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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낫과 왜낫 - 목성균

Joyfule 2015. 4. 10. 08:16

 

 조선낫, 최고의 명품으로 거듭나다

 

조선낫과 왜낫 - 목성균


 

조선낫과 왜낫이 낫이라는 사실만으로 동류인식(同類認識)될 수는 없다. 꼭 국적(國籍)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외양처럼 판이한 그 성품 때문이다. '조선낫은 진중하고 왜낫은 경박하다.' 조선낫에 대한 편향적(偏向的) 지적일까. '조선낫은 미욱스럽고 왜낫은 지능적이다.' 그리 말하니 조선낫을 천하게 보는 것 같아서 싫다. 그러면 상식적 사실대로 말하자. '조선낫은 무겁고 왜낫은 가볍다.' 사용의 효율성에 착안한 연장의 상반(相反)된 차이가 국민성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조선낫은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무쇠를 녹여서 벼려 내는 수제품이다. 대장장이의 솜씨에 따라 낫의 모양이나 성질이 가지각색이다. 모양새가 뭉툭하던가, 넓적하던가, 날이 좀 무르던가, 좀 강하던가 대장장이의 이력과 성격을 물려받아서 개성적이다. 조선낫은 장인정신이 깃든 물건이다. 그래서 내 것이 되면 내 식구처럼 애착이 간다. 김 서방 네 조선낫은 김 서방 네 식구 같고, 박 서방 네 조선낫은 박 서방 네 식구 같다.

 왜낫은 공산품이다. 주물공장에서 기계의 자동공정으로 만들어지는 획일적인 제품이다. 대장장이의 정신이나 애착의 망치질과 담금질 같은 손맛은 전혀 들이지 않았다. 몰개성적이다. 김서방 네 왜낫이나, 박 서방 네 왜낫이나 똑같다.


 조선낫은 베고 찍는데 같이 쓰이지만 왜낫은 베는데 밖에는 쓸 수 없다. 조선낫은 베는 것은 물론 나무도 일격에 목질부(木質部) 깊숙이 찍는 우직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가벼워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턱없이 무거우면 다루기 불편하다. 마침맞은 낫의 체중, 조선사람 체신만 하다. 낫 날은 강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품성을 지녀야 한다. 나무를 찍을 때 날이 강하면 한 낫질에 이가 빠지고 무르면 욱는다. 낫 날은 사냥한 동물의 숨통을 끊는 호랑이의 어금니같이 지긋이 파고드는 끈질기고 굴함 없는 힘과 가격(加擊)의 저항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날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대장장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안이다. 장인의 경지에 이른 대장장이나 할 수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낫은 반드시 새벽밥을 해먹고 이화령 너머 문경 장에 가서 벼려 왔다. 연풍장에도 대장간이 있었는데 대장장이가 젊었다. 선친이 작고하고 가업을 물려받은 지 얼마 안되어서 중용의 낫 날을 세우기에는 아직 미숙했던지, 굳이 낫은 문경장 대장간의 대장장이가 잘 벼린다고 인권(引勸)하고 사양했기 때문이다. 그 겸양의 미덕이 장인이 될 자질일 수 있다. 조선낫이 나무를 찍는다고 왜낫도 나무를 찍으면 경거망동이다. 왜낫은 경박한 체신에 팩하는 성미만 살아서 가격했을 때의 저항충격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낫으로 나무를 내려치면 마치 방정맞은 개가 금방 삶아 낸 호박을 덥석 물었을 때처럼 낫날의 이빨이 몽땅 빠지고 만다. 왜낫은 처음부터 나무의 절단은 고려한 바가 없다. 잘 벨 수 있는 날카로운 날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농작물 거둠질에 제격이다. 날의 냉혹성, 왜낫을 보면 찰과상이 우려된다.

 
 왜낫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일본의 강점기에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이주해 온 일본농민들이 들고 왔을 것이다. 그리 보아서 그런지 조선낫은 흰 무명 중위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은 조선농민 같고, 왜낫은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은 일본 이주농민 같다.

 헛간 시렁에 조선낫과 왜낫이 뒤섞여 있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모습 같아서 꼴 보기 싫었다. 나는 굳이 조선낫과 왜낫을 격리해 놓곤 했는데 몇 일 후에 보면 다시 뒤섞여 있었다. 내 배타적 감정과 무관하게 왜낫의 편리성은 이미 토착화되어 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말수가 없는 머슴이 있었다. 그는 가볍고 잘 드는 왜낫을 안 썼다. 벼를 벨 때 다들 왜낫을 들려고 덤비지만, 그는 "나는 왜낫은 헛개비 같아서 싫어, 손아귀에 쥐는 맛이 있어야지-." 하며 투박하고 무거운 조선낫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낫질이 거칠다면서 벼를 베어 나가면 다른 사람 배는 베었다. 그의 말대로 낫질이 거칠어서 이삭을 흘리고 벼 그루터기의 높낮이도 일정치 않았지만 한다는 장정의 두 몫은 베었다. 왜낫을 든 장정들이 질투를 느끼고 '그렇게 거친 낫질을 하면 나도 그만큼 벨 수 있어-.' 하며 덤볐지만 당나귀 호말(胡馬) 따라가기지, 어림도 없었다. 우리 머슴한테 덤빈 장정들이 "대체, 낫질 어떻게 허는 겨-? 맘대로 안되네." 줄항복을 하고 새삼스럽게 우리 머슴 낫질하는 걸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 머슴은 겸손하게 "낫 힘이어-," 했다. 맞는 말이다.

