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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두려움의 특성

Joyfule 2014. 12. 6. 10:05

 

 

 

경건한 두려움의 특성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게 그 뜻에 순종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탁월하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식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 죄와 허영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년 ~ 1688년)

 

 

1. 성경이 말하는 항구적이고 경건한 두려움

 

성경이 영구불변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는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살펴보는 방식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방식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성령의 역사로 주어진 은혜로서의 두려움

일반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이런 경외심은 은혜라고 불립니다. 즉 이런 경외심은 은혜로우신 성령의 감미롭고도 복된 역사라고 불립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히 12:28)

 

우리를 종으로 속박하는 두려움이 성령께서 종의 영으로서 우리 영혼 가운데서 역사하심으로 생겨난 것이었다면, 우리가 아들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이 두려움은 성령께서 우리가 소유한 특권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이 말씀은 성령께서 종의 영으로서 역사하실 때는 영혼을 노예 상태로 감금하셨지만, 같은 성령께서 양자의 영으로서 역사하실 때는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시기 때문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배인 경외심은 아무나 지니지 못함

그러므로 성령은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종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영으로서 그리고 양자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영”으로 불립니다(사 11:2).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자녀다운 두려움과 아들다운 두려움을 조성하시고 격려하시며 유지하시는 분은 은혜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모든 길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은혜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그분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모든 길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은혜의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의 두려움’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불경건한 두려움과 다릅니다.

이 두려움은 종의 영으로서 성령께서 조성하실 수 있는, 또 실제로 조성하시는 그런 두려움과도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려움은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열매라는 점에서 탁월한 것입니다. 그 탁월함 때문에 성경은 이 두려움을 “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내가 그들에게서 영영 떠나지 않고, 그들을 잘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어서,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게 하겠다.”(렘 32:40)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보배”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소장하고 계신 가장 탁월한 보석이며, 천국에 있는 진귀한 물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그의 보배이니라.”(사 33: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보물이라는 것이 희귀하게 발견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카후서 3장 2절에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믿음 못지않게 귀한 것이므로, 이 두려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롬 3:18)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이 보물, 즉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련한 부랑자들도 주님의 집에 오면 먹다 남은 음식이나 찌꺼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낡아빠진 신발이나 내다 버린 옷을 구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보석은 구경조차 못 할 것이며, 주님이 소장하고 계신 탁월한 보물들은 손을 대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보물들은 주님의 자녀들과 그분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서의 두려움은 죄인의 마음속에 계속 보존되어야 함

우리는 본 강론에서 하나님의 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복된 은혜, 곧 경외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외심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약속의 상속자요 자녀인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집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얻지 못한 채, 그렇게 살다가 죽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은 이런 경외심의 은혜를 소유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탁월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경외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는 “욥과 같은 사람은 없다. 욥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이 말씀은 욥이 거주하고 있던 우스 땅 주변에서, 혹은 다른 모든 지역에서 가장 탁월하게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은 바로 욥이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어서 욥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하게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점에 있어서 누구도 욥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게 그 뜻에 순종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탁월하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전함을 입증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정직함을 만 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정직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외심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섬김은 하나님께 조금도 열납될 수 없습니다.

경외심을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경외심은 ‘언약의 소금’입니다(레 2:13).  언약의 소금은 마음에 양념을 치는 것이므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소금을 치거나 양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경외심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며,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에 대하여 경외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려움의 은혜가 있으면 그 마음에는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가련한 죄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보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런 두려움을 실천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부릅니다. “두려움으로 서고 죄를 짓지 말지어다.”(시 4:4).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은 주의 말씀의 두려움 가운데 서 있나이다.”(시 119:161).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은 서서 그분을 두려워할지어다.”(시 33:8).

 

바로 이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경외심은 하나님의 눈에 탁월한 것, 즉 성령의 은혜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보물이며, 언약의 소금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탁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어야 비로소 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시작으로서의 두려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경외심이라는 이 은혜는 ‘지식의 시작’으로 불립니다(잠 1:7). 왜냐하면 경외심이라는 이 은혜는 사람이 하나님을 은혜로운 방식으로 알게 되면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에 이 은혜가 생명체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악을 미워하게 만듦

그 깨달음에 의해서 영혼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경외심과 합당한 정중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앞에서 떨게 됩니다.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복된 지식을 한 층 더 알고자 하는 것도 이런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두려움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 그 마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그 지식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탐탁하지 않게 여깁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알기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외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길들에 대하여 알기를 원치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욥 21:14).

