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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許再碩의 아오지 탄광 체험 증언

Joyfule 2012. 8. 7. 11:25

 

국군포로 許再碩의 아오지 탄광 체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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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_news.gif 『포로는 굶어죽고 黨 간부는 돼지에게 죽 먹이고』
월간조선(이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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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돌아온 국군포로 許再碩의 아오지 탄광 체험 증언

● 기차 停電 사고로 수천 명 사망
● 在北 포로 등 87명 명단 공개
●『對南 간첩은 금의환향시키고, 국군포로는 외면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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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돌아온 국군 포로 許再碩씨.
지난 3월 개봉된 영화 「송환」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92년 석방되기 시작한 非전향 장기수들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기까지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것이다. 

이 영화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가슴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 『내 평생 이런 감동적인 영화는 처음이다』 등의 소감을 적은 글들이 넘쳐났다. 영화 배급사는 『쏟아지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 영화를 5월17일부터 재개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非전향 장기수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국군포로 許再碩(허재석·72)씨.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1953년 7월 어느 날, 그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방의 최전선에 있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戰死 처리되었고,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47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 7월29일, 許再碩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를 맞는 요란한 환영식도 언론의 조명도 없었다. 

許再碩씨가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헤매고 있는 사이,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2000년 6월15일 열린 남북 頂上회담의 여진에 휩싸여 남북관계의 행복한 미래를 점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許씨가 돌아온 지 한 달여 만인 2000년 8월25일, 정부는 北으로 돌려보낼 63명의 非전향 장기수 명단을 발표했다. 그해 6월15일 열린 남북 頂上회담에서 金正日과 한 非전향 장기수 송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2000년 9월2일, 국내에서 벌어진 온갖 환송회를 당당하게 마친 63명의 非전향 장기수들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北으로 갔다. 이들을 맞는 북측 지역 통일각 건물에는 「백절불굴 통일 애국 투사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이들이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 도착하자 군가인 「용진가」가 울려 퍼졌다. 

장기수들은 통일각 앞 金日成의 친필비 앞에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다. 평양 시내에서는 이 장기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국내 언론도 연일 특집방송을 꾸며 장기수들이 북송되기 전까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9월6일, 許씨는 50년 前 자기가 복무했던 사단에서 조촐한 전역식을 치렀다. 

許씨는 脫北 후 틈틈이 쓴 手記에서 이날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단에 가서 내 생에 받아 보지 못한 분에 넘치는 환영을 받으며 전역식을 마치고, 50년 동안 어느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고, 언제 내가 살아서 고향땅에 찾아가서 조상의 묘소와 형제들을 만나 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어느 하루도 떠나 본 적이 없던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고향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을 찾아온 나는 내가 살던 고향땅에서 조상의 묘소에 술잔을 드리고 재석이가 찾아왔다는 인사를 올리고 나서 고향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마련한 잔치에 참석하였다. 내가 마을에서 자랄 때 시냇물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은 불과 몇 명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서 따뜻한 인사를 받고 성의껏 마련한 음식을 먹으며 지나온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웃음과 함께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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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ow.gif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국군포로

0406_186_2.jpg지난 5월1일, 국군포로 許再碩씨를 찾았다. 許씨는 현재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있는 관산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脫北者인 李모(63·여)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許씨의 고향은 경남 진양군 일반성면 운천리다. 許씨가 자기 고향이 아닌 지리산 끝자락에 있는 산골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李씨가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멀리서 사람이 찾아와서인지 이 「시골 노인」은 연신 「허허허」하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許씨는 귀가 좋지 않았다. 질문을 여러 차례 큰 소리로 물어야 알아듣곤 했다. 

