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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바라보며 -

Joyfule 2020. 7. 29. 04:44


 [기고]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나라사랑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바라보며 -

김상모 미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2007-07-23 07:01]

  • ▲김상모 목사

이승만은 미국서 39년 체재, 미국 귀화 거부
그의 독립정신, 참 애국심 높이 평가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2번 없어질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한 이승만 건국대통령!
지금 3번째 좌경화 된 조국을 누가 구해 낼 것인가?

“민족” “통일” “자주” “주권” 이라는 공산당의 상술 용어에 세뇌된 신세대들.

6.25는 대한민국이 먼저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우겨대는 한심한 젊은이들.
역사를 통 채 바꾸어버린 괴물.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노예” 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건국이념,
바른 애국사상을 높이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언할 역사적 책임을 진다.


-김상모 미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뉴욕기념사업회 회장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39년 동안 체재 내지 망명해 있으면서 미 국무성의 시민권 취득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국적자로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승만을 체포하면 수십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과 미주 그리고 중국 등 해외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한 그의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존칭을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인물사 연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사건의 연월일까지 가급적 상세히 밝힌다.

이승만은 1904년 11월 29일 처음 하와이에 도착한다. 그가 미국에서 정치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그는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1905년 2월에 죠지 와싱톤 대학에 입학하여 학사학위를 2년 반 만에 받는다.(1907년 7월)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1910.2.23)와 프린스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1910.7.18) 당대 보기 드문 천재로 평가 받았다. 특히 일본을 위시해서 동양인들이 깜짝 놀랐다. 그는 미국의 교포와 망명인사들이 귀국하지 않기를 원했다. 미국에 남아서 지도자 역할을 해 줄 것을 원했다. 하지만 이미 주권을 창탈 당하여 이승만에게는 희망이 없는 나라였지만 고국을 등질 수 없었다.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분이었지만 귀국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조국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애국정신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었다. 당대 뜻있는 사람도 지금과 같이 기회만 있으면 미국에서 영주하기를 원했다. 민족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이 민주주의 개화사상을 외치고 독립정신을 고창했던 지도자 서재필도 1890년 6월 19일 이미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젊은 이승만은 달랐다. 서재필 선배도 그러했으니 얼마나 미국에 남아있고 싶은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백성을 계몽교육 시키기 위해서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가기 전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이승만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나이 20세에 배재학당에 입학(1895.4.2)하였다. 거기서 아펜젤러 선교사와 최병헌(1858-1927)목사<-아펜젤러 순교 후 정동교회를 최초로 담임(1902-14)한 한국인 목사>로부터 기독교의 신앙을 전수받았고 한학과 동양사상을 배웠다. 그는 화이트 여자 선교사의 개인 한국어 어학선생이 됨으로서 영어회화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승만은 총명하여 배재학당 입학 4개월 만에 영어 초등반 교사가 되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의 협성회의 서기가 되는 등 열심히 서구문명사상을 배웠다. 민주의회정치 사상을 전수받은 이승만은 일찍이 개회운동에 가담해 있었다. 박영효의 구테타 사건으로 개화파들이 투옥될 때(1899.1.9)에 역사 이승만도 투옥되어 사형수가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특별교섭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세월이 가는 동안 나라는 풍전등화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에서 각각 승리함으로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고종황제는 오직 미국만이 한국 땅을 탐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하에 미국의 도움을 얻을 계획을 세웠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비밀리에 찾았다. 옥중에서 영어사전을 만들고 죄수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승만 밖에 없다는 천거에 고종은 이승만을 석방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5년 8개월 (1904.8.9)만에 나왔다. 그리고 출옥 4개월 만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도미하게 된다.(1904.11.4)

그는 1904년 11월 29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곧 본토로 건너와 미국에 온 지 불과 2개월도 안 되어 언론인과 정치인을 만나기 시작했다. 1905년 1월 15일 워싱톤 포스트지에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기사가 게재되었다. 딘스모어 하원을 만났다. 해이 국무장관고도 면담을 했다.(1905.2)워싱톤 커버넌트 교회에서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1905.4.23) 도미 10개월 만에 드디어 고종황제의 밀서를 데오도르 루즈벨트 데통령에게 전달하였으니(1905.8.4) 그의 정치적 수완과 활동은 대단했다. 그러나 의외에도 냉담 무표정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세에 영문을 모르는 이승만은 실망을 했다. 실은 불과 한 달 전에 미국과 일본은 정치적 상호 묵약을 맺고 있었다. 1905년 7월 일본에서 미육군장관 윌리암 톱트와 일본 수상 카쓰라 타로와의 비밀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화한다는 외교각서가 합의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더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불행히도 외아들 8살 봉수가 여독에 병이 들어 객사했다. (1906.2.26) 이러한 슬픔과 좌절을 안고도 29살 젊은 이승만은 절망하지 않고 민주정치와 외교학을 배워야겠다는 불타는 심정으로 미국 대학에 입학하였다. 죠지와싱톤대학, 프린스톤, 하버드 등 명문대학을 불과 5년여 만에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포들은 물론 미국 사회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 미국대통령들에 비해도 명문학력으로 뛰어났다.

