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향을 맡으며 / 천 하영
보세란 꽃향기가 온 집에 가득하다. 봉오리가 맺히면서부터 차분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바라보길 일주일. 드디어 소리도 없이 줄줄이 꽃망울을 터뜨리니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온 듯하다. 집 안 뿐만 아니라 내 몸에도 향이 배어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우리 집에는 이런저런 난들이 모여 스무 분이나 된다. 멀리 제주에서 온 한란, 밀양에서 온 춘란도 있지만 중국산 보세란이 절반쯤 된다. 처음엔 난 화분을 어떻게 관리해야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강한 햇볕을 받지 않도록 굵은 발을 드리우고, 한여름엔 너무 덥지 않게 겨울엔 얼지 않도록 해주었더니 몇 년째 꽃을 피워 그저 고맙기만 하다. 알고 보니 난은 키우기가 까다로운 식물이 아니라 절벽이나 고목에 뿌리를 내린 풍란이나 석란처럼 의외로 환경에 잘 순응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활짝 핀 보세란, 정초에 꽃을 피우므로 새해를 알린다는 뜻으로 ‘보세’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겨울의 끝자락인 이맘때쯤 꽃을 피우니 내겐 봄을 알리는 ‘보춘란’인 셈이다. 대개의 동양란은 잎이 가늘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데 반해 잎이 약간 넒은 보세란은 우아함과 유연함은 덜하지만 꽃과 향기는 어떤 난에도 뒤지지 않는다.
봄이 가까이 다가오듯 보세란의 푸른 잎 사이로 실하게 올라온 꽃대엔 자주색 꽃이 줄지어 피었다. 한 꽃대에 많으면 열 송이까지 매달리고, 송이마다 가린 세 개의 꽃잎이 제비가 날아가듯 날렵하게 벌어져있다. 한가운데의 둥글게 말아 올려진 순판엔 짙은 자주색 점이 꼭꼭 박혀있어 정교한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잎에 비해 너무나 잘은 꽃은 단아하고 고귀하기까지 하다. 거기다 결코 강렬하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까지 품고 있으니 꽃 중의 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란이라 부르는 열대성 심비디움이나 덴스로비움의 꽃은 크기가 아기 주먹만하고 화려한 꽃색으로 눈길을 모으지만, 향기가 없어서 동양란에 비길 수 없다.
옛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산 속에 핀 난은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그 향기와 의연함을 잃지 않는 것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경륜을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 난을 닮은 군자의 길을 걷겠다는 기란조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난이 우릴 끄는 것은 꽃과 잎의 모양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향기라 할 수 있다. 향수의 진한 내음은 역겨울 때가 있지만 은은한 난향은 우릴 행복에 젖어 들게 한다. 조그만 난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은 지극히 작지만, 향기가 미치는 곳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합치면 열배 백배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눈을 감아도 느낄 수 있는 꽃. 그 향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문향(聞香)! 고요히 향기를 들음 무심히 꽃을 대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난이 피어 잇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난이 되었으면....
난 같이 맑은 향기를 지닌 사람을 ‘난향지인’이라 부르고 싶다. 기다린 꽃대에 곷이 한 단 한 단 질서 있게 피어오르듯 순리에 따르는 사람. 단아하고 기품 있는 꽃을 피우듯 온갖 가식과 사치, 번잡스러움을 모두 떨쳐버린 사람. 잎이 사철 내내 변치 않는 푸르름을 간직하듯 지조를 지난 사람. 그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세월을 견뎌내야 하듯 강한 생명력과 인내를 가진 사람. 난 향기처럼 세상을 순화시키고 인간다움을 일깨우는 이런 분들이 바로 난향지인이 아닌가 싶다.
난의 인내력과 은은한 향기처럼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은 인연을 이른바 ‘난향지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질화로의 불같이 은근하고 꺼지지 않는 관계, 오래 묵힌 포도주 같이 그윽한 사이,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삶을 향기롭게 만드는 인연일 것이다.
반야용선을 타고 사바세계를 건너길 염원하며 이끌고 도와주는 도반들, 묵향 친구들, 살아가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문우들, 이 모두가 나의 난향지인이며, 난향지교가 아닌가 싶다.
인고의 세월 끝에 곱게 피어난 꽃, 난. 나 또한 인생의 반을 지나고 보니 세월 속에서 우러난 나의 모습, 나의 향기를 갖게 되었으리라. 그 모습이 어떤지, 그 향기가 어떨지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나 간절히 소망한다. 향기로운 영혼의 소유자 난향지인이 되길.
적어도 난이 피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난이 될 수 있었으면.....
(1998년 창작수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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