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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 무엇이 문제인가? (1)

Joyfule 2014. 9. 5. 05:53

 

 

 

기복신앙, 무엇이 문제인가? (1)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교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들어와 세력을 확장하게 된 이유는, 세상의 복을 얻고 싶어 하는 수요와 이를 조건으로 교회를 키우고 성도를 불리고자 하는 공급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사업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면 회사는 사업에 성공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며, 돈을 주고 상품인 서비스를 산 고객들은 만족하게 생각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랑하여 날이 갈수록 이 사업은 번창하게 되었음을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세상의 사업의 원칙과 다르다.

아무리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잘 맞는 일이라도 수요자의 목적이나 공급원의 서비스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허망한 일이다. 그렇기에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세태 속에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속성을 잘 이용하여 대형교회의 CEO가 되어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삯꾼목자의 교묘한 유혹에 올바른 교회들도 물들어가고 있다. 마치 양파 망 속에 양파 한 개가 썩어 가기 시작하면 다른 양파들도 전염되어 썩어가며 오래지 않아 양파 전부가 썩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기복신앙은 위험도와 전염성이 높아 건강한 교회를 쉽게 물들고 썩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병이라도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하는 시간과 노력이 절약되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듯이, 기복신앙의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심각한 폐해를 곰씹어보는 시간이 있어야 이의 해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복을 구하고 빌기만 하면 받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일부를 발췌하여 전체의 뜻인 양 들이대며 말한다면, 이를 판단할 성경지식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목사의 권위를 무조건 인정하는 교인들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어 부자가 되고 성공케 하여 형통하게 살게 해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이루고 싶은 축복의 말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기복신앙의 특징은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한다.

현대인들이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부자, 성공, 승진, 출세, 자녀의 형통, 지병의 치유, 건강, 행운 등 말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것들의 특징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얻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들이다. 기복신앙은 이러한 세상의 복을 얻는 방법으로 복을 비는 행위에 국한하고 있고, 치성을 드리는 노력의 정도가 잣대가 되어 복을 받을 수 있는 순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하고 다리에 마비가 올 정도로 오랫동안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복이 오는 척도는 여러 가지이지만 기도를 하는 기간을 얼마나 오래 잡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간절히 원하는 소원성취를 위해서는 석 달이 넘게 걸리는 백일기도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치성을 드리는 행위 이외에도 돈을 얼마나 드리느냐에 달려있다. 오늘 신문에 로또 복권에 당첨시켜 준다는 무속인의 말에 속아 무려 14억 원을 사기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처음에 점지해준 번호가 틀리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엄청난 돈을 무속인에게 주어가며 당첨번호를 얻으려했다는 것은 일반인의 생각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무속인이 치성이 부족하다며 더 많은 돈을 요구해도 빚을 얻어가며 주게 되는 것은 치성의 정도에 따라 복이 온다는 기복신앙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기복신앙처럼 현세적인 복을 우선으로 하지도 않을뿐더러, 복을 비는 치성의 정도에 따라 복을 주신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해 1 -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기복신앙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종교의 특징은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며 극한 상황에서 수행을 하여야 도를 터득하거나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티베트 라마교의 승려, 힌두교도, 부두교의 신봉자들은 오랫동안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 기도하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괴롭게 하면서 기도하거나 춤추는 행위들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도 득도를 하기위해 사용하는 기도방법인 장좌불와(長座不臥)는 벽에 기대지도 않고 눕지도 않은 채 오랜 기간 기도하는 자세로서 보통의 인내와 극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방법이다.

