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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뼈 - 천운영

Joyfule 2015. 9. 30. 09:56

 

 

단편소설:

등뼈 - 천운영

 

  [부천헬스장]척추운동 바른자세

 

여자가 떠났다. 아무런 징후나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입술을 너무 깨물어 입가에 선 실핏줄이 곧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가 남기고 간 푸른 실핏줄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조금 전까지 여자의 머리통에 가려져 있던 액자가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액자에 그려진 노란 잠수함이 남자에게는 너무나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이제 여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비로소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남자에게 여자는 지긋지긋한 날벌레에 불과했다. 행복한 노란색이나 환한 빛깔만 골라 맹목적으로 달겨드는 하루살이와 같은. 남자에게 여자의 몸은 때로 이상한 열기를 가진 병균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여자로부터 위험이 감지되었고 남자는 여자를 거부하는 것만이 몸에 유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여자는 어김없이 남자 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실체는 없으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중력처럼. 아무리 높이뛰기를 하여도 그 힘에 의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듯 남자는 여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여자가 스스로 힘을 잃고 사라져 주었다. 이제야 발목을 거머쥐고 있던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주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초속 십일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대기권을 뚫고 우주 공간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부양 장치가 고장 난 잠수함에 갇힌 것처럼 어두운 바다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만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돌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모욕을 주고 쫓아내어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남자 앞에 나타나 새살거리던 여자. 손 하나 대지 않고 돌려보낼 밑반찬을 남자의 냉장고에 풀던 여자였는데…. 그녀는 결코 그렇게 쉽게 물러날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시 눈을 감고서 열을 센 후 다시 눈을 뜨면 입술을 악문 조금 전의 얼굴로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눈을 감는다. 눈 속 검은 공간을 여자가 가득 채운다. 한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바싹 다가오기도 하면서 여자가 서 있다. 검은빛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지독히 검고 큰 눈동자와 숱이 많은 눈썹은 왠지 두렵고 위협적인 느낌마저 풍기고 있다. 여자의 검은 눈은 겁도 없이 이쪽을 살피는듯하다가 설핏 서늘한 기운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는 광대뼈. 입술을 악물면 불거지는 턱뼈. 여자는 뼈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동그랗게 솟은 어깨뼈와 새가슴, 시폰 감의 치마 사이로 드러난 무릎뼈와 퀭하니 드러난 발목의 복사뼈까지. 여자가 무언가 강렬히 억누르고 있거나 모욕을 견뎌 낼 때 그 뼈들은 시위를 하듯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때마다 남자의 몸 깊은 곳에서는 여자를 능멸하고 짓밟고 싶은 충동이 더욱더 강렬히 솟구치곤 했다. 그것은 몸 속 깊이 숨은 종양덩이와 같아서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번식력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지금 남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여자의 뼈들은 몹시 매혹적으로까지 보인다. 남자를 질식시키고 불쾌하게 만들었던 뼈들이 갑자기 매력적인 것으로 반전이 이루어진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여자를 향해 손을 뻗어 본다. 남자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여자가 입술을 좌우로 길게 일그러뜨린다. 경직된 얼굴의 뻣뻣함 속에서 가능한 모든 감정 변화의 여지가 느껴진다. 안개 낀 아침에 한낮의 열기에 대한 예감이 감도는 것처럼. 별안간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머리다발이 남자의 뺨을 후려친 듯하다. 여자의 뒤통수가 불길하고 섬뜩하다. 정전이 된 듯 남자의 눈 속이 온통 암흑이다.

 

남자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둠의 채찍에 후려치인 것처럼 눈알이 씀벅씀벅했다. 여자는 없었다. 오른뺨이 화끈화끈했다. 뺨을 쓰다듬어 보지만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사라진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지도 않은 지금 남자는 여자의 도드라진 뼈와 검은 털과 눈동자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육신 밑바닥 창자 속까지 자리잡고 있던 무언가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듯했다. 그토록 지겹고 넌덜머리나던 여자가 스스로 사라져 주었는데…. 느닷없는 여자의 사라짐에 대해 남자의 가슴에는 안도와 불안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생성되고 동시에 소멸되었다. 지구 자기장에서 벗어나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영영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

 

여자를 잡을 수도 있었다. 잡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가 떠나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자는 붙잡는 법을 몰랐다. 설령 무작정 옷깃을 부여잡았다 하더라도 여자는 떠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공격적인 방법으로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액자에서 고개를 틀어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내는 어둡다. 공룡의 등뼈처럼 거대한 환기통이 천장의 중심을 가르고 있다. 환기통을 가운데 두고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전선이 갈비뼈처럼 좌우로 길게 뻗어 나간다. 조명등이 빛을 발사하고 있는 액자에는 크고 작은 잠수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잠수함의 내부를 닮았다. 꽉 막혀 있는 원형 창과 텅텅, 간헐적으로 들리는 깊은 쇠의 울림. 카페 한가운데 자리잡은 가느다란 기둥은 수면 위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잠망경 통로 같았다. 출입문에 달린 둥글고 커다란 손잡이를 돌리면 차갑고 시커먼 물줄기가 벼락처럼 쏟아져 들어올 듯했다.

