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과의 해후(邂逅) - 임병식
지난 주 초, 순천 주암댐 옆에 조성된 고인돌 공원을 다녀왔다. 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볼 것이 많았다. 보기 전에는 유물 몇점만이 있겠거니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고대인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고대인들의 생활상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수집한 고인돌과 출토된 유물을 적절히 배치하고 밀랍인형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인근 주암땜 일대에서 발굴한 것들이었다. 호기심은 입구에서 발동했다.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우선 시선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고인돌은 남방식과 북방식 두가지 형태가 있다. 굄돌의 높이가 낮고 작은 적은 주로 남방식, 큰 규모의 것은 북방식이다. 한데 후자는 실물을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시맨트 구조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것들이 조성된 시기는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철기시대(기원전 300- 기원전 1년)로 대개 강유역에서 발견이 된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내문을 보니 우리나라 지석묘의 기원은 시베리아의 카라숙 돌넘무덤계통의 거석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북방설, 동남아시아에서 왔다고 보는 남방설,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안내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 갔다. 먼지 박물관이 나왔다. 아담하게 꾸며진 실내에는 원형의 고인돌 몇 기와 출토된 부장품들이 반겼다. 출토물은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무문토기, 반월형 석도, 석부, 방추차, 귀걸이 등 다양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조악한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최고의 생활용품이나 애장품으로 여겼을 것으로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지도자는 무엇을 입고 먹고살았을까. 갑자기 궁금해 졌다. 그런데 이 때, 나의 뇌리에 문득 이원철시인이 무녕왕능 부장품을 둘러보고 쓴 '어금니'란 시가 스쳐갔다.
'왕비는 죽고 어금니만 남아서 /살구 잡수시던 어금니만 남아서/ 우리 할아버지 등골빠지게한 어금니만 남아서....(이하생략)이렇게 이어지는 시다.
그런 걸 보면 상류층은 그런 대로 호사를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야마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갖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다 사냥하여 운수좋게 살코기 맛을 볼때도 있었겠지만 보통때는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산과 들, 강으로 나가 헤매였을 것이다.
그런 정황을 그려보니 오늘날의 사람들은 옛날 임금님 보다 더 잘먹고 산다는 말도 과장이 아니지 싶다. 그렇게 살면서도 지혜를 발휘해 쐬기를 박아 바위를 떼 내고 그것을 운반을 하였으니 지혜는 대단했던 것 같다.
문득, 당시 고대인들의 미적 감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이 없던 시기, 얼굴을 보는 것은 물가에 나가 드리워진 제 모습을 보거나 구리로 갈아 만든 어루쇠에 비쳐보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볼수 가 없으니 얼굴의 미추따위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을것 것이다.
그러나 핏줄에 대한 집념은 강하지 않았을까. 비록 사는 환경이 비 바람이 들치는 초막이지만 끈질기게 생명은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움막을 둘러보다가 재현해 놓은 마네킹과 마주했다. 그물 손질하는 동작를 표현해 놓고 있었다. 입은 입성은 허술하나 눈동자 만큼은 형형하기 그지없다. 새삼, 일상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고 숭고했는가가 느껴져 왔다.
나는 고대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삶을 둘러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란 끊임없이 오로지 유전체로만 이어온 역사가 아닐까. 피로 이어져 온 장구한 역사가 그대로 느껴졌던 것이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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