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반 쥑입니더 - 정성화
서울 사람에게 '부산 사투리' 하면 뭐가 떠오르느냐고 물었더니, 영화 '친구'라고 했다. 거칠다는 의미다. 곽경택 감독은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 배우 장동건에게 부산 사투리를 가르쳐서 "내가 니 시다바리가?"를 천연덕스럽게 읊도록 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시비조로 말하는 그는 영락없이 부산 사람이었다.
부산으로 이사 왔을 때 내가 받은 느낌도 그랬다. 대구 말에 비해 부산 말은 억양의 높낮이가 더 크고 드센 표현이 많아, 도시 전체에서 말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뭐?" "와?" "마!"같은 한 글자의 말도 꽤 위협적으로 들렸다. 이런 말을 할 때 어떤 이는 나의 위아래를 주르륵 훑어보며 안면 근육까지 실룩거렸다. 부산살이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근래에 '펀치'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힘 있는 스토리 전개와 배우들의 명품 연기에 매료되어 한 회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중 검찰총장이 쓰는 부산 사투리가 압권이었다. 평소에 우리 옆집 아저씨도 쓰고 나도 쓰는 말이 분명한데 드라마에서는 더 생생하게 들렸다. 삶의 경구가 담긴 함축적인 표현,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화법 등, 이 모든 것을 부산 사투리가 너끈히 받아내었다. 시시하다며 한쪽으로 밀쳐둔 내 옷을 우리 집에 놀러온 옆집 친구가 멋지게 입어 내었을 때의 놀라움과 같은 것이었다.
요즘 다른 지역에서는 부산 사투리를 배우려는 모임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부산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부산의 초등학생들에게 실시한 '부산 사투리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일상적인 부산 사투리를 아이들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떠리미(떨이)는 '다리미'로, 빼뜰다(뺏다)는 '삐뚤다'로 알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부산말을 쓰지 말고 서울말을 쓰라고 한다는 것이다. 장차 아이가 서울로 진학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 서울말을 익히게끔 하는 것 같다. 부산 아이들이 부산 사투리를 잘 모른다고 하니, 이러다간 우리 다음 세대로 부산 사투리가 전승되지
못하고 서서히 잊혀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사투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사투리가 담고 있는 그 지역의 정서와 문화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드라마 '펀치'를 쓴 작가와 영화 '친구'를 만든 감독은 둘 다 부산 토박이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부산과 부산 사투리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우러나와 있다. 60년 전통을 가진 곰탕집의 곰탕처럼 말이다. 진정한 '고향 사랑'이란 이런 게 아닐까. 나의 경우에는 아직 필력이 부족하여 수필 속에 부산 사투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부산 사투리를 살려 부산 말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대담에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도로 표지판 대신, '단디 보고 가이소'라고 써 보자고. 분야마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가 나온다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부산은 '살아 있네!'와 '쥑이네!'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희한한 도시다. 싱싱한 회 한 점 입에 넣고는 그때 기분에 따라 하나를 골라 외치면 된다. 그래도 알아듣는다. 부산 사투리가 해운대나 태종대 못지않게 또 하나의 멋진 관광 상품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부산 사투리 들으러, 우리 부산 가자"며 관광객들이 계속 모여들어 내가 사는 부산이 참으로 부산스럽게 되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새 양복을 한 벌 마련했다.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입고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우떻노?" '잘 어울린다'는 대답 대신 나는 얼른 이렇게 말했다. "얼반 쥑입니더!"
- 출처 : 부산일보 20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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