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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를 찾아서 - 김순재

Joyfule 2012. 8. 20. 10:56

 

   큰 나무를 찾아서 - 김순재

성곽 위 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놀라움 그 자체였다. 큰 둥치는 말 할 것도 없고 사방으로 벋은 가지에 무수히 달린 잎새의 집합. 가히 아파트 한 동에 버금갔다. 느티나무였다.

 

나무는 화성(華城) 서문에서 북문으로 가는 어귀에 있다. 백 년, 아니 천 년을 묵었는지 아름드리 나무둥치 여섯 개가 연리지처럼 붙어서 하나의 둥치를 이루었다. 그 둥치에서 갈라져 나간 큰 가지만도 열 개가 넘는다. 말이 가지이지 가지 하나가 고목둥치 만씩 하다. 거기서 또 가지를 벋고, 그 가지에서 또 가지를 벋었다. 그런 나무가 동구나무처럼 푸근하게 품을 벌리고 섰는 것이 아니라 창공을 향하여 뻗쳐있다. 하늘에 닿을 듯 높다랗게 피워낸 울창한 숲, 중후한 밑동. 경탄이 절로 터진다.
화성은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2세기 전의 건축물이다. 그러고 보면 나무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고목들처럼 몸을 보수한 흠집도 없이 청정한 위용을 갖추었다.  

 

크기에 놀라고 밑동에 놀라서 멍하니 서있다가 나무를 안았을 때, 나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었다. 과거의 영광을 읊조리는 도도함이 아니라 현재를 완성해가는 거친 숨결이었다. 여럿을 모아 하나로 화합하고, 여럿을 모아 하나의 위업을 이루어가는 현재. 그 현재를 이끌어가는 힘찬 박동을 가슴 두근거리며 듣고 있었다. 삶은 과거나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다. 현재진행형이다. 노목(老木)의 거친 숨결은 현재에 대한 애정이며 책임이며 찬양이었다.    

이 나무와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비범한 존재 앞에 서있는 듯 하다. 신념에 찬 선각자 같기도 하고 기백이 넘치는 개척자 같기도 하다. 장엄한 침묵의 소리에 신뢰감이 차오르고, 질곡의 여정에서도 흠집을 남기지 않은 견결(堅決)한 행적에 스스로 굴복하고 싶어진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 나는 큰 나무를 찾아간다. 내 감정에 베이고 다쳐서 아플 때에도 찾아간다. 이런 저런 일도 아니고 슬며시 생각나면 훌쩍 보러 가기도 한다. 서울 살 때는 덕수궁 뒤뜰 회화나무가 있었고, 수원으로 이사 와서는 광교마을 4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그리고 성공회 수원교회당의 오스트랄리아 아카시아가 있다. 숫한 세월 동안 그들은 나의 쉼터가 되어 주었고 위로가 되어 주었으며 스승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새파랬던 시절 어느 날. 하늘색 투피스를 입고 덕수궁 회화나무를 찾았다. 머리에다 온통 천경자 화백의 꽃을 꽂고 하얀 장갑을 끼고 회화나무 아래 서있었다. 절망감으로 찢긴 가슴에 둘러 처진 모성의 울타리를 벗어 날 수가 없어서, 차라리 화관을 쓴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독한 술을 마시고 그 뒷 일은 모른다. 그날, 회화나무는 나를 품고 다독이며 순화의 눈물을 흘려준 어머니였다.
지금은 새파랬던 시절의 새파란 절망 같은 것은 없지만, 근원적인 질문으로 충돌할 때가 있다. 인생은 무엇일까. 종교는 무엇일까. 어릴 적에는 단순했던 질문이 복잡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 인생 끝자락엔 찬란한 깃발이라도 휘날려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글자도 깨치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 순탄하고 감격에 넘쳤던 길을 이제는 비틀거리며 간다. 종교에 대한 회의라기보다 종교를 전달하는 여러 매체에 대한 질문이 복잡하다. 모순덩어리인 삶. 수용하기 힘든 종교매체의 양상. 어떻게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성공회 교회당 계단 옆에 서있는 오스트랄리아 아카시아는 참으로 아름답다. 푸른 이끼를 두른 아름드리 허리를 수굿이 구부리고, 겸손하게 나뭇가지를 벋고 있다. 이 나무도 교회 역사와 함께 한다면 100년을 늙었다. 흡사 겸허한 성자의 모습이다. 좁은 공간인데도 베어버리지 않은 신도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나무 밑에 들어서면 나무를 따라서 내 자세도 낮아진다. 설교를 듣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가득 찬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냥 조그마한 성당, 오래된 나무 몇 그루. 아담한 분위기. 이러한 것들과 어울려서 나를 더 없이 낮아지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역 할 수 없는 절대자의 권위 안으로 들어가 순하게 엎드린다. 다시 그물에 씌워서 발버둥칠지라도 이 나무 밑에서만은 복잡했던 질문이 편안해진다. 큰 나무의 카리스마인지 모르겠다.
내가 큰 나무를 찾는 것은 흠모 할 큰 사람을 만나고 싶은 잠재된 그리움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적 자아를 향한 잠재된 갈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보다는 지식의 회색산물을 깨부숴버리고 원시의 미개로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슈퍼맨을 그리는 환상일지 모른다.  

지금, 성터를 지나는 바람에 울창한 느티나무 숲이 흔들리고 있다. 잎새가 뒤집혔다 바로 됐다 할 적마다 연록과 진록의 빛으로 뒤섞인다. 그렇다고 사시나무나 버드나무처럼 가지가 요동하고 이파리가 헤닥헤닥, 희옇다 푸렇다 까부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태연 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뿐이랴. 천둥번개 내리치는 폭풍우에도 저 모양 의연(毅然)할 것이다. 뿌리가 깊어야 큰 나무가 된다 했다. 그러한 나무는 실용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서 면으로도 사람에게 큰 유익을 끼친다. 오산 <물 향기 수목원> 산림전시관 앞에 서있는 노거수(老巨樹)는 500년을 살고 고사(枯死)한 것이지만 보존가치가 있어서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남양주시 보호수 1호였던 느티나무) 절반이 시멘트로 메어진 등걸만 남았어도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 주목(朱木)이라는 나무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이라 하지 않는가. 한 그루 나무만도 못한 인간 존재의 한계가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