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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민들레 - 임병식

Joyfule 2013. 1. 11. 05:03

 

어떤 민들레 - 임병식

 

 

 

우리집 거실 한편의  진열장에는 프랑스산 끄레텔 나폴레옹 양주 한 병이 수년째 놓여  있다.  그런데는  내가  술을 즐겨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그외에도  이유도 있다.  부산에 사는 이종사촌 동생이,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서 문병을 오면서 가져왔는데 그 생각을 하면 없애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데 나는 이  동생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생각부터  앞선다. 어려울때 도움을 주지 못랬던  것이다. 딱 한번 손을 내민 적이 있는데  외면을 하고 말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짠한 구석이 있다.

 

 동생은 참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생명력으로 말하면  민들레와 같다고나 할까. 동생은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으나  지금은 보란듯이 일어났다.  

 

동생은  어렸을 적 부터 숱한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배고픔의 세상이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하여   살고 있으니  대견하기 그지 없다. 하는 일은 해외관광업이다.  결쟁이 심한 업종에서 오직 불굴의 의지 하나로   정상에 올라셨다. 

 

 동생은 외모가  곱상하게  생겨서  귀공자타입이나 전형적이 유외내강형이다. 그런 동생은 태어나면소 부터  운명이 순탄치 않았다.  친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외면한 바람에  출생부터가  아버지 성(姓)을 따르지 못하고 어머니 호적에 입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동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돈벌이에 나지서  않으면 아니 되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활터에 나가  화살을 주어나르는  연전동 생활을 했다. 날씨가 따뜻한 철에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추운 겨울에는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활터 누비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하루도 그런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가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지 못한 건 다른 일이 아니다.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후루는  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어느 호텔에서 심부름을하고 있는데, 그곳 생활이 성이 차지 않아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호텔 강습을 받고 싶은데 돈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그를 가로 막았다.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서 상경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될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동생은  나중 안일이지만 기어이 상경을 한 모양이었다.  몇 년이 지나  소식을 전해왔다. 지금 서울에서 살고있는 생부를 찾기 위해 공을 드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조부가 사는 거처를 알아내어 어찌어찌  추적을 했다는 것이다. 조부에게 틈틈이 선물을 사들고 찾아간  것이 주효한 것 같았다. 비록 호적상으로는 정식 손자로 인정을  못하지만  마음은 열고 대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생부가 사는 곳은 알아 냈느냐" 물었더니 그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먀냥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어떤 모습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때 세간을 풍미한 정 아무개에 대한 사례였다. 그는 한때 고위직에 오른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끝내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면은 커녕 문전박대만 받고 말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지라 동생이 기어이 입적(入籍) 까지 하고 말겠다고 벼르는  결심이 무모하게만 생각되었다.

 

그 이 후 들은 이야기다. 드디어 생부가 사는 집을 확인하고 기회를 엿 보다가 그집에서 나오는 한 유치원생을 보게 됐단다.그런데 동생은 그 아이를 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단다. 생김새가 어찌도 자기 어렸을 적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던지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마침내 동생은 생부와 마주앉았다.
"저를 윤가로 입적 시켜주십시오"
"그것은 어렵다. 대신 창씨를 해주마"
"그것이 말이 되나요?"
"싫다면 그만둬라. 막말로 네가 내 자식이라는 근거라도 있더란 말이냐"
이렇게 되어 극적인 상봉은  곧 결별로  이어지고 말았다.

 

동생은 동종업계에 있는 생부를 그때부터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정식 혼인을 하고 임신상태에서 온갖구실로 생모를 내친 생부를 만나 창씨운운한데 환멸을 느끼고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무슨 핏줄의 당김이 있는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형님,그러나 그때 아이를 보니 정말 기분이 묘합디다. 눈이 큰 것하며 피부가 흰 것이랑  어찌 그렇게 닮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 하나봐요"

 

그런 일이 있고, 십여 년이 흘렸다. 문병을 온 동생은 고운때도 벗고 사십대의 중견사업가로 변신해 있었다. 주로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데, 이제는 진즉 생부 회사를 압도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사이는 오히려 생부가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는 것이었다. 업계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제는 분노 같은 것은 삭혀버린지 오래라는 것이었다.
"헝님 저는 앞으로도 김가로 살 겁니다. 인간 김성수로요"
"잘 생각했네. 이제껏 자네는 어머니 아들로 살았지 않는가?"
"맞습니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사는 동생에게 나는 옛날 도와주지 못한 걸 미안하게 느끼면서 노파심에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
"앞으로도 민들레처럼  굳건히 살아가게나".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