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죄죄한 얘기 - 윤모촌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을 앞에 세워 놓고도,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가 태연히 앉아 간다."
윤모촌 선생님의 작품 15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변하지 않은 세상때문에 지금도 공감이 가는 글이지요.
이작품을 읽고 나의 노년에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젊은이들에 짐이 되지않고 살아질까..
숙제같은 느낌으로 여운이 짙게 마음속에 그늘지어옵니다.
꾀죄죄한 얘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을 앞에 세워 놓고도,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가 태연히 앉아 간다.
경로석은 공경하는 자리가 아니라 가볍게 여기는 경(經)로석이 된다.
젊은이를 일으켜 노인을 앉힐 때가 더러 있으나, 자의(自意)로 내준 자리가 아니라서 서로가 편치 않다.
그래서 간혹 노약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젊은이를 보면 마음이 밝아지는데,
이런 마음은 얼마 안가 다시 무너진다. 노인을 외면해서 고개를 외로 꼬거나
눈을 감고 가는 젊은이 때문에, 밝아졌던 심기가 다시 흐려지는 것이다.
붙여 놓은 표지의 뜻을 모를 리 없고 보면, 서 있는 노인을 못본 체하는 것은, 노인이 받는 형태의 새로운 구박이 아닐 수 없다.
몇 해전만 해도 나는 자리를 내주는 젊은이가 달갑지 않았다.
나이를 낮추어 말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사진만을 공개하는 이도 있으나,
나도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한 <아저씨>로도 보이지 않는 탓인지,
초간한 거리를 서 가게 되면, 빈 자리가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즈음에 와서는 이런 몰골의 나를 내가 의식해서 인지
경로우대증으로 무임승차를 하는 노인이 유달리 눈에 들어온다.
서 갈 밖에 없는 버스를 타면, 그래서 경로석에 앉아가는 젊은이를 피하게 되는데 늙수그레한 사람 앞이 아니면,
아예 좌석이 없는 문쪽을 향해 설 때가 있다.
어쩌다 젊은이 앞으로 밀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다.
경로석 사정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리를 내주는 젊은이에게,
한 마디쯤의 답례는 있을 법한데, 표정하나 없이 앉은 늙은이를 보게 되는 것은
더욱 편치 않다. 자리를 내준 어린 학생의 가방 무게조차 헤아릴 줄 모르는
경로석은, 그런 점에서도 부담이 된다. 경로에 관해서는 이제 시비거리가 못되가는 듯 싶은데,
경로석이 노인의 자리임은 누구나가 안다.
그러나, 이 경로석을 정중히 내주는 것이 아니라 앞에 와 서는
노인을 보고 달아나는 것인지 내주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하는 젊은이가 있다.
앉으라는 말없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면 재수가 없다는 태도로 밖에 볼 수 없다.
노인이 서 있는 정거장에서는 서지도 않고 통과하는데 불쾌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경로 잔치에라도 다녀오는지 일군의 노인들이 우루루 몰려 무임으로 승차할 때는 운전기사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푸대접을 받느니 차라리 요금을 내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것은 이래저래 구차한 일일 밖에 없다.
나는 아직 경로우대증을 지닌 나이는 아니다.
언젠가는 창경원(창경궁)에 갔을 때, 무엇하러 오래 사느냐고 하는 젊은 취객과 시비를 벌이는 노인을 보았다.
우대증 때문에 푸대접을 받고,
경로석 표지 때문에 노인 심기가 불편하다고 한다면, 참으로 경로석은 청할 바가 아니다.
경로석은 분명 늙은이의 자리이다.
그런 자리를 남의 자리로 알지 못하는 젊은이가 있는 한,
소란을 떠는 민주화 구호는 그저 멀게만 느끼는 구호이다.
좀도둑도 승용차를 모는 시대에,
버스의 경로석 타령이나 늘어놓은 것은 아무래도 얘기가 꾀죄죄하다. (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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