許씨는 북한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을 했다. 좁은 막장에서 수십 년간 시끄러운 탄광 굴착 기계를 잡고 굴을 뚫고 탄을 캤을 許씨를 생각하니 가는귀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許씨는 놀랄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로가 된 1953년 이후 자신이 북한에서 스쳤던 곳의 지명, 날짜 등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許씨는 북한에서 겪었던 고생담을 털어놓으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포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대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한민국을 뒤엎겠다며 활동한 장기수들은 다 돌려보냈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국군포로는 왜 한 명도 못 데려오느냐 말이오. 非전향 장기수 그 사람들, 北에 가면서 우리한테 침을 뱉으면서 갔어요. 그 사람들은 여기 있으면서 북한에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한 명도 없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내가 여기 南에 와 보니 北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가 더 불쌍해서 못 견디겠어요. 고생만 하고 산 국군포로들 한 명이라도 좋은 세상 한 번 보고 죽으라고…. 국군포로가 北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 국민들이 알아야 해요』 

이틀에 걸친 인터뷰 도중 許씨가 가장 흥분하면서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許씨는 北에서 1남5녀를 두었다. 許씨의 셋째 딸은 許씨가 한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탈북, 2001년 한국으로 건너와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현재 북한에는 부인과 나머지 자식들이 남아 있다. 

許再碩씨는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현재 남한에는 許씨의 제일 큰누나(85)만 생존해 있고 나머지 형제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는 1997년 12월 탈북해 한국으로 들어온 국군포로 梁珣容(양순용·당시 72세·경남 함양군 출생)씨의 도움이 컸다. 

1953년 강원도 금성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된 梁珣容씨는 1994년 10월 귀환한 조창호씨에 이어 두 번째로 돌아온, 국군포로 명단에 올라와 있는 사람이다. 

梁씨는 당시 국방부가 지급한 200만원의 위로금을 거절해서 화제가 됐었다. 梁씨의 보상금 반환사건은 정부가 국군포로 지원 특별법을 만드는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梁珣容씨는 귀환 직후 50~60명의 생존 국군포로를 포함, 100명 가량의 국군포로 명단을 증언했다. 梁씨가 증언한 생존 국군포로 가운데 許再碩씨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許再碩씨와 梁珣容씨는 북한에서 같은 탄광에서 일을 했다. 梁珣容씨는 3년 前 교통사고로 숨졌다.

許再碩씨의 막내동생 태석(2003년 작고)씨는 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을 통해 북한에 사람을 몰래 보내 형과 접촉을 시도했다. 

許再碩씨는 동생이 중국에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98년 12월 중국 연변으로 건너와 꿈에 그리던 동생을 상봉할 수 있었다. 이후 북한에 돌아갔던 許씨는 2000년 7월 북한을 再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arrow.gif휴전 20일 전 중공군에 포로가 되다

0406_186_3.jpg許씨는 1945년 국민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당시 정부에서 한글과 역사를 더 배우라고 7개월간 졸업을 연기하는 바람에 許씨는 1947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許씨는 고향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일을 하다가 6·25 전쟁을 맞았다. 1952년 3월 許씨는 소집장을 받고 입대했다. 훈련을 마친 許씨는 1952년 8월 수도사단(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26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에 배치되어 수도고지 전선에 투입되었다. 

1952년 12월, 許씨의 부대는 강원도 금화고지로 옮겼다. 許씨 소대는 금화고지 최전방에 있는 독립된 高지대에 배치되어 중공군과 맞섰다. 소대의 임무는 이곳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敵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敵과의 직선거리는 2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許씨는 이곳 잠복근무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목 놓아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953년 7월 들어 휴전이 임박하자 중공군의 공세가 빈번해졌다. 7월5일 비가 내리는 밤 許씨 분대는 잠복근무를 나갔다. 그날따라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들어 시야가 좋지 않았다. 許씨는 일등중사인 이병진 분대장과 3m 떨어진 곳에서 전방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許씨가 있던 진지 속으로 떨어졌다. 許씨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순간 하늘에는 조명탄이 터지며 사방이 밝았다. 許씨는 고개를 돌려 분대장이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분대장 이병진은 진지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許씨도 진지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참호 속을 기어나와 살펴보니 오른쪽 팔이 완전히 부러져 있고, 왼쪽 무릎과 오른쪽 허벅지가 파편에 맞아 출혈이 심한 상태였다. 許씨는 止血을 해보려고 했지만 한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때 중공군이 몰려왔고 許씨는 포로가 됐다. 

