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6)
삶의 고난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욥기를 읽으면서 동방의 의인이란 칭하던 이 사람의 생의 고난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의 불행한 삶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한다. 어떻게 하다 이런 불행과 재앙이 닥치게 되었는가 하며 의아해하며, 그 많던 재산이 사라지고 10명의 자녀가 죽으며 아내는 도망치고 자신의 몸에 악창까지 생겨 고통과 슬픔으로, 죽음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배려임을 간절히 원하는 그의 측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행한 그의 삶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에게 닥친 혹독한 재앙이 독자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책장을 덮으며 안심한다. 나에게는 이러한 불행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사탄이 범접할 수가 없고 불의의 재앙을 막아주시며 사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러한 생각이 온당할까?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생각만 해도 두려워하는 불행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으며 평온하고 형통한 삶만을 누리며 살게 될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행한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고난이 닥치면 그동안 신앙생활이나 기도가 부족했음을 깨닫고 새벽기도를 다시 시작하며 평소에는 소홀했던 수요예배에 참석하기도 한다.
신앙수준의 강도를 높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면 불행한 사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얻었을 것이고 숱한 설교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로서,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성실한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헌금을 교회에 아낌없이 드리고, 일 년 365일을 쉬지 않고 따뜻한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새벽예배에서 하나님의 눈도장을 찍으라는 판에 박힌 해결책을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에다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삯꾼목자는 등골이 오싹한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재앙과 불행한 사건이 집안에 닥치고 자녀들의 앞길을 막으려 불치의 병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 등이다. 물론 이 같은 근거는 구약의 레위기나 신명기 등에서 발췌하여 들이대고 있다. 이 같은 말을 듣고 담담해하며 마음이 평온한 자가 몇이나 될까? 불과 유황이 여기 저기 떨어지는 심판 날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노기를 띤 하나님의 모습이 퍼뜩 스쳐 지나가며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하나님 앞에서면 누구나 죄인이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세상일이 그리 녹녹치 않아서 단단한 결심이 허물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말이다.
삶의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인가?
대부분의 사망에 대한 의사의 최종진단은 심장마비이다. 즉 심장이 뛰지 않아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심장마비에 이르게 한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교통사고에 의한 과다출혈도 있을 것이고 당뇨 합병증이나 암질환의 막바지 진행으로 인해 더 이상 심장에 힘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이 늙으면 질병의 면역력이 약해져서 성인병을 포함한 질병에 취약하게 되고 적지 않은 시간을 병마와 싸우다 죽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게 되는 것은 진리인데, 이 진리를 실행하는 여러 방법으로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어떤 이는 평균수명보다 이전에 죽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들게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래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죽기도 하지만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질병이 걸리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결국 저주라는 얘기일 것이다. 파리가 거미줄에 걸리고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잡혀먹는 것이 재앙을 당하는 곤충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는 자연의 섭리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현상일 뿐이다.
크리스천이 맞닥뜨리는 생로병사의 고난과 불의의 재난 역시 자연의 법칙중의 하나이지만, 간절한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피할 길을 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험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도의 응답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난이 찾아온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시며 고난 중에도 기쁨을 얻게 해주시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예기치 못한 재난이나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고난들은 하나님의 저주라기보다, 우주를 운행하고 대자연을 섭리하며 인간의 생화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들어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잘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외가 없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자연의 법칙이 피해 갈 리가 없다.
또한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자초하는 고난도 있다.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간암이나 간경화 등을 비롯한 질병에 더 잘 걸리며 흡연자는 폐암에 걸릴 확률이 월등하게 높다. 신용카드를 마치 애완동물처럼 좋아하고 가까이 두는 사람은 과소비나 충동구매로 인한 소비자부채를 더 많이 갖게 되며 악성부채로 인해 재정이 낭패에 빠지며 과도한 이자부담으로 가정이 깨지기 쉽다. 로또복권을 비롯한 경마, 경정, 경륜 등을 비롯한 도박을 즐기거나 묻지마 투기에 주저 없이 뛰어드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확률이 높다.
음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불륜의 늪에 빠져 이혼을 당하여 행복한 가정을 잃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의 삶의 고난도 역시 하나님의 저주라기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초래한 고난이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도 위험이 즐비한 인생의 지뢰밭에 무턱대고 뛰어든다면 삶의 고난을 초래하게 된다. 지뢰는 그 사람의 신앙의 유무나 돈독함에 상관없이 뇌관을 건드리면 터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기뻐하는 제자로 고난을 달게 받는 자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행복했던 가정은 깨지고 단란하게 살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돈다.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빼앗기고 가진 것은 입고 있는 옷이 전부이다. 그나마 쫓겨 다니며 잡히면 모진 고문에 끔찍한 사형으로 생명을 잃는 일도 허다하니 말이다. 재산과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소중히 아끼는 목숨조차 주저 없이 버리는 이들의 삶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고난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고난은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다. 그들에게 이 고난은 행복하다고 받아들일 정도로 담담하게 여긴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복음을 위한 고난은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뗄 수 없기에 말이다. 초대교회의 열두제자를 비롯한 상당수의 교인들이 그러한 고난을 달게 받았으며, 나라마다, 민족마다 복음이 처음 들어간 곳에는 수도 없는 순교자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구한말에 가톨릭 순교자가 많이 났음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3가지 유형의 고난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저주라고 불리는 고난이 무엇인가? 순교를 위한 운명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에서 비롯된 고난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첫 번째 유형인 나이가 먹고 늙어감에 따라 오는, 생명의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질병의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저주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상당수의 재앙과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다. 그런데 거짓축복을 일삼고 기복신앙을 섬기는 적지 않은 삯꾼목자들은 대부분의 불행한 사건이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고 자신의 말에 복종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자유를 빼앗기며 악한 영이나 탐욕스런 자들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고난은 무엇인가?
신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말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저주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언급한 저주는 대부분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주의 내용은 축복의 반대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저주는 받게 되는 원인도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듣지 않아 발생하게 된다. 위의 말라기 말씀도 십일조와 명령한 헌물을 드리지 않아 저주가 임하게 된다며 현대의 강단에서 심심찮게 발췌하고 선포하여,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한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고난은 생각만 해고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율법의 저주가 유효한가? 한마디로 구약의 율법에서 말하는 저주의 징벌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렇지만 율법이 폐지되었다기보다 승화되고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저주의 징벌내용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달라진 것이다. 그 저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으로 인해 심판의 날까지 미루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약의 저주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이 땅에서 살아남을 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기에는 죄 없는 자를 찾을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가 없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벌하시기보다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심판의 날까지만 유효하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라도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면 범죄하고 불완전한 우리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초하거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악하고 어리석은 행동의 징벌이나 경고로써 내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고난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에 의하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그러므로 거짓축복을 선포하는 삯꾼목자가 아무리 강단에서 하나님의 고난을 말하더라도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즉시 발효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범죄하고 방탕한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살아가면서도 악한 행위로 인한 쓰디 쓴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며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 Joyful자료실 ━━ > 신상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8) (0) | 2014.09.24 |
---|---|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7) (0) | 2014.09.23 |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5)| (0) | 2014.09.21 |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4) (0) | 2014.09.20 |
거짓축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3) (0) | 201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