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김용기 장로

Joyfule 2018. 9. 9. 04:29

  

김용기 장로


● 막사이사이상과 삼베옷

 

지난 1966년 8월,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나안 농장으로 서울의 5대 일간지 지프차들이 들이닥쳤다. 막사이사이상이 아버지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한참이나 시달림을 당하고 나서야 정식으로 수상통보를 받았다. 막사이사이상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아버지가 탄 상은 ‘사회공익상’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농사만 짓는 늙은 사람에게도 상을 주는 세상을 보려고 내가 ‘임금’이나 ‘평양 시장’을 못했던가 싶어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60 평생에 넥타이나 구두를 몸에 대지 않고 살았다. 아무리 엄숙한 자리엔 가더라도 고무신에 코르덴 바지 차림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아버지의 ‘수수한 차림’을 소문으로 들었는지 ‘반드시 예복을 가져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바침 예복이 있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그곳까지 입고 갈 옷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큰 맘을 먹고 서울로 ‘나들이 옷’을 맞추러 갔다. 아버지는 필리핀이 더운 나라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대문시장을 찾아가 고운 삼베 두 필을 천이백원씩 주고 떴다.

그리고 이왕이면 크고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옷을 짓겠다고 명동까지 나왔다. 상탄 김에 큰 맘을 먹고 근사한 ‘자자라사’라는 양복점에 들어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양복점 점원이 앞을 막아서면서 “어디서 왔소?”라며 아버지의 아래 위를 불결한 물건 대하듯 훑어보았다. “집에서 오지 어디서 와. 자, 이걸로 옷 한 벌 지어주소.” 그는 아버지 손에 들린 삼베 두 필을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영감님이…. 여긴 한복집이 아니예요. 한 벌에 7만원짜리 옷을 짓는 데예요. 빨리 나가슈.” 그렇게 거지 동냥쟁이 내쫓기듯 세 군데의 양복점에서 쫓겨나온 후 우리는 천호동에 있는 노동복 짓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선 대환영이었다. 우리는 한 벌에 오백원씩 주고 삼베옷을 맞췄다.


비행기를 타고 수상식에 참석하러 갈 때, 우리는 신던 고무신을 깨끗하게 닦아서 신고, 가방에다 속옷 몇 벌과 두루마기를 넣고는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돈은 필리핀에서 다 대기로 되어 있으니 한 푼도 필요없다고 해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공항대합실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과 친지들이 모여 있었는데, 우리 부자가 삼베 양복을 입고 들어서자 “저 양반이 왜 저러는 거야? 나라 망신을 시키고 싶다는 건가?”라는 소리와 “고무신을 신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그 가운데에 양복을 쏙 뽑아 입은 청년 하나가 나서더니, “선생님 고집이야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드님은 저게 뭡니까?”라며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는 “얘야, 떳떳하게 고개를 들어라.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는 왜 숙여. 정신차려라”하고는 그 사람 앞으로 갔다.


“이보오 젊은 양반, 나도 값비싼 좋은 양복과 구두가 좋다는 건 알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나는 국민소득이 65달러밖에 안 되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고무신을 신고 삼베옷을 입을 처지밖에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삼베옷이 어떻습니까? 내가 듣기로는 필리핀이란 나라는 몹시 더운 모양이던데, 이 옷이 얼마나 시원하고 위생적인지 아십니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 옷차림에 대한 공격을 잠재울 수 있었다.

 

● 당신들이 묵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비행기를 처음 타시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비상구가 나 있는 자리로 가서 무조건 앉았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아버지는 살아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떤 역경에 처하거나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아버지의 길이 탄탄하게만 잘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한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비행기에서 빠져나와 헤엄이라도 쳐야 하니까 제일 빠져나오기 쉬운 비상구 옆에 앉은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외국인들은 우리 부자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도쿄의 하네다 공항에 내렸는데, 필리핀행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에 있었으므로 시간은 아주 넉넉했다.


그래서 구경도 할겸 공항 청사 안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50여 명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국제공항에 삼베옷을 입고 새까만 고무신을 신은 데다가 키도 작고, 얼굴도 시원찮게 생긴 사람이 다 낡아빠진 가방을 들고 어슬렁거리니까 심심하던 차에 구경거리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냥 있을 사람인가.