 조선낫의 힘은 찍는데 만 쓰는 것이 아니다. 베는데도 힘을 발휘했다. 왜낫은 순전히 날로 베지만 조선낫은 힘으로 벤다. 벼를 벨 때 두 포기 씩 모아 쥐고 베는 게 보통이나 장정들은 세 포기씩 모아 쥐고 벤다. 조선낫으로 베면 '투,투,투'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한 낫질에 세 포기가 수월하게 베어지는데 왜낫으로 베면 '착,착,-' 하는 날카로운 두 음절을 내고 세 음절은 침묵으로 버티기 일쑤다. 왜낫의 경박한 체신에는 가속력을 발휘할 근력(筋力)이 모자랐다. 그럼 얼른 자동차 기어 변속하듯 새로운 힘을 보태 주어야 '착'하는 나머지 소리를 내며 세 번째 포기가 베어졌다. '착,착, (-) 착'이다. '투,투,투'에 비해서 리드미컬하지 못했다. 낫질의 리드미컬한 진행과 그렇지 못한 진행이 일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조선낫 같은 사람이 조선낫을 쓸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해 늦가을 해거름에 신태인에서 부안 쪽으로 가다가 동진강 둑에 서서 해가 뉘엿뉘엿 지는 휴면기(休眠期)에 든 일망무제의 빈 들판을 보았다. 동학군의 함성과 선봉에선 녹두장군의 위용이 노을이 불타는 지평선에 아른거리며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국모가 시해(弑害)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토지조사를 하는 일본인들의 측량말뚝이 들판에 꽂히고,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오는 등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일본세력 앞에 속절없이 침몰되었을 들판의 가없는 넓이가 저무는 강둑에 서있는 나를 슬프게 했다.

 태인과 신태인은 이 들판 외곽에 자리잡은 두 소읍(小邑)이다. 문득 '태인은 조선낫이고 신태인은 왜낫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척회사(東拓會社)에서 이 들판을 식민자본으로 헐값 매입해서 일본 이주민에게 되팔았다. 영세농들은 모두 일본 이주민의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생산한 쌀을 전부 일본으로 실어 갔다. 쌀을 실어 가기 위해서 호남선 연변에 역이 생기고 역 앞에 역촌(驛村)이 생기므로 기왕의 태인과 구별해서 신태인이라고 이름지었을 것이다. 태인에는 들판을 뺏긴 조선낫 같이 우직한 조선사람들이 물 떨어진 물꼬의 물고기처럼 모여 살고, 신태인은 왜낫같은 일본 이주민들이 득의만면(得意滿面)해서 신주거지를 형성했으리라.

 도대체 이 넓은 들판의 벼를 무슨 수로 다 베었는지 궁금했다. 지금이야 콤바인으로 베지만 그 시대에는 순전히 낫으로 베었을 것이다. 조선낫으로 베었을까. 왜낫으로 베었을까. 조선사람은 벼를 베고 일본 이주민들은 논둑에서 감독을 했을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우리 머슴처럼 조선낫으로 벼를 베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 이주민들은 "이 무지한 조센징아-. 가볍고 잘 드는 닛본 낫이노로 베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조선낫이고 왜낫이고 손목에 신명이 빠진 농군들이 무슨 수로 낫질할 힘이 났으랴. 낫의 무게도 잊어버리고 휘몰아치는 낫질은 논둑에 '農者天下之大本'의 농기를 꽂아놓고 농악을 울리며 노동의 기쁨을 고양할 때나 할 수 있다. 일은 신명으로 하는 거다. 그 때 일본사람들이 보았으면 "야-. 조센징이노 일 참 무섭게 잘이노 한다. 무거운 조선낫을 꼭 관우가 청룡도 쓰듯이노 한다."며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조선낫을 보면 나운규가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미치광이 영진이가 생각난다. 영진이가 일본경찰관의 앞잡이인 악덕지주 오기호를 응징할 때 휘두른 낫이 조선낫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낫을 보면 과묵한 참을성의 폭발력이 느껴져서 나는 지긋이 낫자루를 잡고 '참아, 부디 참아-. '하는 맘이 들곤 했다.
1920에서 1930년 사이, 동척회사의 수탈에 항거해서 독립운동 성격인 소작쟁의가 발생했을 때, 농민들의 무기는 조선낫이었을 것이다. 왜낫이었으면 "어허, 사람이노 다친다."면서 일본 이주민들은 대수롭지 안은 듯 슬금슬금 피했겠지만 조선낫 앞에서는 혼비백산해서 "사람이노 살려-."하며 줄행랑을 쳤을 것 같다. 과묵한 참을성의 폭발과 경박한 적의가 파르르하는 것은 위협의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낫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감정적인 편견이다. 조선낫과 왜낫이 우리 헛간 시렁 위에 뒤섞여 있는 걸 내선일체의 모습으로 볼게 아니라 왜낫의 귀화(歸化) 모습으로 보는 게 올바른 투시법(透視法)인지 모른다. '무겁다'의 반대말이 '가볍다'라면 조선낫과 왜낫은 상호보완의 여지가 있다. 낫이라는 동류로 인식하는 것이 타당하지 배타적인 생각이나 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그렇다하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는 경박하고, 냉혹하고, 이지적인 날을 세운 연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베는데 쓰이는 것 자체가 싫다. 국모를 시해한 닛본도의 가차없는 날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