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기아 다소 - 사도 바울의 고향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사도 바울이 태어나서 성장했던 다소(행 22:3)는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약 900㎞지점의 지중해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당시는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지중해에서 15㎞의 내륙에 위치한 도시이다.
다소는 소아시아(터키) 남동쪽 해안 길리기아 관구에 있는 도시이며(행 9:11, 30; 11:25; 21:39; 22:3), 길리기아 지역의 주요 도시이다.
바울의 생가와 우물
이 도시의 위치는 선사 시대에 건설된 이래 현재까지 변화된 적이 없었으며, 6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의 고도”로서 주전 3000년경에 요새화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육로만 아니라 키드누스강의 하류에 있는 항구를 이용한 해로도 있어서 주전 2300년경 트로이의 초기 활동시대 당시, 해안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전 2000년경 힛타이트 제국의 기록에 의하면, 길리기아 키주와트나(Kizzuwatna)국으로 등장했을 때, 다소는 ‘타르사(Tarsa)’라는 이름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이기도 했으나, 주전 1200년경 해양 민족(그리스인들)의 침략을 받아 파괴되었다.
주전 858년부터 824년까지 앗수르 황제인 살만에셀 3세의 공격을 받았으며, 그의 공적비인 블랙 오벨리스크가 세워지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다소에서 앗수르 구체적인 활동은 산헤립(주전 704-681년) 때였다. 페르시아 통치 시기 다소에 관해서는 상세한 증거자료가 없다. 다만 주전 401년 고레스 원정 기록에 시엔네시스 왕의 궁전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주전 333년 다소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알렉산더가 구했고, 그 이후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이 통치하면서 헬라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테스(주전 175-163년)는 다소를 헬라의 자치 도시로 만들었고,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했다.
로마가 통치하던 시기에 다소는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길리기아 지방의 정치적 수도가 되었으며,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소시의 학교들은 이 지방의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문헌 학자들은 로마에 가서까지 가르치기도 했다.
이곳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들 중 스토아 학파의 안타파터(Antipater), 라키데머스(Rachidemus), 네스터(Nestor), 아테노도러스(Adenodorus), 말커스 카토(Marcus Cato)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바울이 자신의 고향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행 21:39)이라고 자랑한 것으로 보아 바울이 살던 시대에 다소가 누린 정치, 경제, 학문의 발전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다소의 높은 문화 속에서 바울이 태어났고(행 21:39; 22:3), 교육을 받았다. 이당시 다소 시민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살고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가 주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칭호)에 의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로마의 권세를 누렸을 것으로 본다(행 22:28-30). 후기 로마 시대 이후에 다소의 역사는 많은 부흥과 쇠퇴를 거듭한 후,
베야지트 1세에 의해 오스만 터키 제국에 병합되었다.
다소의 특수 산업으로는 직물과 천막 제조업으로써 그 원료는 길리기아산 아마였고, 천막 제조 재료는 킬리시움이라 불리는 염소털의 직물이었다. 당시 천막제조업은 바울을 통해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행 18:3). 또한 풍부한 광물자원과 목재는 무역에 대한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다소의 고고학 발굴 지역은 ‘고즐루쿨레’라 불리는 언덕에 있는 유적지이다. 이 지역의 북쪽 경사진 곳은 로마 시대에 극장을 건축하기에 편리했다.
오늘 날 당시의 중요한 도시 건물들은 현재의 도시 아래 묻혀 있다. 이 도시에 아고라(광장), 주랑(여러개의 기둥만 나란히 서 있고 벽이 없는 복도), 큰 거리, 다리, 공중 목욕탕, 샘, 경기장, 체육관, 레슬링 도장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현재까지 발견되지는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수도관, 목욕탕, 성문은 모두 비잔틴 시대와 아랍 시대의 것들이다.
1947년 새 법원 건물의 지하에서 모자이크로 장식된 거대한 로마 시대의 건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로마 시대의 건축물의 중요한 유적은 이중 주랑의 신전으로 추측되는 건물의 거대한 기초 부분이며, 이 신전의 대리석 상부 구조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 신전의 콘크리트 골격은 “사다나팔루스의 무덤”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누크 타쉬(떨어진 돌)”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의 다소의 기독교 유적으로는 바울이 출생하여 성장하며 살았다는 바울의 생가가 있고, 그 뜰에는 “바울의 우물”이 있다.
다소에는 예전에는 허름한 동네에 있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단장한 바울의 생가터와 우물이 있다.
이곳에서 바울이 태어났으며, 이 우물물을 마시고 자랐다고 한다. 우물은 큰 바퀴를 돌리므로 도르래를 움직여 함석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우물의 깊이는 38m이다. 우물 주위에는 바울의 생가의 터가 평지보다 내려앉은 상태로 발굴된 주춧돌들이 자리 잡고 있고 유리로 차단막을 세워 생가터의 훼손을 막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전승들은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사도의 그림자를 그려주고 있다.
클레오파트라 문
클레오파트라의 문
주전 41년 이집트의 여오아 클레오파트라는 지중해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을 방문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줄리어스 시이저를 유혹하여 자신의 보호자로 삼았으나 그가 암살당하자, 안토니우스 장군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다소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왕위의 표상이 되는 온갖 여왕의 장신구들을 장식하고, 제2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같은 모습으로 방문했다.
다소에서 이 두 사람의 낭만적인 만남은 그 후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다소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 문은 그녀의 다소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3) 사도바울 기념교회
다소의 한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교회당 내부는 봉쇄된 아치와 4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당 실내의 둥근 천장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고, 북서쪽 끝에는 예쁜 종탑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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