 

이 경외심은 ‘지혜의 시작’이라고 불립니다(시 111:10).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경외심을 가지게 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지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 무슨 지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잠 1:29)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사람은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 말씀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식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과 영생과 사후 세계를 위하여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두려움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자들을 덮쳐 그들을 영원토록 삼켜 버리는 영원한 저 파멸을 피하는 법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가 다른 방면에서 아무리 현명하고, 다른 분야에서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그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가장 탁월한 것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내팽개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임할 때 자신을 옭아맬 것들만 전심으로 추구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 죄와 허영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죄와 허영은 어리석은 자들이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또한 죄와 허영은 육체의 육욕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와 허용을 혐오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미덕입니다.

“주를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 16:6)

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드러나는 악을 피하고, 거기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멀리 떨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악을 추구하고, 악을 용납하며, 자신들의 마음에 악을 쌓아 가고, 악을 숨기며, 악을 옹호하고, 행악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 안에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악을 미워하고 악과 결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존할 수 없는 경외심과 죄, 하나는 죽게 됨

사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죄가 공존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오므리와 드브니가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왕상 16:21,22).  (두 사람이 동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죄는 둘 다 영혼 안에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죄에 대한 적대감을 영혼 속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말은 죄의 존재 자체가 우리 영혼 안에서 소멸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죄의 정욕이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솔로몬이 다른 문제를 다루면서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 같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잠 26:20).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떠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의 세력이 많은 부분 힘을 잃고 점점 연약해지고 쇠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라.”(잠 3:7)

솔로몬의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너는 악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악에서 떠나는 것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요, 합당한 결과이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라.” 이 말씀은 사람의 판단력과 의지와 지성과 정서가 악에서 떠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가 완전히 소멸되거나 영혼 안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나안 사람들이 계속해서 잔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 안에도 죄가 계속 잔존하게 됩니다. 다만 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은 그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며, 증오하고, 죄와 대항하여 싸우며, 죄를 이기기 위하여 기도하고, 죄를 경계하며, 죄를 대항하여 몸부림치고, 영혼 안에서 죄를 죽이는 작업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경외심은 또한 “생명의 샘”이라고 불립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요,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7).

이 경외심은 영혼으로 하여금 죄와 하나님과 사망과 영생에 대하여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서, 그 결과 그 영혼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미덕을 행사하며 거룩한 묵상을 하도록 만드는 샘이요 원천이 됩니다.

 

이 경외심은 생명의 샘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활동과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과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적인 영원한 복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잠 19:23).

이 경외심은 그 특성 때문에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모든 만물은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은 타오르고, 물은 젖고, 돌은 아래로 떨어지고, 태양은 빛나고, 죄는 더럽힙니다.

 

사망의 그물을 걷는 생명의 샘인 경외심

이와 마찬가지로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본질이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히 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외심은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샘입니다. 성경이 사망의 그물이라고 할 때 그것이 죄와 마귀의 간계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망의 그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에 우리를 붙들어 매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불립니다(잠 15:33). 우리는 앞에서 그것이 지혜의 시작으로 불린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지혜의 훈계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로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만들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지혜를 향상시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혜롭게 하시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허락하신 생명에 이르는 모든 방책과 방법들을 이용하도록 향상시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혜의 훈계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본성의 모든 능력과 본성의 모든 지혜를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훈계를 잘 받기만 하면, 심지어 자연 속의 허다한 것들 안에서도 영적인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한결같이 그 속에 어느 정도의 영적인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밟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저 땅이거니 생각하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발아래 깔려 있는 돌멩이에 대해서 그저 돌멩이거니 생각하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그런 경외심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고 매우 선하신 분이므로, 그분이 지으신 것에는 반드시 지혜가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도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경외심은 또한 그 지혜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전력을 다 기울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경외심은 영혼에게 지혜의 훈계를 주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지혜의 훈계’로 불린다는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영혼 안에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유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공평한 정신과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자신을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렸다고 말했습니다(욥 6:14). 이는 전능하신 자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말할 때나 사물들을 판단할 때나 공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은 배의 짐이 적을 때 배의 안전을 위해 선체 바닥에 싣는 돌이나 모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저울 접시의 균형을 잡아 주는 추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해 주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것들에 관해 올바른 방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ㅡ 창골산 봉서방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