요즈음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이 본떠 하는 행위 중에 삼보일배(三步一拜)라는 것이 있다. 이는 원래 불교의 수행법으로 세 걸음을 걷고 한번 절을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극도의 상황을 초래하여 몸을 괴롭게 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간절함을 호소하여 사람들이나 신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의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기도함으로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즈음 ‘삼천번제 기도회’라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삼천번제의 기원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 소원을 묻자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받아 지혜뿐 아니라 부와 명예도 받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천번제는 삼천일 동안 계속해서 삼천 번이나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수천마리의 양과 소를 번제물로 드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삼천일의 기간을 정해서 저녁마다 기도회를 갖는 다. 삼천일이라면 무려 삼년 가까운 기간인데,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며 교회의 성전건축이나 부흥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소원을 빌고 응답을 받기위한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삼천번제라는 기도회의 제목에서 타 종교나 기복신앙에서 행하는 천일기도나 백일기도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기도원 등에서 볼 수 있는 ‘40일 작정 금식기도’는 분명 인간이 가진 식욕의 본능을 억제하며 배고픔을 이겨내며 온전히 기도에 매달려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다른 기도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하루 금식하는 것보다는 3일 금식이 더 효력이 있고, 3일 금식보다는 7일이 더 나으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한 기간인 40일이 최고의 기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배고픔을 참아내며 금식을 오래할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기도하는 장좌불와나 삼보일배, 백일기도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보채도 효력이 없자 땅바닥에 뒹굴면서 억지를 부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런 논리라면, 금식기도에 탁월한 능력이 있거나 극기와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들만이 기도응답을 잘 받는 비결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약 4:2~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     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 복을 빌고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구하는 것은 아무리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응답이 없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보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기도한 행위가 허망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이다. 기복신앙은 열심히 기도만 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온전한 하나님의 뜻은 열심히 기도하는 행위에 있기보다 구하는 목적이나 동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해야 한다.  

오해 2 -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드리면 복이 온다.

적지 않은 성도들에게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뜨거운 감자이다. 마땅히 드려야 하지만 드릴 수 없는 상황도 있고, 아끼고 쌓아두어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수입의 10%를 드리는 십일조는 살을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어디 그뿐이랴? 명칭도 제각각인 선교헌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을 모두 다 합하면 수입의 20~30%를 웃도는 가정도 있다.

소득에서 이들을 제하고 나면 생활비가 빠듯한 게 현실이다. 게다가 자고나면 치솟는 물가에 허리를 휘는 자녀의 사교육비는 살인적이며, 주택대출 이자에 신용카드를 막기도 벅찬데 저축하며 노후대책을 준비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손이 쪼그라들어 겨우 체면치례만 할 뿐이다.

그래서 십일조나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할 때면 몸이 움츠러들고 죄책감에 얼굴을 못 든다. 이러한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목사님은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면 하늘의 복이 넘치도록 내려와 부와 성공의 반열에 설 수 있다고 큰소리로 외친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복이 내리는 지 시험해보라고까지 하셨다고 하면서 더욱 목청을 높인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십일조를 가장 열심히 냈던 사람들은 누구일가? 그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아마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대회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이 탁월한 성적으로 우승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수입이외에도 가족들이 먹으려고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에 이르기까지 꼼꼼한 규정을 만들어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칭찬은커녕 가혹한 책망을 듣는 당사자들이 되었다.

물론 예수님은 이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린 행위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와 더불어 믿음과 성품과 동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잣대에 따르면 십일조를 내는 행위만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단상에서는 다른 말은 없고 오직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만 유독 강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십일조나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넘치도록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리 없다. 그렇지만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는 금액이나 기간에 따라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마음이나 성품과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여기에 기복신앙과의 차이가 있다.

기복신앙은 드리는 사람의 동기나 성품, 믿음에 관계없이 풍성한 제물을 차려 그들의 신을 즐겁게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를 주관하는 무당에게 후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이들은 재앙이나 불행을 벗어나거나 사업의 성공, 회사에서의 승진, 선거의 당선, 자녀의 명문대학에 합격을 바라는 복을 얻게 하기위한다면 더 많은 돈을 들여 제사상을 차리고 제물을 올려놓으면 된다고 한다. 오직 그들이 섬기는 신은 돈을 많이 들이고 상이 떡 부러지게 차려 좋으면 기뻐할 뿐이지 복을 비는 사람의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십일조로 가져 온 돈이 불법적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모으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벌어드린 돈이나 부자나 성공을 위한 탐욕의 목적으로 가져온 돈이라면 아무리 큰 액수라도 하나님은 외면하신다.

