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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본교리.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2.

Joyfule 2021. 11. 19. 09:53


 

 

     기독교 기본교리.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2.

 

 김명용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Ⅱ. 일체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함께 거하심

요 10:3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 말씀은 이미 삼신론이 잘못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서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서를 떠나서 사변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 사변으로 치닫게 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의 계시에 철저하게 입각된 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요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의 ‘하나’를 이해할 때도 사변을 하면 안 된다. 이 ‘하나’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이 ‘하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성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떠나 괴상한 구조를 끌어들여 사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도요한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스스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문을 유념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7~11)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라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이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행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은 어느 곳에서도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한 분이라고 말하지 않다는 점이다. 요한의 말씀의 핵심은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다라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부는 어디 계셨을까? 성부께서는 성자와 함께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성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성자는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셨고,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고난인 동시에 성부의 고난이었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잉태하신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출생하셨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동안 그 분 안에 계셨고 그 분과 함께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기괴한 사실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두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론은 세 분 하나님의 존재만 설명할 뿐 이 하나님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일체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만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골 1:1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요한복음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골2:9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바울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과 요 14:10의 요한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 의미가 완전히 동일하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건임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고 깊은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가슴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교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각에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기술했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온전히 거하셨던 역사는 오순절 이후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거하시는 역사로 변천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따라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3. 하나의 신성(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기초해야 되는 교리이다. 그것은 또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상호 간에 일어나는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리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사변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사변적 형태로의 잘못된 발전의 핵심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의 괴상한 논리로의 발전이다.

한 분이 세 분이 되고 세 분이 한 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괴상한 논리로 무장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주로 서방 교회에서 발전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의 기본 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도식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곧 세 분이신데 같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325년의 니케아신조가 성부와 성자와 신성의 동일성을 언급했고,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의 동일성을 천명한 것이다. 이 정신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영향을 미쳐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세 분 하나님의 신성의 동등성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다.

325년의 니케아회의의 주역이었던 아타나시우(Athanasius)는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성부의 신성에 비해 성자의 신성의 열등성을 주장했던 아리우스(Arius)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는 두 분이신 신이지만 태양에서 빛이 나올 때 그 빛은 태양의 빛과 속성이 동일한 것처럼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은 같은 하나의 신성이고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샘에서 물이 흘러 하천을 이룰 때 샘물의 속성과 하천물의 속성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런 까닭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

삼위일체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은 서방 교회 일각에 나타나고 있었던 삼위일체론의 양태론적 경향을 언제나 비판했다. 고대 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역동적 단일신론이든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든지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 몰트만(J.Moltmann)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정통 신조를 만들어낸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하나님이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한다. 이 사귐의 삼위일체론 가운데 독특한 것 중 하나는 나치안스의 그레고리(Gregory)가 언급한 가족형 삼위일체론이다. 나치안스의 그레고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의 가족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갑파도키아 교부들의 맏형격인 가이샤라의 바실(Basil)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갑파도기아 교부들은 세 분이 한 분이 되고 한 분이 세 분이 되는 괴상한 논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원래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인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 즉 세 하나님의 신성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신성의 교류를 통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세 분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본질(우시아)을 실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 된다.

4. 한 하나님(One God)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과 세 하나님들(3 Gods)이 있다는 말을 같은 말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은 세 인격체(3 Persons)를 지칭하는 말이지 삼신론을 의미하는 세 신들(3 gods) 혹은 세 하나님들(3 Gods)로 생각하면 안된다.

삼위일체론을 형성시킨 신학의 교부들은 하나님이 세 분(3 hypostasis)이라고 언급했지만 세 하나님들이 있다고는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들이 있다는 표현에 대해 한결같이 반대하면서 오히려 한 하나님(One God)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역사는 언제나 하나이다.

그리고 한 분의 삶과 역사 안에 언제나 세 분의 삶과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인 동시에 성자의 영광이고 성령의 영광이다. 즉, 하나의 하나님이란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신 전체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