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한적한 날이면 내 발걸음이 저절로 내닫는 곳, 갈대 숲 속 나라이다. 2천년 전의 그 나라로 가 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다호마을에 들어가면 2천년 전 낙동강 물결소리가 들려온다. 갈대숲이 바람에 휘날리며 내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집집마다 차(茶) 향기가 풍겨온다. 시인은 촛불 앞에 찻잔을 놓고 붓을 들어 시상(詩想)에 잠겼을까. 가을이면 시베리아에서 사나흘 간이나 날아서 낙동강으로 오는 철새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피리를 꺼내 불었을까.
2천년 전에 다호 마을에 살던 시인을 만나러 가면 왠지 나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다호 마을에 살던 시인의 집은 어디쯤이었을까. 작은 구릉지대를 이루는 다호마을 한 가운데에 서서 시인이 살았을 법한 공간을 찾아본다. 시인은 밤이면 별빛을 보며 머나먼 길을 날아 이곳으로 오는 청동 오리, 백조, 쇠기러기 등 새들의 날개 짓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갈대숲으로 내리는 오리 떼들을 붓으로 그리고 시를 쓰곤 하였을까.
집집마다 차를 끓이는 마을, 다호리(茶戶里. 창원시 동면)-. 2천년 전에 붓으로 시를 쓰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추측은 이곳의 무덤에서 다섯 자루의 붓이 출토(出土) 되었기 때문이다. 철새들이 머나먼 곳에서 사나흘 동안 날아서 찾아오는 곳은 가장 안락한 휴식처이자 이상향(理想鄕)이다.
다호리 마을 사람들은 비옥한 자연 환경으로 생계에 걱정이 없었기에 일찍이 차(茶) 생활을 즐겼으리라. 차 그릇으론 무문토기, 빗살무늬 토기였을까. 차가 있는 곳은 만남과 정담이 있고 삶에도 온기가 있기 마련이다. 차를 마시며 별의 운행과 철새의 행로, 인간의 삶을 얘기하였을 터이다.
갈대숲에 묻힌 한적한 농촌 마을에 불과했던 다호리가 옛 문명지로 드러난 것은 1988년 국립박물관의 발굴에 의해서였다. 다호리 1호분에 부장된 사적 제327호는 해발 20m 정도의 야트막한 구릉 아래로 너비 30~40m, 길이 150m가 넘는 범위에 걸쳐 있다. 발굴은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출토된 유물은 청동기·철기·칠기·질그릇 등이다.
다호리 고분군 유물 출토 당시에 나는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서 숨죽이며 현장을 지켜보았다. 무덤 속에서 붓이 다섯 개나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파 헤쳐진 무덤이 광명으로 가득 차는 듯 느껴졌다. 문명과 지혜의 빛이었다. 한반도 무덤에서 붓이 다섯 개가 나온 것은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천년 전에 문자를 사용하며 문화생활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무덤 속에 망자(亡者)와 함께 붓이 들어간 것은 다른 유물들과는 의미가 다르다. 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기록의 도구다. 붓은 정신과 창조를 뜻한다. 죽음과 한계를 뛰어넘는 무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붓이 있음으로써 망자의 영혼은 영원의 세계로 인도되리라는 염원이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시한성을 붓이 있어서 보완해 주고 있음을 느낀다.
다호리 고분(사적 제327호)의 주인공은 유물 출토로 보아 지배 계급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무덤에서 붓이 나온 것으로 보아 마을엔 학자와 시인도 있었을 것이다. 2천년 전엔 과연 어떤 문자를 사용하였을까. 아마도 상형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창원 동면 다호리
주남저수지 초입의 마을
철새 오지 않으면 적막한 곳
갈대숲의 나라
무덤 열고 나온 불멸의 말
원(原)삼국시대 다섯 개의 붓
2천년 무덤에서
깨어난 붓
철새와 갈대 잎 소리
집집마다 차 끓는 다호리 마을
2천년 전
붓으로 무슨 시를 썼을까
다호리 마을 시인
2천년 전
무슨 문자로 영원을 꿈꾸었을까
다호리 마을 사람들
다호리 고분에서 나온 붓 다섯 개
눈부신 문명의 신시
오, 불멸과 역사의 도시여
<졸시 ‘다호리의 붓’>
내가 시간만 있으면 다호 마을로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답답하면, 대화자가 없어서 허전해지면 그 곳으로 가서 슬며시 붓과 만나고 싶어진다. 다호리 고분에서 나온 붓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나는 붓이 무덤을 열고 나온 현장에 가서 마음으로 만나곤 한다. 붓과의 만남은 마음과의 만남이고 천년, 이천년이란 시,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영원과의 만남이다.
붓과의 만남은 2천년 전 시인과의 만남이다. 시인이 썼을 갈대의 노래, 강물의 노래, 차의 노래를 생각한다. 2천년 전의 붓으로 무덤이 삶의 종착지만이 아닌 영원을 꿈꾸는 공간이 되고 있음을 본다. 붓에서 영원의 숨결과 생명의 맥박을 느끼곤 한다.
다호 마을에 오면 집집마다 찻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2천년 전 낙동강 갈대숲을 상상하고 거닐면, 자작시를 읊는 2천년 전 다호 마을 시인의 버들피리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철새가 물속에 내려앉고 헤엄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차를 마시면서 방문을 열고 나를 부르거나, 피리를 불면서 손짓하는 이가 있을 듯도 하여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생각에 잠겨 걷곤 한다. 다호 마을은 2천년 시공(時空)과 만나는 신비 공간이다.
마음이 고적하면 평생을 시만 생각하며 살다가 시 한 편도 남겨놓지 못한 채 떠난 2천년 전의 다호 마을 시인을 만나러 간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쓸 만한 나이 - 송정숙 (0) | 2012.08.24 |
---|---|
특별한 축복 - 김현자 (0) | 2012.08.23 |
사과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 도월화 (0) | 2012.08.21 |
큰 나무를 찾아서 - 김순재 (0) | 2012.08.20 |
아름다운 노을을 그리고 싶다.- 서병태 (0) | 2012.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