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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본교리. 세가지 경건훈련.(구제)

Joyfule 2022. 12. 29. 00:47



 

 

 

     기독교 기본교리.세가지 경건훈련.(구제)

 

세 가지 경건의 훈련-구제, 기도, 금식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경건[敬虔, godliness, piety]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자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반응이며,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려는 진지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있는 신앙인의 전 존재와 인격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하지만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들 안에 있는 경외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는,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새겨져 있는 거룩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즉 형제들을 향해서 사랑하고 진심으로 의를 행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내어놓는 자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간절한 그리스도인의 열망입니다. 경건은 세속적인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또한 과부와 고아,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약1:27) 경건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서, 또한 그분의 선하신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진지하며 동시에 열정적으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오셔서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시며 진정한 경건의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세에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도 불경건하고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로마 가톨릭을 진정한 경건이 살아있는 생명의 종교로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도 독일에서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각성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를 다시금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딤후3:5) 영혼이 빠진, 사랑이 빠진 경건의 행위는 무의미하며, 하나님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경건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세 가지 경건의 훈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이 세 가지의 경건의 훈련은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 칙칙한 율법적 종교가 되게 하거나 형식적이고 경건의 모양만 가진 신앙인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서도 경건의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교만으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신앙의 독소입니다. 경건을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여러 가지 의식과 훈련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경건은 외적인 의식을 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러움을 얻으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주위에 있는 작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습니다. 이 본질을 잃어버린 경건은 경건이 아니라 불경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은 불경건입니다.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죄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23:27) 겉은 회칠이 되어서 반짝 반짝 거리지만 그 안에는 뼈만 가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에 종교지도자라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못했습니다. 그는 경건의 의식만 행할 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23장 전체를 통해서 외식하는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7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외식하는 신앙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깊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외식은 신앙인이 빠져들 수 있는 늪과 같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을 가지는 것보다는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외식에 빠진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자보다 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함이라도 있지만, 외식하는 신앙인은 불신의 죄에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가장하는 부정직함의 죄가 추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극한 불경건과 위선인 외식적인 신앙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것이 탄로나 더욱더 극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얻게 될 이러한 가증스러운 일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경건한 척 하는 그들의 삶이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종교적 지위를 유지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말씀을 듣는 것은 좋지만 실천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10:10)고 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고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씀을 실천하는데 따르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쓴 잔을 회피하고 달콤한 부활의 영광만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십자가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입만이 아니라 전 존재가 참된 경건으로 물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경건을 훈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해서 배워 진정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고 했습니다. 경건의 훈련은 우리의 현재의 삶뿐 아니라 다가올 삶에도 풍성한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1. 구제

본문 /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잘못된 구제

유대인들은 3가지를 통해서 경건을 훈련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구제와 기도, 금식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행했던 경건을 위한 세 가지의 중요한 훈련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경건해지기 위해서는 올바른 구제, 기도,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경건에 이를 수 있는 법을 힘써 배워야 합니다. 그 가운데 먼저 구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구제에 대해서 지적하시며, 우리의 구제가 보상을 바라는 구제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라. 그런 구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선행의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돕고자 하는 자들이여. 보상을 바라며 구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도와줄 때 보상을 기대하면서 구제를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구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유대인들과 같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잘못된 동기가 있지 않은지 깊이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마음과 동기로 구제하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면 가장 먼저 영혼 깊은 곳에서 사랑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무관심하게, 또는 매정하게 지나쳤던 일들이 하나 하나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도적질하던 자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던 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오히려 자신의 것을 비우고 희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변화요 전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원치 않고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는 모습으로 선을 행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남을 도울 때 반드시 보상을 받으려 하고, 또 누군가를 도우면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거나 자신이 도와준다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생색을 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그것을 조금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얼마나 주었는지 금액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절대로 보상을 바라며 구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복 신앙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뒤따라오게 되지만, 복을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이 단지 복만을 바라면서 교회에 나오는 자가 있다면 교회에 나오는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의 구제

교회의 3대 기능은 <말씀선포: Kerygma>와 <교제: koinonia>, 그리고 <봉사와 구제: diakonia>입니다. 이 3가지 사명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보상을 전제로 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봉사가 뒤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관념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행동으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나 보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될 때,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의 어려움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지만 잘못된 동기로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을 행하는 것을 놓고 슬퍼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나쁜 동기가 들어와 있을 때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면 동기마저도 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구제가 아름다운 구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구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자세하고 또한 온전합니다. 우리에게 정확하고 세밀하게 신앙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당에서 나팔을 부는 구제는 땅의 것이 되고 만다. 아름다운 것으로 열납되지 않으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지 않는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제는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할 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서서 나팔을 불어 자신이 구제 물품을 나누어준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나팔소리를 듣고 모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의 물품을 나누어 주었고, 또한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물품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영광을 얻으려고 유대인들이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구제는 그것 자체로 끝날 뿐, 아름답게 하늘의 것으로 승화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조금도 아름다운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고통당하는 형제에게 사랑의 깊은 세계를 전해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선하게 지어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따라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또한 서로 사랑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선행을 베풀면 받는 자도 기쁘지만, 전해주는 자가 더 기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바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선행을 행하면 영혼에 너무나 큰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받으십니다. 자녀가 착한 일을 하면 자랑스러운 자녀를 둔 것으로 인해서 부모가 더 기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할 때 반드시 "사람 앞에 칭찬 받으려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제는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경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약1:27)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받을 것을 전제로 하고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은 더럽고 추하게 퇴색되고 맙니다. 우리 안에 항상 남을 배려하고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우리 삶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근사해집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보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점의 티도 없이 순수한 동기로 구제를 행하고, 자신이 구제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마음과 삶을 결코 잊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새겨두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고 구제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가져야 할 지극히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무조건적을 형제를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