이미 고국은 망했고 희망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 교포들의 귀국만류가 있었다.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여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YMCA의 총무와 학감으로 초빙 받고 입국했다.(1910.10.10) YMCA를 중심으로 민족계몽교육에 힘썼다. 애국정신을 고양하는 강사로 활약했다. 하지만 일제의 체포령의 기미를 알고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국제 감리교 4차 총회 한국 대표로 부득이 미국으로 떠났다. 귀국한지 1년 8개월 만에 사랑하는 조국을 뒤에 둔 사실상의 망명이었다.(1912.3.9)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그가 3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불체자로 있으면서 광복운동을 하는 중 갖은 고초와 비난과 유혹을 극복하였던 것은 오직 애국애족의 정신이었다. 광복이 되고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33년 망명생활에서 다시 조국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6년, 그리고 망명33년, 도합 39년간을 살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필자는 작년에 ‘프란체스카 스토리’(이순애 저:오스트리아 거주:랜덤하우스 중앙 발행 2005.11.15)를 구입하여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승만이 해외국제대회에 참석할 때마다 무국적자임으로 미 국무성에서는 여권 발급이 난처했다. 미 국무성의 고급 관리로 있는 동창생들과 스승들이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권 발급신청 때 마다 동문들과 스승들이 미국시민권 취득을 권했다. 하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승승장구 하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은 “일본은 망합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시민으로 귀화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비록 미국의 신세를 지지만 고관들에게 조금도 저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게 호헌장담하는 광복투사였다. 또 미국 사회와 정계를 놀라게 한 책을 발간했다. 일본이 진주만 폭격이 있기 전 이승만은 ‘일본의 내막기’(Japan Insight Out:1941)를 출판했다. 일본의 공격을 알리는 초비상경고였다. 이 책의 초고를 다듬고 직접 손으로 타이프를 쳐서 원고를 완성하느라 근 반 년 이상을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가락 끝 마다 아프고 피가 맺힐 정도였다고 한다. 부인의 내조가 컸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등이 이승만의 국제정세 판단력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승만의 책이 불티가 나듯 팔렸다. 그 뿐인가. 그는 2차 대전 중 1942년 6월 VOA(미국의 소리)를 통해 “나 이승만입니다. 조선 2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어 나라를 되찾읍시다. 곧 해방이 올 것입니다.”라고 육성 방송을 하였다.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다. 반공포로 10만 명 이상을 석방시켰다. 처칠 수상은 이승만이 노망이 들렸다고 했다. 1957년 휴전 후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이 초청했다. 이승만을 태운 환영 카 퍼레이드가 뉴욕 맨해튼 브로드 웨이에서 있었다. 역대 미국대통령 가운데에서도 맨해튼 카 퍼레이드는 아주 드물 정도라고 한다. 냉전시대에 철저한 반공주의 정치인을 미국은 대대적으로 영웅으로 받들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던가. 이 분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국부 이승만 박사임을 우리는 자부한다.

그의 선견지명대로 망명 33년 만에 그는 승리자로 다시 귀국했다.(1945.10.16)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 조국을 뒤에 둔 외국 귀화민이 아니라, 떳떳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구름떼 같이 그를 환영하는 백성들의 환호 속에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 땅을 70 고령에 다시 디딘 것이다. 그러나 고국은 이미 공산당 프락치들의 소굴이 되어있었다. 일제치하부터 비밀리에 공산주의 빨갱이들은 인민 노동당을 조직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즉시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과 국산 빨갱이들이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통하여 공작을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을 때였다. 자신이 만든 정당 하나 없는 조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부하 없는 장군에 불과했다.

