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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Joyfule 2020. 7. 29. 04:46




[분석]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주권재민의 영세 자유국가 세운 선각자
김필재 기자 2007-08-20 오후 4:53:00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이 독재적 방법으로 모든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앞잡이 김일성을 내새워 소비에트 국가를 만들고 있으며 이 소비에트 국가를 수단 삼아 곧 남한마저 공산화하려고 하는 판이므로 이것을 막으려면 남한에서 지금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의 골자)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국사에 있어 최초의 공화제 민주국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 그는 공산주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큰 틀을 확립했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제정을 주도하고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1948년 7월 24일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해방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 기다렸다가 ‘대한민국정부수립식’ 행사를 치렀다. 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은 1948년 이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 대통령이 추구했던 국가 전략은 부국강병과 영세자유(永世自由)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전쟁 혼란수습, 경제성장 기초 다쳐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확립, 경제성장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을 통해 육성한 60만 대군은 경제가 안정될 수 있는 또 다른 여건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에게 부여된 병역의무는 한국청소년들의 의식수준을 향상시켰고 급속하게 동질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대통령은 상공업 장려와 농지개혁 등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으며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적 기적을 이뤄냈다. 특히 이 대통령의 혁명적 교육개혁결과 해방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9년에는 10%로 급감됐으며 대학생의 수는 12배나 증가해 고도성장의 기초가 됐다.

휴전직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초등학교교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안건을 이 대통령이 강력하게 제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교육에 대한 이 대통령의 열정은 탁월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키면서 농민들의 의욕적 영농을 가능케 했으며 한국사회의 평등화를 위해 공헌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임기간동안 일민주의(一民主義), 양반제 종식, 여권신장 등 평화 주의적 사회개혁을 이뤄냈고 한글과 기독교 장려 등을 통해 문화적 개혁도 달성했다.

미국의 반대 설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지미(知美)주의자였다. 그는 해양국가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한국민이 의존해야만 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초기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물론 공산주의의 위협과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사전봉쇄와 신속한 대응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모두 방위조약의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특단의 조처는 방위조약의 신속한 체결을 재촉하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였다.

비록 이승만의 일방적인 행동은 모험적인 것이었으나, 휴전의 성립을 위해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경고’이외의 다른 제재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벼랑끝’ 외교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방위조약의 신속한 비준약속을 받아냈고, 미국도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 결과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이 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이 침략위협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공산주의 위협·공격 사전봉쇄, 안보기틀 확립

반면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또 다른 ‘이중 봉쇄’의 효과를 발휘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일본의 팽창과 관련, 이승만 대통령은 6.25 동란 중 UN군 사령부가 군사상의 목적으로 선포한 소위 ‘맥아더라인’이 휴전과 함께 철폐될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공산세력이 침투방지와 일본어선의 불법침입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평화선’을 선포, 일본을 당황케 만들었다.

‘평화선 선포’에서 그는 “일인(日人)들이 맥아더 선을 넘어 우리 해안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해중자원(海中資源)을 불법으로 빼앗아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참을 수 없어 공평히 그어진 해상획정선을 설정해 우리의 어권(漁權)을 보호 한다”고 말해 대일 강경론을 표면화했다.

실제로 이 ‘평화선 선포’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추진하는데 있어 한국 측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만들어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