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예찬 - 박완서
내가 마당에서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친지들은 외국 나갔다 올 때 곧잘 원예용 도구들을 선물로 사오곤 한다. 모종삽, 톱, 전지가위, 갈퀴등은 다 요긴한 물건들이지만 너무 앙증맞고 예쁘게 포장된 게 어딘지 장난감 같아 선뜻 흙을 묻히게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전지가위 외에는 거의 다 사용해보지 않고 다시 선물용으로 나누곤 했다.
내가 애용하는 농기구는 호미다. 어떤 철물전에 들어갔다가 호미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손에 쥐어보니 마치 안겨오듯이 내 손아귀에 딱 들어맞았다. 철물전 자체가 귀한 세상에 도시의 철물전에서 그걸 발견했다는 게 마치 구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감동스러웠다. 호미는 남성용 농기구는 아니다. 주로 여자들이 김 맬 때 쓰는 도구이지만 만든 것은 대장장이니까 남자들의 작품일 터이나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 호미질을 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감탄을 새롭게 하곤 한다. 호미질은 김을 맬 때 기능적일 뿐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흙을 느끼게 해준다. 마당이 넓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버려진 굳은 땅을 씨를 뿌릴 수 있도록 개간도 하고, 거짓말처럼 빨리 자라는 잡초들과 매일매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고 싸움질도 하느라 땅 집 생활 6,7년에 어찌나 호미를 혹사시켰던지 작년에 호미자루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대신 모종삽, 가위 등을 사용해보았지만 호미의 기능에는 댈 것도 아니었다. 다시 어렵게 구한 호미가 스테인리스로 된 호미였다. 기능은 똑같은데도 왠지 녹슬지 않는 쇠빛이 생경해서 정이 안 갔다. 그러다가 예전 호미와 같은 무쇠 호미를 구하게 되었고, 젊은 친구로부터 날이 날카롭고 얇은 잔디 호미까지 선물로 받아 지금은 부러진 호미까지 합해서 도합 네 개의 호미를 가지고 있다. 컴퓨터로 글 쓰기 전에 좋은 만년필을 몇 개 가지고 있을 때처럼이나 대견하다.
원예가 발달한 나라에서 건너온 온갖 편리한 원예기구 중에 호미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는 보면 호미는 순전히 우리의 발명품인 것 같다. 또한 고려 때 가사인 '사모곡'에까지 나오는 걸 보면 그 역사 또한 유구하다 하겠다. 낫처럼 예리하지 않은 호미의 날[刃]을 아버지의 자식 사랑보다 더 깊은 어머니 사랑과 빗댄 것은 고려가사 치고는 세련미는 좀 떨어지지만 그 촌스러움이 오히려 돋보인다. 지금도 그런 호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는 예전엔 왼호미라는 게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왼손잡이가 흔하지 않아서 그런지 서양에 비해 왼손잡이에게 불친절한 편이다. 그러나 호미만은 왼손잡이용이 따로 있었다. 호미질을 해보면 알지만 살짝 비틀린 날의 방향 때문에 호미는 절대로 오른손 왼손이 같이 쓸 수 없게 돼 있다. 극소수의 왼손잡이까지 생각한 세심한 배려가 호미날의 그런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호미에 대한 예찬이 지나친 감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고작 잔디나 꽃밭이나 가꾸는 주제에 농사 기분을 내보고 싶은 속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골 출신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다. 그런데도 죽기 전에 한 번을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글줄이나 써가며 편안하게 살아왔으면서 웬 엄살인가 싶고, 또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꿈도 망상도 아니라 순전히 유전자 때문일 듯 싶다. 대대로 시골에서 겨우겨우 먹고살 만한 농사를 지으면서 그래도 남자들은 입신양명의 꿈을 못 버렸던지, 혹은 학문이 좋았던지, 주경야독(晝耕夜讀 ) 을 사람사는 도리의 기본으로 삼았고, 여자들은 요새 여자들 핸드백처럼 늘 호미가 든 종댕이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김매고, 밭머리건 논두렁이건 빈 땅만 보면 후비적후비적 심고 거두던 핏줄의 내력은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꽤 집요한 것 같다.
- 박완서 산문집 [호미]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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