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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4.(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Joyfule 2025. 2. 13. 17:47



교회사 4.(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5. 프로테스탄트의 성공요인과 정착의 문제점.  

1) 정착의 성공원인 시기의 적합성 (갑신정변, 문호개방, 청일전쟁) 1876년에서 부터
1896년간의 우리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예로 1882년에 임오군란, 1884년에 갑신정변, 1894년에 갑오경장, 그리고 동학혁명,
청일전쟁(1895)과 민비시해사건, 1896년의 아관파천과 같은 해의 독립협회 창립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시련 후에 대권을 잡은 대원군이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민비정권은 일본의 무력하에
타율적인 수호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1876년  강화조약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과 청일전쟁으로 인한 
서양문물의  우수성 입증등은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 좋은 외적인 요소들을 제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진공상태 
이 당시 개신교의 정착의 성공의 원인 중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 한국인의 종교적 상태인 것이다.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국 역사를 통해 한때 전성했던 선(선)이나 불교 및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하고
그 형식과 명분으로만 되풀이 되던 근대는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없는 진공기라고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정책    
개신교 선교사들은 과거 카톨릭교회 선교 전래시의 박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확장을 위하여 자신들이
카톨릭교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교분리 정책을 표방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정교분리정책은 카톨릭의 상황을 고려한것 외에도 이미 자신들이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경건주의적인 신앙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으므로,
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이러한 정책은 당시의  집권자들에게는 안심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성서번역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은 압도적으로 성서의 전파와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인천에 상륙할때 이미 한국어로  번역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은 '이수정'이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세례를 받고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복음서를 번역하여 1885년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가 요꼬하마의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일천부 간행된  것을 언더우드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또한 만주에서도 이미 존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성서를 번역 간행하여 전파하여
언더우드가 왔을때 이미 서상륜이 번역된  성서를 전파하고 다녔으며,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들어 온지 얼마 안되어서 세례를 베푼 사람들이 이미 성서의 교훈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뜻깊은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2) 정착된 프로테스탄트 유형의 문제점. 교파 중심 및 교파이식   
이는 처음부터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교파 교회라는 특수한 조직과 제도가 신앙보다 중요시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구교회의 배경에서 생성된 특수교단의 이식 때문에
자립적인 민족 주체적인 신앙형성이 위축되고 따라서 이질적인 사회배경의 작용 요소들이
생소한 토착교회에서 빗나가 구속할 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의 상황만은 아니다.
아시아 교회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 대하여 강근환 박사님은 서구의 교회들이 교단적인 선교업적에 급급하여 선교지에서
서로 헐뜯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분열을 초래 했으며,
특히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신학의 결핍성
한국교회의 병폐라고 지적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유산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축자영감설을 바탕으로 하는 청교도형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근본주의라는 특수성으로 비롯된 것으로,  신학의  부재를야기시키게 되었다.

교회론적인 측면에서의 문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앙공동체이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교인의 입교동기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지향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측면과
아울러 기독교문명이라는 거대한 힘을 빌리고자한, 
정치나  개화에 목적을 두었던 부수적인 동기도 동일하게 작용하였다.
곧 성서 신앙과 함께 개화 지향 정치 구원이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