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의 세속화 세속의 기독화.
황우 목사 백낙원.
다소 거창한 제목 같지만 이런 현상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많이 겪어서 잘 아는 사실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금세기 들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급속하게 세속화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 내가 처음 교회에 다닐 때만 해도 교회당에 신발을 신고 들어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신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님이 결혼식을 할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다는 것, 교회당에서 그 어떤 영상을 본다는 것 등등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 기장에서 가장 먼저 교회당에 의자를 들여 놓고, 신발을 신고 교회당엘 들어갔더니 이단이라고 온통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요즘에는 이런 것들이 아주 보편화 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반면 세속의 기독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찾을 수가 없는 듯하여 안타깝기 짝이 없다. 기독교의 세속화와 세속의 기독화의 옳고 그름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이 시간에는 내가 목회를 할 때 있었던 사실 몇 가지를 예로 들면서 위 제목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려 하는 것이다.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예배시간에 찬송가 외에 다른 복음송가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박수를 치는 것도 이단시 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일로 말미암아 핀잔을 듣는 일은 아마 없는 것으로 여긴다.
예배 시작 때에도 “다 같이 묵상기도 하시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라는 멘트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묵상기도가 불교의 기도법에서 유래 된 것이라 해서 비교적 쓰지 않는 것이 상례인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무리 불교의 용어라고 해도 이미 기독화 되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묵도”라는 단어를 사용 못할 용어는 아닌 듯하다.
그리고 나의 목회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강단에 조그마한 서양 종 하나 올려놓고 “딩동” 하고 울리고는 예배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목회 말기 즈음엔 서양종이 무게감도 없고 경박하게 보여 우리 전통 문화가 배어 있는 징을 서양종 대신에 사용하기로 했다. 금 두어 돈, 은 16돈, 기타 주석과 같은 것을 배합하여 주물로 부어 만든 큰 징을 제작하여 강단에 올려놓고 예배시작 때 울리곤 했다. 그랬더니 일부 신자들이 불교의 상징이며, 무당의 상징물인 징을 왜 강단에서 치느냐고 원성이 자자했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을 했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올겐, 피아노, 기타 같은 악기도 서양에서는 빠나 술집에서 술손님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용하던 악기였는데, 우리 기독교가 그 악기들을 예배에 사용하므로 인하여 이제는 명실공이 예배 악기가 된 것처럼, 아무리 무당이 사용하는 악기이고, 불교에서 사용했던 악기라고 해도, 우리가 다시 빼앗아 와서 우리 악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좀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드럼까지 예배악기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 외에도 북을 비롯해서, 거문고, 아쟁과 같은 그 어떤 악기라도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 되 찾아와야 할 것이다.
다윗은 시편 150 : 3-6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사용하지 못할 악기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설파함에 있어 사용하지 못할 그 어떤 학설도, 이론도, 논리도, 경전도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 하겠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이방 신들에게 빼앗겼던 것들이나 잃은 것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학설이나 이론, 학문, 심지어 타 종교의 경전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참 신지식이 없다면 참신이신 야훼 지식과 신앙을 불어 넣어 생기를 찾게 하여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기독화가 아닌가 여긴다.
(2011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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