중공군들은 許씨의 양다리를 잡고 50m나 끌고 내려갔다. 許씨가 아프다고 소리치자 중공군은 許씨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부러진 팔과 무릎을 붕대로 감싼 후 許씨를 들쳐 업고 내려갔다. 포로가 되었을 때 許씨의 계급은 하사였다. 

중공군 진지에 잡혀 온 許씨는 간단한 응급처리를 받고 들것에 실려 강원도 창도군에 있는 중공군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곳 땅굴 속 병원에서 許씨는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일어나 보니 다행히 팔을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許씨는 중공군의 리어카에 실려 강원도 평강에 있는 중공군 야전병원에 후송되었고, 이곳에서 휴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許씨는 인민군에 인계되어 다시 평안남도 강동군에 있는 해운광산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한 달 후인 8월 중순경 기차로 평남 신창탄광으로 옮겨졌다. 신창탄광에서 許씨는 오랫동안 치료를 받지 못해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상태에서 또 한 번 수술을 받았다. 

許씨는 『신창탄광의 노동자 사택이 포로수용소로 쓰이고 있었고, 국군포로가 약 450명, 미군포로가 4~5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許씨는 포로가 된 소대원 일부와 재회했다. 

『소대장 황신주(경북 상주) 소위, 분대장 이병진(부산 영도), 나와 한마을에 살다가 軍에 같이 와서 같은 분대에 있었던 하옥주 하사, 소대 향도였던 백이호 이등상사가 포로로 잡혀 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휴전 10여 일 전인 7월14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許씨는 황신주 소대장으로부터 자신이 戰死 처리된 사연을 들었다. 

許씨가 실종되자 이병진 분대장은 許씨가 戰死했다고 소대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전사자 시체를 올려 보내라는 사단사령부의 지시에, 소대장 황신주씨는 許씨 시신을 찾지 못하자 許씨와 같이 근무를 나갔다가 戰死한 양정훈(경남 함양)씨의 시체에 TNT를 넣고 폭파하여 둘로 나누어 사단에 올려 보냈다는 것이다. 

許씨는 탈북 후 고향에 와 보니 집에서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더라며 웃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許씨의 고향집에서는 아버지의 첫 제삿날에 許씨의 전사통지서를 받아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許씨가 머문 신창탄광 수용소內에 의무실이 있었으나 전기 시설도 없고, 화장실을 제 발로 가지 못하는 환자가 많았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許씨는 신창탄광 포로수용소에서 1개월 정도 있었는데 화물차가 오더니 환자들을 싣기 시작했다고 한다. 許씨는 『부상자를 먼저 송환하는가보다 하고 기뻐했다』고 말했다. 소대장 황신주씨가 許씨에게 다가와 『한국에 돌아가면 여기 국군포로가 500명이 있다고 꼭 말하라, 미군포로도 있다고 알리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arrow.gif『이제 고향으로 가는구나』

0406_186_4.jpg그러나 許씨 일행을 태운 차가 멈춘 곳은 1개월 前 許씨가 신창탄광에 오기 전 머물렀던 평남 강동군의 해운광산이었다. 許씨는 이곳은 부상자 전문 포로수용소였다고 했다. 여기서 부상자는 치료를 받고, 조금 건강한 사람들은 탄을 캤다는 것이다. 포로들이 머무는 사택 주변은 전부 철조망을 쳐 놓았다고 했다. 

북한은 부상 포로들을 수용한 강동 해운탄광 수용소를 「내무성 중앙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강동수용소에는 내과환자가 약 100명, 외과환자가 약 130명, 합해서 230명 가량의 부상 포로가 있었다고 했다. 

『병원이라고 하지만 약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택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없었어요. 사택을 둘러싼 철조망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내무원 인솔下에 탄을 캐러 갈 때 뿐이었습니다. 몸이 좀 회복되면 「회복소대」에 배치되었는데 여기에 배치되면 탄을 캤습니다』 

許씨는 이곳에서 포로가 된 국군장교를 여러 명 보았다고 말했다. 