신탁통치 반대를 목청 터지라 함께 부르짖던 북한 김일성이 갑자기 변심하여 신탁 찬성으로 돌아섰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다. 이승만이 결사 반대하니 우방 미국도 당황했다. 하지 중장은 이 박사를 제거 시키려고 은밀히 서재필 박사를 미국에서 불려 들였다. 그도 큰 도움이 못됐다고 한다. 신탁통치가 시행되는 5년 동안은 전국에 깔려 있는 노동당 비밀 공작대들이 데모, 파업, 반란, 약탈, 관공서 습격을 일으켜 남한 일대를 혼란으로 만들 계획임을 이승만은 빤히 내려보고 있었다. 불행히도 무지하고 순진한 백성들은 민족통일에만 현혹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이미 유럽 약소국가들이 이런 식으로 공산화가 된 것을 알 고 있는 정치가였다. 이것을 예견한 국제 정치학자인 이승만은 미소 신탁통치 반대를 하고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노선에 있었던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 김규식, 김두봉과 함께 4자 회담을 하고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서 “자주민주 조국통일 재건”성명을 발표했다. 이야말로 2천만 민족이 열망하는 소원이 아닌가. 근사한 성명이었다. 하지만 배후에는 김일성의 적화모략이 있는 것을 일반 국민은 알 리가 없다. 이승만은 공산당원만의 파라다이스인 빨갱이 나라만은 안 된다는 신념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만일 김구를 비롯한 4자 회담대로 ‘자주민주 조국통일 재건’을 위한 전국 신탁통치 찬성으로 기울어 졌더라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지구상에 탄생할 수가 없었다.

자주민주 조국통일을 원하지 않는 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승만은 세계공산당혁명사를 통해서 잔인무도한 인민재판과 인권유린 및 종교말살 정책, 그리고 공산당원만 잘사는 ‘빨갱이 나라’만은 안 된다는 확고한 정치 신념을 갖고 있었다.

역시 남한 좌파단체들은 찬성하고 나섰다. 공산당의 술책이 무엇인지 모르는 많은 백성들은 ‘민족자주 통일’이라는 말에만 귀가 솔깃해 있었다. 미국 정부조차 이승만을 설득하려고 했다. 심지어 이승만을 정계에서 제거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서재필을 입국시켰다. 당시나 지금이나 빨갱이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한 백성은 “민족” “통일”의 용어에만 현혹되고 있다. 사실상 민족, 자주, 주권, 통일이라는 낱말로 얼마나 많은 공산 빨갱이들이 백성을 죽이고 수십만의 탈북자와 300만의 아사자를 내었는가 말이다. 만일 대한민국이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남한도 같은 현상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지금 탈북자로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확고한 민주정치 이념으로 ‘온 통은 못 구해도 반 토막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유엔 선거감시단 입국을 허용하고 남한 단독 선거를 미국을 제치고 유엔에 주장했다.그러나 북한은 유엔 선거 감시단을 거부했다. 자동적으로 남한 단독 선거를 유엔은 허락했다. 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동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승만의 나라사랑 정신, 곧 독립정신의 열매였다. 우리는 이래서 그를 위대한 세계적 정치인이라고 자부한다. 한편 그의 장기 집권에 따른 4.19의 정치적 과오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를 바로 인식할 때 바른 민주 시민이 되는 것이다.

반세기가 흘렀다. 이승만은 우리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국부다. 인민봉기, 군부의 여수 순천 대구 반란을 통해서도 사회혼란에 실패한 김일성은 해방직후부터 스탈린의 지원을 받고 준비한 탱크부대를 이끌고 남침(1950.6.25 새벽4시)을 했다. 3개월도 안되어 대구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우방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이끌어 낸 이승만은 지구상에서 없어질 대한민국을 다시 구해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약소 국가들이 모조리 공산화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공사상으로 민주국가가 건재한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 뿐이다. 자유진영 세계우방 정치인들은 이승만의 탁월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 십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시장경제 민주주의 체재 기틀을 이룩해 놓은 대통령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어찌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어 둘 수가 있단 말인가. 어느 나라든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보면 완전한 인물이 없다. (죠지 와싱톤, 토마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등) 하지만 선진국들은 그들의 역사적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무시해 왔다. 우리는 이제 그의 애국애족의 생애와 나라사랑 독립정신을 길이길이 본받아 기념해야 한다. 특히 그가 39년간 미국체재 중 미국 귀화 종용에도 불구,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한 그의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역시 그는 냉전시대의 정치적 영웅이며, 하늘이 주신 대한민국의 국부임을 재삼 밝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