첨을 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적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멸시한 하나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렘 28장 이하) 이들이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지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동안에 진짜 예언자는 왕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축복한 거짓선지자의 말을 믿고 전쟁에 대패해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위의 구절은 구약시대뿐 아니라 현시대에도 거짓목자들이 적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이들의 사탕발린 거짓축복에 넘어간 자들에 넘어갔다면 고통스런 현재의 삶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목자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 신분의 외모나 외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임을 주저 없이 말씀하셨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참 목자와 삯꾼 목자를 가르는 기준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령의 함께 하심에서 나타나는 성품과 이를 드러내는 행동일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성령의 열매를 완벽하게 가진 사람은 없겠지만, 목자의 길을 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이 있었다면 이 같은 성품의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성품을 드러내기보다는 증오와 분노, 시기, 질투, 파벌, 정죄, 방탕함, 교만, 위선, 조급함, 탐욕, 음란 등을 더 나타낸다면 이는 분명 삯꾼 목자임일 것이다.

 

특히 삯꾼 목자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탐욕이다. 삯꾼목자는 소득을 얻기 위한 직업으로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탐욕을 드러내며, 이를 조언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분노하며 정죄하는 등의 독선과 오만함을 보여주곤 한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이러한 행위로 감추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도 한 가족의 가장이며 재정이 부족한 교회를 운영하다보면 돈에 대해 자주 언급하여 본의 아니게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목회자의 생계와 교회의 운영자금에 대한 것이라면 이러한 목회자의 태도에 대해 불평하며 비판하기보다 교인들이 마땅히 짐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며 교회형편을 무시하고 교회건물을 넓히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치중하거나 사례비에 과도한 집착만을 보인다면 분명 삯꾼목자일 것이다. 이러한 목자의 모습에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서 구별해야 이들의 악한 발톱에서 피할 수 있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