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와 고난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근거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의 길과 고난에의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고난의 신학 대신 영광의 신학 또는 번영의 신학이 군림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축복과 영광과 번영을 약속하는 복음들로 넘쳐나고 있다.
십자가와 고난은 모두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지셨으니,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단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소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를[고난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실로,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다른 복음?을 팔고 있으나 그것은 현세에서 실현될 수 없는 종교적 기만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도래한 시기는 우리 민족이 고난으로 진입하는 때였으며, 이조 말과 일제 아래에서, 그리고 한국동란과 전쟁 이후의 비참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고난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힘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토록 고난을 거부하는, 자연종교와 유사한 형태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풍요, 그리고 물질주의와 향락주의라는 시대정신에 점령당한 교회의 세속화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쾌락주의라는 서구문화의 도입과 지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서구화가 반기독교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이유는 서구교회의 세속화가 선행되었으며, 그 결과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난에 대한 몰이해는 지역과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현상이며, 서구문화는 구조적으로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현대의 서구문화가 고난을 거부하고 쾌락을 추구하게 된 사상적 원인에 대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 고난을 거부하는 교회 ]
서구교회는 자체를 완전복음화하고 기독교문화를 건설하였으며, 전세계에 선교한 기독교의 모체이며 중심이다. 그리고 비서구 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신학과 목회방법론의 근원이며, 모든 연합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교회는 심각하게 세속화되었다. 복음주의 지도자인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현대의 서구교회를 ?호화탕 종교?(hot tub religion)라고 규정한다: ?행복주의(eudaimonism)는 행복이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현세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를, 또는 만일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그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즉시 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호화탕 종교의 원리이다.?1) 그는 그것이 분명히 그릇된 원리인데도, 이러한 쾌락주의(hedonism)가 서구 기독교의 지배적 현실이며 기독교 제자도의 도덕적 본질을 상실하도록 유도한다고 진단하였다.
서구교회가 고난을 거부하게 된 것은 오랜 세속화 과정의 결과이다. 독일교회의 양심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런 과정이 본격적으로 계몽주의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면서, 그 결과 서구 기독교가 너무 합리화되고 문화화되어 십자가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종교, 원형적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다른 종교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마도 고난을 이해하는 동양으로 성령의 촛대를 옮기지 않겠느냐고 한탄하였다.2) 십자가로 성취한 값비싼 은혜가 값싼 은혜로 오인되어 오로지 번영과 쾌락만 추구하는 서구교회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서구교회를 자연종교로부터 고난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교회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소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양의 교회도 오늘날은 서구화로 인해 더 이상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쾌락주의, 어디서 기원했나 ]
그러면 왜 서구인들이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서구사상은 두 가지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발생한 헬레니즘과 유대에서 발생한 기독교사상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헬레니즘이 기독교에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나, 르네상스를 통하여 다시 부흥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운동의 출현과 함께 표면에 부상하였다. 물론, 헬레니즘이 그리 단순하지 않지만, 서구인들에게 고난을 거부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사상이 이 흐름에서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주의 사상이다.