“자, 난 맘이 좋아서 돈은 안 받으니 구경이나 실컷 해라”하고 그들 앞에 버티고 서셨다. 만약 마음을 찍는 엑스레이로 사람들의 마음을 찍어서 그곳에 진열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었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탄 우리는 마닐라에서 온 안내원이 예약해 놓았다는 긴자의 도쿄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곳은 일류 호텔인데, 정말로 그곳에 가실 겁니까?”

우리의 허름한 행색으로 봐서는 그곳에 묵을 형편이 못된다 생각했기 때문인지 재차 물었다.

“그곳에 가자고 하는데 왜 자꾸 묻는 거요?”

그제서야 마지못한 듯 차를 몰았는데, 이번엔 호텔을 100m쯤 남겨두고는 다시 서는 것이었다.

“저쪽인데….”

“저쪽이라면서 어쩌란 말이요. 어서 그곳까지 갑시다.”

거의 우격다짐으로 호텔까지 왔는데, 그 다음이 또 문제였다. 호텔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호텔 종업원이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나는 내심 일류 호텔은 뭐가 달라도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호텔 종업원의 말이 가관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당신들이 묵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백 미터만 내려가시면 깨끗한 하숙집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시지요.” 호텔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가 끝난 다음에야 나는 여권을 내보였다.

그러자 그 종업원은 사색이 되어서 우리 부자에게 수없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 아닙니다.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서자, 손에 태극기를 든 우리 교포들에게 둘러싸였고, 순식간에 꽃다발에 파묻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들은 막사이사이상 수상위원회 영접원들의 안내로 세단차에 올라타고 그곳 경찰 사이드카의 경호 속에서 마닐라 호텔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촌스러운’ 여장을 풀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필리핀 주재 대사가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우리 부자의 행색을 살피며 물었다.

“선생님, 예복은 가져오셨겠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가방을 열고, 아버지가 스무살 장가갔을 때 할머니께서 해주신 모시 두루마기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자, 여기 예복을 가져왔습니다.”

대사는 가방에 넣어 구깃구깃해진 두루마기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뭡니까? 예복을 가져 오셔야지. 두루마기를 가져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국가를 대변하는 사람이 우리나라 예복도 모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낼 때 두루마기를 입고 지내고, 정월 초하룻날 부모님께 세배를 드릴 때에도 두루마기를 입습니다. 그런데 대사님께서 지금 입고 있는 새까만 옷이 우리나라 예복입니까? 그 옷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자기나라 예복입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예복이라고 입고 다니니 참 큰일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니까 그 대사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식장에는 3천여 명이 모여서 다섯 나라에서 온 다섯 사람의 수상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두 번째로 상을 받았다. 그때 시상하던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고 들어가자, “한국 예복은 제가 처음 본 것 같습니다”하며 신기해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두루마기를 입고 외국에 가신 선배님들은 많았지만 그냥 윗옷 대신에 입은 것이지 국제적인 큰 예식에 두루마기를 예복으로 입은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이유서가 읽혀질 때 고마우신 ‘우리 주께’ 마음 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사람에게 제9회 막사이사이상의 사회공익상을 주는 이유는, 아시아 한반도의 출생으로서…. 농촌 개발에 큰 뜻을 품고 농촌 생활의 차원을 높였다. 그리고 이 사람은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왼손에 성경과 바른손에는 삽을 단단히 쥐고 두 발로 굳세게 땅을 딛고 서서, 머리는 하늘에 두고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큰 나무와 같이 살았으므로…. 아시아의 후진성을 탈피시킬 수 있는 생활인으로서 산 교재가 되었으므로 이에 사회공익상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올라가게 하리라.”

아버지는 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농장’을 만들고 그 안에 ‘농군학교’를 세웠다. 공평은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 되므로, 가진 사람이 나누어 갖는 공평이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동안 삼천 차례가 넘는 대중 강연회를 가졌었고 지니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나누어 갖고 싶은 마음에서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때때로 비 뿌리는 농장의 밭두둑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는 하늘이 고맙고, 젊은 날의 방황을 빨리 끝내게 해 준 하늘이 고마워서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누가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아닙니다.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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