『국군장교 포로 10여 명이 강동수용소로 왔습니다. 그중에 김홍종씨는 국군대대장이었다고 하고, 김종식은 국군소위, 신형규씨는 헌병소위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허통운이라는 사람은 양쪽 다리를 절단했고, 김덕수라는 사람은 복부 부상으로 겨우 살아났다고 합디다. 이곳에 왔을 때 이들은 몸이 허약해서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듯했습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장교들은 1950년 10월경에 포로가 됐는데 그동안 구류장에 있었다고 해요』 

許씨는 『구류장은 포로들이 반항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가두어 두는 곳으로, 이곳에 들어간 포로들은 햇볕도 들지 않는 방에 한 달 동안 감금된다』고 설명했다. 

강동수용소에서 다행히 許씨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54년 4월25일, 트럭이 오더니 회복된 환자들 50~60명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기차를 갈아타자 포로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許씨 일행을 실은 기차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3일 후 기차는 함경북도 경흥군 어느 탄광에 도착했다. 아오지 탄광이었다. 포로들이 탄 기차는 고향行이 아니라 「아오지行」이었다. 

許씨가 강동수용소에서 본 국군장교 포로들도 이때 許씨와 함께 아오지에 왔다. 장교 포로 중 신형규씨만은 그때 아오지가 아닌 함경북도 새별군 하면탄광으로 갔다고 한다. 

―강동수용소에서 본 복부 부상자 김덕수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1956년 포로 해방 때 신의주 전상자 병원 등으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을 모릅니다』 

―아오지에 같이 간 장교포로 김홍종과 김종식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김홍종·김종식 장교 등은 아오지 탄광에서 얼마 안 있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위부에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보위부가 데려간 사람들이 김홍종·김종식을 비롯해 김영철·윤창수·김민호·좌공수·이홍경 등입니다. 북한은 보위부가 데리고 가면 그 후 소식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어요』 

許再碩씨는 탈북한 후 20명 정도의 생존자 국군포로를 비롯, 80여 명의 명단을 관계 당국에 증언했다고 한다. 현재 국군포로는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 72세이고,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arrow.gif아오지 탄광의 국군포로 500명

국군포로는 대부분 탄광으로 보내졌다. 許씨는 『북한은 탄광을 1701부대, 1702부대, 1703부대 등으로 일련번호를 매겨 놓고 전부 「내무성 건설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許씨가 있었던 아오지 탄광은 1701부대로 불렸다. 아오지 탄광은 다른 탄광에 비해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에는 당시 국군포로가 몇 명 있었습니까. 

『500명 가량 되었습니다』 

―휴일에는 쉬었습니까. 

『탄광은 원래 한 달에 두 번 놀면 잘 노는 것인데, 명절이라도 일할 때가 많습니다. 포로들은 일요일이고, 명절이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어요. 포로들과 같이 일을 한 사회 일반 노동자들은 일요일이면 쉴 수 있었습니다』 

―국군포로와 사회인이 같이 일을 했습니까. 

『같이 組를 이루어 일을 했습니다. 그 밖에 아오지 탄광에는 교화소 죄인들도 많았지만, 이들은 국군포로와 섞여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굴진작업(굴 뚫는 작업)을 할 때는 사회인 1명에 포로 3명 정도가 섞여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화소 죄수들은 일을 하다가 죽으면 원인규명이라도 하지만 우리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식사는 어땠습니까. 

