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본교리.세가지 경건훈련.(기도)
2 기도
본문 / 마6:5-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나님께 하지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를 할 때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이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기도는 사탄이 그 기도를 뚫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편지를 쓸 때 수신자를 분명히 해서 편지를 보내야 합니다. 그 이름을 정확하게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편지가 보내는 대상에게 정확하게 도착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를 누구에게 하는지, 받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를 정확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다 들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리지 않는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대상은 반드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천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이 들으라고 길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 기도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도를 듣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는 기도가 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교회안에는 진지함과 함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자유가 제한되어서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서도 안되지만, 진지함이 없이 자유만 넘쳐서 경박한 분위기가 있으면 안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는 교회는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합니다. 기도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정확한 법도를 따라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기도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식의 기도는 사람의 시선이 우선시 되는 기도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납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기도로 끝날 뿐 결코 하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도는 우리가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개석상에서 사람들이 시켜서 기도를 안할 수 없어서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조금도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은채로 마지못해 입술로만 기도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때로는 교인들이나 사람들이 들으라고 그들을 향해서 기도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자세를 다시금 깊이 있게 점검해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조용하게 기도하라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이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기도했습니다.(행3:1) 그만큼 정시기도는 경건의 훈련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쉬운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루 세 번의 정시기도는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시절에 왕궁의 자신의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을 통해서 하루 세 번 기도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단6:10)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 때부터 만들어진 관행이었습니다.(왕상8:35) 다니엘 이후로 하루 세 번의 정시기도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지키기에 힘썼으며, 자신의 신앙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원했던 바리새인들도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러 가는 도중에 큰 길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것이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서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인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과 깊이 호흡하는 기도입니다.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는 말 안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갈 수 없어서 멀리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죄인된 자신으로 인해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나가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식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움과 공로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교만한 기도보다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기도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긍휼을 구하는 기도였기에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놓으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만을 드러내는 말만 할 뿐 그의 기도에는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받으시지만, 먼저 우리의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를 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마음과 자세로 기도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멀고 어떤 이는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거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는 멀리 두고 어떤 이는 가까이 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만 들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듣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의 기도라도 다 들으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크게 기도한다고 들으시고, 작게 기도한다고 듣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이라고 들어주시고, 죄인이라고 듣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떠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지금 기도하는 자리에서 간절히,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는 깊고도 은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중세 시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에 반발한 원인은 '공로신앙'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공로, 즉 인간의 의로 하나님께 의로움을 받을 수 있다는 모든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공로신앙 속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공로신앙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롭다함을 받을 조건을 세웠고, 공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른 무엇을 덧붙일 때 복음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sola gratia), 믿음으로만(sola fide), 성서로만(sola scriptura)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위와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의만을 드러내는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기도는 너무나 차갑고 딱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며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세리보다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요1:12) 신앙에서 영접이 중요합니다. 영접은 믿음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혈통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입으로 그것을 시인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혈통으로 말미암은 구원,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말미암은 구원은 모두 불신앙입니다. 그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종교가 만들어내는 일체의 구원의 수단과 조건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말미암은 구원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구원의 수단과 조건들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확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교회에서 세례교인증을 받으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불순물이 우리의 신앙에 들어오게 될 때, 복음이 가려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고 어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에 설 때 항상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하시고, 우리의 진심 어린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동등하고 하나님 앞에 같은 거리에 있다. 너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 기도를 더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라고 더 기도를 은밀히 들으시는 것도 아니다. 항상 조용히 하나님 앞에 마주서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은밀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기도를 빼놓지 않고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심지어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던 기도의 제목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그리고 만약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가 될 때까지 낙망치 말고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큰 사랑을 주었지만 오히려 그 사랑을 외면하고 배반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영혼에 큰 상처가 되고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그런 아픔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과 영혼들에게 베풀었던 진실한 사랑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사람과 같은, 아니면 더 좋은 사람을 찾아서 열매맺게 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희생이 사라지거나 공중에 흩어져 버리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으며 기도하면 언젠가 다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신 응답을 붙들고 더욱더 항상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통성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신앙을 가진 자들은 통성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의 호흡이 짧아서 오래 기도하기가 어렵고, 묵상하며 기도하다가 잘못된 생각이 스며들어와서 기도하며 딴 생각을 하기도 쉽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잠들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통성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외식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또한 중언부언하며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말만 앞서고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형식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는 주문과 같은 기도입니다. 당시 헬라 종교의 기도문은 기도를 드리는 신의 호칭을 최대한 많이 열거함으로써, 그리고 이방 종교는 대체로 그 신에게 드리는 제물의 귀함이나 자신의 선행을 상기시킴으로써 기도에 앞서 신의 관심을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기도의 만남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항상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쉽게 끊기거나 전혀 의미없는 말들로 나열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 믿음과 사랑이 있는 오랜 친구에게는 언제나 깊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고,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기도를 드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사여구를 많이 넣어 엄숙하고 근사하게 기도한다 할지라도,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지 않으면 의미 없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입술로만 기도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계셔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어린 마음의 기도와 찬양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한 기도를 통해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훈련에서 깊어져서 참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고 온전한 경건에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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