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만한 나이 - 송정숙
중년쯤 된 여자들이 앉아서 낄낄거리며 외설적인 우스개를 즐기고 있었다.
“20대 성폭력범이 붙잡혔대. 폭행당한 상대는 70대 할머니였다는군. 할머닌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모르고 그랬다면서 범인이 버티고 있고 경찰이 다그치는 중인데 피해 할머니가 파출소 문밖에서 기웃거리더래. 범인이 너무 괘씸해서 피해 할머니가 그러나보다 싶어서 담당순경이 할머니를 보고 말했대. ‘할머니, 우리가 잘 조사해서 엄격하게 벌을 줄 테니까 안심하고 가 계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위로 겸 다짐을 해주었는데도 그 할머니가 다음날 또 왔더라는 거야. 그러고는 이번에는 바로 돌아가지를 않고 자꾸만 유치장 안을 기웃거리며 범인을 찾으면서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눈치더래. 그래서 담당경찰관이 다시 한 번 할머니한테, ‘집에 가서 계시면 우리가 단단히 조사를 하고 법적으로 처리를 할 텐데 왜 자꾸만 오시느냐?’고 물었대. 그랬더니 멈칫거리던 할머니가 말하기를, ‘경찰 나리. 그 젊은이를 조사하려면 현장검증이라는 걸 한다는데 그걸 하자면 내가 있어야 하지 않겠수? 그게 언제인지 알아야 노인정에서 가는 단풍놀이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도 정할 수 있을 게 아니우?”
이 대목에서 웃음들이 폭발하며 키들키들거린다. 재미가 있어 죽을 것처럼 웃어젖히는 것이다. 그 서슬에 이끌려 한쪽에 있던 나도 같이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70대 할머니? 그거 바로 나잖아!’
이 괘씸한 젊은 것들은 걸핏하면 ‘70대 할머니 할아버지’를 들먹인다.
그래. 나는 70대다. ‘젊은 것들’은 나이가 70대쯤이 되면 사람이 아닌 줄로 안다. 걸핏하면 70대 할머니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우스개가 많은 것도 그런 증좌이다.
하기는 그럴 것이다. 옛날에 나도 그랬으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70대가 되기까지 사는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리 오래 살까. 삶에 윤기가 없고 추해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런 나이가 되면 희로애락도 다 바래서 탈색한 마전한 옷감처럼 무색해질 터인데 그런 삶을 초라하고 무미해서 어찌 살까. 나는 그런 모습 세상에 보이지 말고 그 전에 사라졌으면 좋겠다. 의지로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 내 옆에서 낄낄거리며 저렇게 우스개를 즐기고 있는 ‘젊은 것들’처럼.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것은 그들을 키들거리게 만들며 들먹여지는 70, 80대 할머니에는 아직도 내가 속해 있지 않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내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아주 놀라운 것은 젊은 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70이란 나이가 살기에 그렇게 무색하지도 무미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사고(思考)에도 무디지 않고 감각의 피부가 그렇게 많이 이완되거나 낡아지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그렇게 후퇴하지 않을 만큼 머리도 몸도 꽤 쓸 만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그리운 사람이 기억날 수 있고, 아름다운 날들에 대한 기대가 마전해 놓은 빨래처럼 날아가 버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주변에서 내가 오래 살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의 수도 날로 줄어간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운 날들이 갈수록 심하게 노골화할 것도 짐작한다. 너무도 신산하게 젊은 날을 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뒤따르는 후생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애써온 지난날의 우리 삶이,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는 깃털처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고, 어디 다른 별에서 옮겨온 신인류처럼 그런 우리를 우습게 보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나이의 노년은 패대기쳐질 운명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이 소중하고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워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한다.
옛날에 우리 할머니는 노년에도 이야기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거기 계셨던 할머니는, 애초부터 할머니로 태어난 분인 것처럼 내게는 여겨졌으며, 이야기책에 나오는 ‘사랑’ ‘꿈’ ‘권능’ ‘희망’에 대한 것을 즐기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 이야기책이 재미있으세요?” 하고 여쭈면,
“그러엄. 재미 있다마다….” 하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괴테가 80이 넘어 10대 소녀에게 느꼈다는 애정이 거짓말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내게도 있다. 피카소가 80대에 어린 딸을 안고 희열에 차서 보여주던 표정이 좋게 보이지 않던 지난날도 나는 기억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금 와서 반성하며 생각한다.
더구나 젊은 날을 부정과 불평으로 생산적인 인생보다 파괴적인 삶으로 물들여 온 세력이 우리에게는 지금 너무 많다. 그들은 뒤따르는 후생을 마치 양아치처럼 만들어 수하에 두기를 서슴지 않고 기도(企圖)하는 세력이다. 그들에 이끌려 멋도 모르고 어른 우습게 아는 일에 날마다 길들여져 온 젊은이들을 보는 일이 우리는 너무 걱정스럽다.
그들도 곧, 아주 곧, 나이 많은 날을 맞을 것이다. 그런 나이가 되어 자신들이 지난날, ‘돼먹지 않은 젊은이였던 날’에 행한 일에 대한 자괴가 지금부터 우리에게는 너무 안쓰럽고 마음 쓰인다. 품위 있고, 생각 깊고, 교양 있는 젊은 날일수록 그 뒤로 아름다운 노년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점점 그런 노년의 세월이 길어질 징조는 우리 앞에 역연하게 드리워 있다.
70대도, 아마도 80대도 꽤 살 만한 좋은 나이이므로 그 세월이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도록 젊은 날을 소중하게 다스리기를 말해 주고 싶다. 그렇지만 여전히 낄낄거리며 성희롱 같은 우스개에나 취해 있는 그들에게 이런 낡아 빠진 담론이 들리기나 할까.
하기야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그들도 알아서 하겠지. 나는 내 앞의 삶을 갈무리하는 일이나 애쓸 밖에.
전 신문기자, 논설위원,
전 보건사회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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