그렇지만 이를 받는 적지 않은 교회나 삯꾼목자들은 이러한 것을 굳이 따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많은 돈을 가져온 손만을 칭찬하고 교인들에게 선전해주어 더 많은 이들이 이에 동참하기만 바란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면 허망한 돈이 되며, 교회를 부자로 만들어주어 담임목사를 유명하게 해주고 교회건물을 더 크고 짓거나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아무리 목회자의 입에서 축복의 선포가 우렁차게 나올지라도 아무런 효험이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해 3 - 목회자를 잘 섬겨야 한다.

필자는 평신도 시절에 목회자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치고 교인들을 올바르게 이끌기 때문에 이들의 말을 잘 듣고 가르친 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통한 복이 내려오는 길인 것도 틀리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의 진위를 잘 살펴서 판단하고 잘못되고 어그러진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스포츠 신문에 무속인들이 점을 치거나 사주팔자를 보아주는 광고에 실려 있는 글들을 보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해서 큰돈을 벌거나 엄청난 행운을 얻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무속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귀신들이 부와 행운을 점지해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 행위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다. 그들에게서 부자가 되고 행운을 얻는 비결은 다른 게 없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속인들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무당들의 주변에는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싸들고 와서 정성껏 섬기며 큰 복을 받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들에게 그 용한 무당은 신과 다름이 없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이다. 이처럼 만물의 영장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무모하고 어리석은 면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정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잡신과 귀신을 섬기는 무당들은 애초부터 비교대상이 아니다. 무당들이 섬기는 귀신들이 행하는 것은 아무런 원칙이 없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은 차치하고 괴팍스럽고 변덕스러워 그 뜻을 받드는 무당조차도 곤혹스러워 할 정도이다. 그래서 귀신이 시키지 않는 일을 무당 스스로가 지어내도 이를 알 수 없다. 아무런 원칙도 기준도 없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하나님은 이와 다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알려 이를 책으로 지은 것이 성경이며, 신비하고 특별한 일을 시행하더라도 이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하신다. 그래서 엄청난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변에서 떠받들더라도 성경에 어긋나게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성경에는 선지자를 선대하라고 되어있지만 이는 모든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기본적인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정성껏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연한 행위이겠지만, 목회자의 말을 잘 듣고 정성껏 섬기는 행위 자체가 복이 오는 통로는 아니다. 목회자가 하는 말이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가르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 솔선수범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것과, 교회를 지도하고 성도들을 이끄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잘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상이 교회 내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교사상의 근간으로 유서 깊은 가부장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최고의 자리는 임금이므로 신하와 백성은 충성을 맹세하여야하며, 집안의 우두머리의 자리는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 내려온다. 그래서 집안에서 아버지의 말은 그대로 법이 되었다. 아무도 불평을 할 수도 없고 거역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집에서 내쫒기는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유교시대의 가부장적인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 내에 어른의 자리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목회자에게 자연스레 내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이기 때문에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불평하지 않고 잘 듣고 따르는 것이 교회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 손수 만든 유전(遺傳)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이 만든 유전을 더 열심히 지켰다고 책망을 하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또 다른 원인은 구약시대의 제사장제도에서 연유한다. 구약시대에 성전을 섬기는 일은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레위자손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이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며 관리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성전에 가져오면 이들을 대신해서 제사장들이 제사법에 알맞게 제사를 드려주었으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섬길 수밖에 없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구약의 제사법과 제사장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고 이제는 모두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며 스스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다. 즉 목회자가 대신 기도를 드려주며 예배를 대신 드려주지 않는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신학과 목회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정해진 경험을 쌓아 안수를 받아 교인을 가르치며 교회를 관리하는 전문직일 뿐이다. 평신도나 목회자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열이 없이 동등한 신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잘 섬기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복이 내려온다는 말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말에 불과하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