『일반 노동자들은 작업하다가 중간에 휴식을 하면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굴에 한 번 들어가면 8시간 동안 일만 하다가 밖에 나와서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밥은 좁쌀밥인데 쌀을 조금 넣을 때가 있지만 순 좁쌀밥이 더 자주 나왔습니다. 그것을 한 식기(그릇) 주면 시래깃국이나 미역국에 말아 훌 마시면 끝입니다. 20~30代의 젊은이들이라 배고픈 것이 제일 괴로웠습니다』 

許씨는 매일 작업이 끝나면 권총을 찬 소대장이 포로들을 열을 세워 앉혀 놓고 작업량을 달성 못 했다고 온갖 험한 욕을 퍼붓곤 했다고 한다. 작업 중 부상자가 발생하면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있는 군의소에 입원을 하는데,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고 항변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에 회암 2갱이라는 곳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석탄을 캐던 곳입니다. 이곳은 온도가 30℃가 넘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하기 때문에 우리는 팬티만 입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매일 작업량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온갖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일을 해야 했어요. 몸에 땀이 흐르고 석탄가루가 새카맣게 묻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캐낸 탄을 鑛車에 실어 밖으로 빼낼 때도, 8시간 내내 쉬지 않고 탄을 실어 날라도 작업량 달성이 쉽지 않았습니다』 

許씨는 겨울에도 작업복이 땀에 흠뻑 젖었다고 했다. 

『작업이 끝나도 갈아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땀이 밴 옷을 입고 수용소 막사까지 걸어오면 아오지의 강추위에 옷과 발싸개가 얼어 버립니다. 그러면 신발이 벗겨지지 않아 애를 먹어요』 

許씨는 『대부분 탄광갱에는 통풍시설이 잘 되지 않는 통에 일산화가스와 메탄가스가 가득해 머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고 말했다. 

『탄을 캐기 위해 한 번 발파작업을 하고 나면 180cm 정도의 탄이 쌓입니다. 화약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쌓인 탄을 삽으로 다 꺼내고 나면 머리가 아파서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일을 끝내고 400m 정도 되는 갱도를 나오는데 머리가 아파서 중간에 몇 번이나 쉬어 가며 올라와야 했어요』 



arrow.gif노동력 짜내려고 국군 포로 붙들어둬

아오지 탄광 내무 건설대에는 4개 중대가 있었다. 1개 중대에는 130명 가량이고, 이는 다시 3개 소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1개 중대의 하루 작업은 3교대로 이루어지며 낮일은 오전 8시~오후 4시, 저녁 일은 오후 4시~밤 12시까지, 새벽일은 밤 12시~다음날 오전 8시까지였다. 근무 시간은 1주일에 한 번씩 바뀌었다. 

하루 일이 끝나면 현장에서 작업량에 대한 총화를 한 후 수용소로 돌아온다. 막사로 돌아오면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보고를 한 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좁쌀밥과 식은 죽을 한 그릇 먹고 나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면 이번에는 학습시간이다. 상부에서 학습교재가 내려오는 데 따라 맞추어 학습을 했다고 한다. 학습내용은 주로 金日成의 家系와 경력 등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 노동자들은 중대별로 작업량을 비교하여 우승 중대에게 표창을 내리기도 했지만, 포로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1955년 4월에는 힘든 노역에 항의해 포로들의 집단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포로들 사이에 「진달래 꽃이 필 때까지」란 말이 떠돌았는데 許씨는 『그 말이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리 한국에서 미군과 함께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탈출 계획 신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 때문에 국군포로 5명 정도가 구류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1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나온 포로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했다. 

許씨는 이렇게 국군포로를 탄광에 몰아넣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은 북한의 戰後복구에서 석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탄을 캐야 공장이 돌고, 공장이 돌아야 戰後 복구사업이 차질 없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북한은 국군포로가 없다고 계속 주장을 한 것입니다. 탄광 갱 안에서 여자들도 같이 일을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부상자 포로들이 이곳저곳 탄광을 다니면서 국군포로를 많이 보았으니, 이들을 송환했다가는 다른 포로까지 보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병신이 된 국군포로라도 돌려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포로들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다가 죽어도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값싼 노동력을 북한이 왜 포기하겠습니까』 



