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승만, 대한민국의 기틀 확립, 팍스 코리아(Pax-Korea)의 꿈 키워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국사에 있어 최초의 공화제 민주국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
그는 공산주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큰 틀을 확립했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제정을 주도하고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1948년 7월 24일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해방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 기다렸다가 ‘대한민국정부수립식’ 행사를 치렀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 성장기틀 마련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은 1948년 이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 대통령이 추구했던 국가 전략은 부국강병과 영세자유(永世自由)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확립, 경제성장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을 통해 육성한 60만 대군은 경제가 안정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에게 부여된 병역의무는 한국청소년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켰고 급속하게 동질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대통령은 상공업 장려와 농지개혁 등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으며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적 기적을 이뤄냈다. 특히 이 대통령의 혁명적 교육개혁결과 해방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9년에는 10%로 급감됐으며 대학생의 수는 12배나 증가해 고도성장의 기초가 됐다. 휴전직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초등학교교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안건을 이 대통령이 강력하게 제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교육에 대한 이 대통령의 열정은 탁월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키면서 농민들의 의욕적 영농을 가능케 했으며 한국사회의 평등화를 위해 공헌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임기간동안 일민주의(一民主義), 양반제 종식, 여권신장 등 평화 주의적 사회개혁을 이뤄냈고 한글과 기독교 장려 등을 통해 문화적 개혁도 달성했다.
미국의 반대 설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지미(知美)주의자였다. 그는 해양국가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한국민이 의존해야만 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초기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물론 공산주의의 위협과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사전봉쇄와 신속한 대응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모두 방위조약의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특단의 조처는 방위조약의 신속한 체결을 재촉하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였다. 비록 이승만의 일방적인 행동은 모험적인 것이었으나, 휴전의 성립을 위해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경고’이외의 다른 제재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벼랑끝’ 외교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방위조약의 신속한 비준약속을 받아냈고, 미국도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 결과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이 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이 침략위협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반면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또 다른 ‘이중 봉쇄’의 효과를 발휘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했다.
한편 일본의 팽창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은 6.25 동란 중 유엔군 사령부가 군사상의 목적으로 선포한 소위 ‘맥아더라인’이 휴전과 함께 철폐될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공산세력이 침투방지와 일본어선의 불법침입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평화선’을 선포해 일본을 당황케 만들었다.
‘평화선 선포’에서 그는 “日人들이 맥아더 선을 넘어 우리 해안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해중자원(海中資源)을 불법으로 빼앗아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참을 수 없어 공평히 그어진 해상획정선을 설정해 우리의 어권(漁權)을 보호 한다”고 말해 대일 강경론을 표면화했다. 실제로 이 ‘평화선 선포’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추진하는데 있어 한국 측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만들어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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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정희, 부국강병 통치이념-선진 대한민국 토대 구축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이는 1955년 10월 8일 UN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동안 방문후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그는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1960년대 말 대한민국,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당시 사회는 혼란과 가난, 그 자체였다. 6.25이후 한국은 생산시설 파괴로 인해 외국의 원조로 생존할 정도의 어려운 시기였다. 1960년 말 경제 사정을 보면 일인당 GNP는 단돈 82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이외에도 1960년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 자료에 한국의 실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실제로 1964년 한국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 3천 6백만 달러, 필리핀은 4억 5천8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다섯 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특히 북한은 남한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초 이미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따라서 북한은 남한보다 10년 앞서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 주력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에 대한 박차를 가했다. 우선 박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의 한국 경제 상황은 4.19와 5.16으로 인해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혁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며 원조의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라인은 기존의 미국에서 일본으로 서서히 전이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이 이런 변화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고, 경제개발의 목표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다.
박 대통령은 농업부문을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농산물 가격안정‘등 일련의 중농정책을 펼쳐나갔다. 이와 함께 그는 자원의 빈곤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인력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경제개발의 관건이라고 결심하고 수출 진흥에 역점을 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했다.
공업화에 중점을 둔 박 대통령의 산업정책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1961년 7월 22일, ‘종합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66년까지를 기간으로, 이승만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했던 만성적인 가난을 타파하려 했다.
박 대통령은 ‘모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 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등 주요역점 사업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했고, 2차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제 2차 경제개발 결과 공업부문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67년의 8.9%의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성장의 발판을 닦은 뒤 69년에는 15.5%라는 성장률을 보여 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3차 계획(1972~76)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기간동안 한국은 연평균 10.2%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수출 액수도 거의 배수 이상으로 성장했다. 박정희는 제 3차 5개년 계획의 중점목표로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 공업의 건설’을 정하고, 이러한 노력으로 새마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주도형 개발전략과 공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과감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의 성과로 한국은 60년대 농업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고,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됐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부터 시급히 요구됐던 국방력 강화에도 큰 진전이 있었고, 국민생활도 현저히 윤택해졌다.
"한국,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 가진 국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HIID)가 공동 저술한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에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1년 연간 7%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경제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성장목표는 어처구니없이 높다고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과 65년에 경제 자유화 계획(시장자유화 정책)이 도입되고 1964년~67년 수입대체 지향형 경제를 수출 지향 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고도성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국경제의 역량은 개발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다도 그 시행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뮈르달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가진 양성국가'인 것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 “등소평,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 그대로 모방”
| | ▲ 윌리엄 H. 오버홀트
| 미 랜드(RAND) 연구소 오버홀트 박사 주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중근동 지역에는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많은 국가들이 탄생했다. 이들 신생 개도국들은 자유·비동맹·공산진영을 막론하고 경제개발을 국정의 최고 목표로 내걸었으나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뿐이다.
한국의 놀라운 고도성장을 높게 평가했던 이광요 전 싱가포르 수상은 지난 1979년 10월 방한 기간 중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는데 소모합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79년 10월 19일, 청와대 환영만찬)
아시아의 3대 지도자, 등소평-요시다-박정희
이광요 총리는 또 미국의 TIME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등소평과 일본의 요시다 총리,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그는 등소평은 중국을 나락에서 마지막으로 건져 올린 개혁-개방의 아버지로, 요시다 전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냉전 개막 직후 친미(親美)정책으로 돌아 일본 경제 부흥을 이룩해낸 공로로,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대통령을 아시아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한편, 미 랜드(RAND) 연구소의 윌리엄 H.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 박사는 ‘중국의 부상’(Rise of China,1989)이란 책에서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박정희,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국가적 개혁 이뤄”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오버홀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오버홀트는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지난 92년 2월 등소평은 남부지방 시찰 중 “광동성은 20년 안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四龍)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경제면 뿐 아니라 사회질서와 사회 정세면 에서도 따라 붙어야 한다”는 이른바 '남방순행강화'(南方巡行講話)를 발표해 한국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이외에도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동방정책 즉 '동쪽의 일본-한국의 경제기적을 배우자'는 정책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지도력에 그가 큰 감명을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박 장군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킨 강한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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