쾌락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에피큐로스(B.C. 314~270)는 데모크리토스의 제자로서, 쾌락주의는 원자론의 논리적 귀결이다. 원자론이란 세계가 단순한 물질적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유물론으로서, 신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히 형이상학적 이성을 부정하는 감성주의를 결과한다. 에피큐로스에 의하면, 모든 인식은 단순히 감각적인 지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감각적인 지각만이 참되며, 그것은 항상 참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가치와 비가치는 감각의 문제다?라고 규정하고, 선이란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구조에서, 우리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무신론과 더불어 쾌락주의를 결과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실로, 모든 것이 단순한 물질이며 영원한 존재나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면 무엇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세가 모든 것이라면, 쾌락과 행복 이외에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이와 같은 고대의 유물론이 현대에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하였으며, 이것은 자연히 가치관에 있어서 쾌락주의를 동반하였다. 19세기에 유럽 정신이 세속화됨으로써 종교적 사회가 비종교적 사회로 전락하였으며, 20세기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형태의 물질주의가 외적으로는 대립하였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가치관을 추구하면서 전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렇게 하는 동안, 인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종속되었고, 교회도 이런 거대한 흐름을 거부하지 못한 채 고난을 거부하고 축복과 영광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 홉스와 니체가 끼친 반기독교 사상 ]
서구사회가 고난에서 영광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반기독교적 사상가를 든다면, 토마스 홉스와 니체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고난의 의미를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이다. 과거나 현재나 목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특히 목사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그러한 고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게 되는 비극을 초래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수용하고 인내하는 고난에 대하여 근본적인 무의미를 주장하고 힘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토마스 홉스(1588~1679)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유물론을 추종하여, 인간은 물체일 뿐이며 동물과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데카르트가 사유의 절대 이성을 주장하였을 때, 그는 존재와 사유의 이원론을 부정하고 철저한 유물론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객관적인 진리나 윤리를 부정하고 동물적 투쟁과 이기주의를 옹호하였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Homo homini lupus)이며 ?만인은 만인에 대한 전투?(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에 있다. 더 많은 소유와 쾌락을 얻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고난이란 약자가 당하는 패배의 결과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신의 죽음과 반도덕주의를 외치며 모든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전복(Umwertung aller Werte)을 시도하였다. 그는 도덕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도덕가들 전체가 자기에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자기를 ?반도덕가?(Immoralist)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도덕이란 항상 당하고 패배하는 약자와 노예들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상은 모든 규범과 도덕을 거부하는 영웅적 인간이다. 강자의 횡포와 공격과 지배, 그리고 약자의 억압과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불의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이다. 그는 칸트의 이성이나 당위 개념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로지 힘에 의한 지배를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다윈의 진화론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다윈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가 인간을 동물의 한 종으로 본 것이나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사상적 중심원리로 채택한 것은 그의 사상적 구조가 다윈의 진화론적 체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인간이해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였으며, 그를 허무주의자로 전락시켰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부정한 동물심리학자 스키너의 생각도 인간을 동물로 본 논리적 귀결이었다. 실로, 만일 아무런 절대적 진리나 윤리가 없다면, 그리고 단순히 동물적 투쟁만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실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본능적이라면 자유도 없고, 결국 운명론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 운명은 무엇이며 왜 우리가 운명에 끌려 다녀야 하는가? 그리하여 운명론은 결국 허무주의와 비관적 염세주의라는 절벽으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아무 원칙도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방임적 쾌락주의에 귀결하게 된다.
[ 문화의 세속화, 진리의 혼돈에서 초래되다 ]
아마도 현대의 극도로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홉스나 니체의 약육강식적 투쟁이론이 가장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인생철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대철학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도 이성을 약화시키고 감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감성주의는 쾌락주의를 정당화하고 고무시킨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해체와 불신을 조장하고 감성주의를 부추기는데, 감성의 규범인 이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무런 규제장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열과 규제와 제한의 철폐를 주장하며, 모든 가치와 규범이 힘과 정치의 논리일 뿐이라고 정죄한다. 동성애나 변태적 성을 옹호하는 성 정치학을 주장한 푸코(M. Foucault)도 이에 속한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는 모든 규범을 점차 철폐하고 아무 규범도 없는 무윤리적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구사회가 성경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기독교 사회에서 이처럼 무윤리적 사회로 전락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신으로부터의 점진적 이탈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회가 무종교적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문화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신관과 진리 혹은 윤리라는 규범은 깊은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진리의 원천이기 때문에 유신론은 진리의 존재를, 무신론은 진리의 부재를 전제하고 귀결한다. 유일신론은 유일한 진리를 인정하고, 다신론은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는 다원론을 결과한다.
허무와 무의미가 피곤하고 외로운 현대인을 엄습하는 것도 신의 상실 때문이다. 종교는 문화의 영혼이기 때문에, 신의 부정과 무종교적 경향이 문화의 허무와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이것을 문화의 세속화라고 하며, 현대문화의 근본적 결함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을 부정하면 절대규범을 부인하게 되고, 절대가치가 없으면 고난에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임마누엘 칸트가 이 점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신의 명령도 자의적 규범에 포함시켜 거부해 버림으로써 그가 그토록 절대적 자체규범으로 수호하려고 했던 이성은 그 논리적 기반을 상실하고 불신을 당하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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