arrow.gif폭발사고 냈다고 처형

포로들의 강제수용소 생활은 1956년 6월 끝이 났다. 1956년 6월, 북한은 6·25 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온 소위 의용군 8만 명을 제대시켰다. 이것을 북한에서는 「8만 명 제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許씨는 『이때 국군포로는 「내각결정 143호」라는 명칭을 붙여서 공민증을 내주고 사회인으로 환원시키는 조치를 취했다』며 『이후 모든 포로수용소는 해체되었다』고 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국군포로」라는 말은 없어지고 「143호」 혹은 그냥 「43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각결정 143호」가 내려지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포로들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자기가 포로 시절 일하던 탄광에서 그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8만 명 제대」로 새로 사회에 배출된 의용군들도 대부분 탄광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의용군들은 1956년 7월 중순부터 탄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용군 출신들은 오자마자 15일간 탄광 안전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억울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의용군이 큰 소리를 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포로가 탄을 캐는 데는 전문가들이니까 의용군들이 우리에게 기술을 많이 배웠습니다. 의용군은 조금만 기술이 있어도 소대장도 되고 중대장, 기타 간부가 되는 데 반해 국군포로 출신은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소대장이나 중대장 되기가 힘들었습니다』 

북한의 탄광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항상 이어졌다. 許씨가 겪은 첫 번째 큰 사고는 1958년 8월 아오지 탄광 용연 청년갱 폭발사고였다. 

낮 12시경 용연 청년갱에 메탄가스가 차면서 폭발했는데 39명이 사망했다. 許씨는 『사망 사고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죽은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수십 명의 화상자』였다고 했다. 

『안전부요원이 사고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폭발사고가 나서 제일 먼저 밖으로 나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내었는데, 백남운이라는 국군포로였습니다. 이 사람이 담뱃불을 잘못 놓아 폭발했다는 것이죠』 

백남운씨는 몇 달 후에 공개 공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許씨는 막장에서 일단 사고가 나면 국군포로가 가장 먼저 의심받고, 처벌의 강도도 높았다고 했다. 최인규라는 국군포로는 탄차를 갱으로 밀고 가던 도중, 탄차가 갱도 버팀목을 치는 바람에 갱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를 냈다고 한다. 이 사고로 최씨는 『부주의로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살았다고 한다. 

1961년 아오지 탄광 회암 2갱에서 메탄가스가 폭발하여 1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곳 탄광에서는 최양희라는 국군포로가 일을 했는데 사고 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1985년 7월, 밤 12시경에는 막장의 석탄에 자연발화로 불이 붙어 석탄이 쏟아져 내리면서 굴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30분 동안에 40명이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이때 국군포로들의 자식들이 많이 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고는 문책 대상자가 중대장 박병기씨가 되어야 하나, 그는 6·25 때 월북한 의용군 출신이라고 하여 강제노동 6개월에 그치고, 대신 坑長이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 사고 후 許씨에게는 「자연발화 중대장」을 맡게 되는 「행운」도 따랐다. 

許씨는 중대장 직책이 버거워 사양했으나 상부에서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맡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許씨는 일을 하지 않고 연로보장을 타먹는 나이(정년퇴직)가 되는 1992년까지 중대장이란 직책으로 일했다고 한다. 許씨의 임무는 탄광內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날 만한 곳을 사전에 찾아서 대비를 하고, 발화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탄광 사고 이야기가 나오자 許再碩씨는 북한에서 있었던 큰 사고 몇 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2000년 2월경 평양에서 열린 농업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태우고 돌아오던 기차가 평안남도 양덕고개에서 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멈춰 섰다는 것이다. 기관사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기차를 세워 놓고 잠시 식사하러 갔다고 한다. 

기차에는 지방 黨 간부들이 대거 탑승했으며, 장사꾼·주민 등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잠시 멈춰 선 기차가 갑자기 후진을 하기 시작하더니 첫 번째 역을 지나 두 번째 역에서 대기 중이던 기차를 들이받았다. 대기 중이던 기차에도 많은 사람이 탔다고 한다. 許씨는 『이 사고로 약 30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증언했다. 

1990년경에는 청진 아래 있는 용반이라는 곳에서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폭발해 인근 1km 내의 건물이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사고의 인명피해는 용천역 열차사고에 못 미치지만 폭발 규모는 용천역 열차사고에 버금갔다고 한다. 



arrow.gif폐광이 된 탄광

許再碩씨는 현재 아오지 탄광은 폐광 상태나 마찬가지라고말했다. 

『탄광에는 물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 물을 양수기로 퍼내야 하는데, 1990년 이후 북한의 전기 공급이 불규칙하면서 양수기로 물을 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전이 한 시간만 되어도 물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이 물이 갱도까지 차면 물먹은 탄과 암석이 늘어나 탄광 갱도의 버팀목이 무너집니다. 무너지면 다시 복구해야 하는데 복구해 놓으면 또 정전이 되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탄광에 쓰는 대형 기계도 모두 물 속에 잠겨 못 씁니다』 

특히 1992년 이후 배급이 나오지 않아 광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탄광 광부들이 집에서 쓸 연료를 얻기 위해 갱도에 들어가 벽을 파헤치며 탄을 긁어내는 바람에 굴이 무너지기도 하고, 사람이 부상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許再碩씨는 60세가 되던 1992년 8월 연로보장을 받을 나이가 되어 탄광 일을 그만두었다. 정년퇴직을 한 셈이다. 

許씨는 탄광생활을 할 때, 많을 때는 300원 가량의 월급도 받았다고 한다. 許씨는 『배급이 정상일 때 강냉이 1kg이 7~8원, 쌀 1kg이 15원이었으니까 300원이면 제법 많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배급이 점점 줄어들면서 쌀값이 오르더니 1992년에 와서는 300원으로 쌀 10kg을 겨우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쌀 1kg이 7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연로보장비는 제대로 받았습니까. 

『연로보장비는 훈장을 타거나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나오기 때문에 「공로비」라고도 합니다. 1998년 10월인가 북한 정무원 결정 10호라는 게 내려져서 원래 지급 연로보장비에서 35~40% 가량 삭감을 했습니다. 나는 1992년 탄광을 그만두고 196원 정도의 연로보장비를 받다가 1998년부터는 125원으로 줄어들더니 그 후로는 통장에 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은행에 돈이 없으니 찾을 수도 없습니다』 

―배급 사정은 언제부터 어려워졌습니까. 

『1990년도부터는 배급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1994년부터는 한 달에 10일분도 줬다가 많이 주면 보름치도 줬다가 했는데, 그나마 탄광 같은 중노동 현장이나 주었지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1992년부터 배급이 없다시피했습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하루를 나고 있습니까. 

『온 가족이 먹고 살자고 산에 가서 비닐로 천막을 쳐 놓고 생활하며 나무를 해서 시내에 내다 팔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쪽에는 나진·선봉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인데, 개방도시(경제특구)라서 그 안쪽은 풍족합니다. 나진·선봉 주위에는 독일제 전기철조망을 둘러 쳐 놓았습니다. 그곳이 바다와 접해 있어서 사람들이 고기를 사다가 되팔기 위해 철조망을 많이 넘는데 감전되어 많이 죽습니다』 

―왜 철조망을 넘습니까. 

『그 안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도 다 잘삽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장사를 하려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송이와 약초를 판 얼마간의 돈을 장사밑천으로 나진·선봉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를 사와 그것을 파는 것이죠. 감시원이 있으면 돈을 주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arrow.gif송이버섯, 산나물을 캐서 연명

許씨는 탄광 일을 그만둔 후부터는 산에 다니며 봄·여름에는 산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송이버섯과 도라지를 캐고, 겨울에는 개구리를 잡아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93년 농장에서 경비를 서면 1년에 강냉이를 108kg 주겠다고 해서 농장 경비를 섰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니 농장에서 수확량이 없다며 이삭 강냉이로 두 마대 주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2년 정도 경비 일을 하다 그것도 그만뒀어요』 

許씨는 1997년 3월 약초를 캐기 위해 눈 쌓인 산속을 해매다가 급성신장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해 4월 몸이 겨우 회복되자 許씨는 딸들 집을 전전하며 약초를 캐어 근근이 살았다고 한다. 

『송이버섯은 「5호 관리소(노동당의 외화벌이사업소)」 관리 물품이라 따는 즉시 갖다 줘야 합니다. 관리소에 주면 송이 1등품 1kg을 30~50원 정도 값을 쳐 주거나, 기름·밀가루·사탕가루 등을 조금 주는데, 그것도 제때 나오지가 않을 때가 많아요. 중국 상인에게 파면 1kg당 5000~6000원의 값을 받기 때문에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중국 상인에게 팝니다』 

許씨는 국군포로가 식량난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국군포로는 나이가 많아서 연로보장이나 배급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끊어진 지 오래기 때문에 앉아서 굶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용군 출신은 郡黨에서 확인증을 가지고 가면 은행에서 연로보장비를 우선해서 내주기 때문에 그나마 생활형편이 조금 낫다고 한다. 

―한국에서 원조물품을 보내 주는 것은 알았습니까. 

『돈이 오는지 쌀이 오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2000년 이후에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았나요. 金大中 정부가 金正日에게 많은 돈을 주었는데요. 

『설사 원조물품이 들어와도 배급을 기업소가 담당하기 때문에 제대로 배급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아오지 탄광에 강냉이 30t이 내려오면 기업소 지배인과 당비서 둘이 앉아 「채탄공은 7일분, 굴진공은 10일분,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닷새분」 하는 식으로 결정해 버려요. 위에서 원조물품 다 떼어먹어도 일반 사람들이야 알 도리가 없습니다』 



arrow.gif돼지에게 죽 먹이는 黨 간부

―한국에서 파견된 정부 관계자들은 배급이 제대로 되는지 보고 왔다고 하는데요. 

『사람이 떼로 굶어 죽는 함경도 같은 곳에서 확인을 해야죠. 배급 잘나오는 평양 모란봉 구역에서 백날 보고 오면 뭣합니까』 

간부들과 안전원·군대가 모두 장사에 나서기 때문에, 간부들은 오히려 옛날보다 살기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許씨는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 어느 당 간부는 집에서 돼지에게 싸라기 죽을 먹이며 나이든 머슴까지 부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998년 중국에서 동생을 만나고 들어온 許씨는 그때부터 보위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북한으로 들어온 지 10여 일 만에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에서 동생을 만나고 온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許씨는 은덕군 보위부 부부장에게 불려 갔다. 보위부 부부장은 許씨가 가지고 있던 중국 인민폐 3210원을 빼앗았다고 한다. 許씨가 빼앗긴 인민폐 3210원은 북한 돈으로 환산하면 8만원 정도로, 이는 시장에서 쌀 약 1.5t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보위부 부부장은 許씨에게 『돈을 준 것을 비밀로 하라』고 했다. 이후 보위부에 수시로 불려간 許씨는 꿇어앉은 채 조사를 받았다. 보위부는 특별히 물어보는 것도 없이 벽을 보게 꿇어앉혀 놓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반복했다고 한다. 

3개월 후부터는 보위부가 許씨를 부르지는 않았으나 감시원(지역담당 보위지도원)을 붙여 놓고 감시했다고 한다. 



arrow.gif동생 만나 귀환

許씨는 『나에게 감시가 이렇게 심한 것은 같이 생활하던 국군포로 양순용씨가 한국으로 갔기 때문에 보위부는 「국군포로들은 기회만 되면 북한을 탈출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許씨는 집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는 보위부의 지시에 온종일 집에만 있어야 했다고 한다. 

2000년 7월5일, 許씨에게 중국에 동생이 나와 있다는 소식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許씨는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이번에 중국에 나가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에 연락책을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동생이 많이 아프다. 형님을 꼭 보고 싶어 한다. 내가 꼭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결국 許씨는 그를 따라 나섰지만, 이번이 마지막 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許씨는 밤을 틈타 두만강을 건넜고, 北京에서 동생을 만나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우리가 웃으며 뛰놀 수 있는 것, 재물을 모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라를 지켜 주는 국군장병들 덕택입니다. 우리 정부의 고위 간부들은 항상 국군장병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취재/월간조선 기자 이상흔 (200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