 

남자는 <노란 잠수함>이라는 카페를 어렵게 찾아왔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버스를 타고 여섯 갈래로 갈라진 로터리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 카페에 도착하는 동안 남자는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위치를 알려 주던 여자의 목소리 속에 돋아 있던 가시가 남자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네 개의 테이블과 주방 겸 카운터로 쓰이는 작은 공간이 전부인 카페에는 지금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 테이블에서 붉은색 음료를 마시고 있던 사람들도 없어졌다. 남자는 그들이 음료값을 지불하고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테이블에는 여전히 그들이 마시던 음료가 반쯤 남겨진 채이다. 남자가 이곳에 들어오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눈만 희뜩 뜨고 말았던 주인 여자도 없다. 작당을 한 듯 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장치가 있어 다들 그곳으로 가 버린 걸까?

 

남자는 전혀 낯선 곳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속임수와 복잡한 술수를 부리며 고동치는 영악한 지능의 기계장치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닌지. 남자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빠 왔다. 별안간 무수한 별들이 눈앞에 떨어지면서 통증이 찾아왔다. 남자는 테이블 귀퉁이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굉장한 괴력을 가진 물건이 남자의 허리를 으깨는 듯한 통증.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어느새 척추를 타고 올라가 어깨뼈와 목뼈까지 뻐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갈비뼈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러진 갈비뼈가 날카롭고 무자비한 칼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남자는 딱히 어느 곳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눈을 치켜떴다. 여자가 앉아 있던 소파에 움푹 패인 자국이 보였다. 소파는 아직까지 여자의 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스펀지의 원형을 회복하며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워 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는 떠났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난 것이 아니라 증발한 것이다. 물이 기체가 되듯, 전선의 전기가 소모되듯, 순식간에.

 

한번쯤 영원한 증발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일상에서 영원히 떠나고 마는 사라짐. 엑스레이 사진을 찍기 위해 방사선실에 들어와 있거나 철 지난 잡지를 들고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다가 문득. 명확한 해명도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는 완벽한 사라짐. 남자의 허리 부분을 대충 만져 본 의사는 곧장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자고 했다. 의사의 건조하고 가느다란 손이 허리에 닿자 기다란 쇠꼬챙이에 찔린 듯한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남자는 등을 펴지 못한 채 방사선 기사를 따라 방사선실로 들어왔다. 방사선실은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냉혹한 공간처럼 차고 낯설게 보였다. 남자는 방사선실에 서서 잠깐 증발을 상상했다. 방사선 기계의 작동 버튼을 누르면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진 물질 구조에서 다른 차원의 물질구조로 변하게 되는 증발.

 

―의자에 등을 붙이세요. 금방 되니까 움직이지 마시고. 턱은 아래로 살짝 잡아당기세요. 팔은 자연스럽게 내리시면 됩니다.

 

능숙하게 자세를 잡아 주는 사내의 목소리가 남자를 몽상에서 끌어낸다. 남자는 사내의 말대로 등을 빳빳이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면에는 사용법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내는 어깨를 누르며 움직이지 말라고 재차 강조하고 검은 쪽창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발전기 소리 같기도 하고 엔진 소리 같기도 한 진동이 공간 전체를 휘감아 돌았다. 사내가 쪽창에서 고개만 내민 채 쇠로 만들어진 침대를 가리켰다. 남자는 신을 벗고 사내가 시키는 대로 옆으로 누웠다. 움직이지 않도록 몸을 고정한 후 남자는 엑스선이 피부와 살과 핏줄을 통과해 뼈들을 추려 내는 것을 상상했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근육과 핏줄이 하나씩 사라진 후 흰 뼈들이 남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방사선이 남자의 몸을 통과하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하얀 뼈들은 손등에 앉은 눈처럼 어른거리다가 스르르 사라져 갔다.

 

남자의 등뼈는 필름 위에 현상되어 진료실 형광등판에 끼여 있었다. 의사는 남자를 불러 앉혀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등뼈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바라보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쫓아 남자도 자신의 뼈들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남자에게 해독 불가능한 지형도처럼 보였다. 그저 희거나 검은 한 장의 필름. 몸의 형태를 규정하고 주요 신경의 통로라는 척추가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의 것이 아니라 남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먼 세계의 것 같았다. 의사가 기다란 봉으로 척추를 찌르며 요추디스크라는 판명을 내렸다.

 

―우리가 흔히, 목뼈에서 골반까지를, 척추라고 하지요. 여기 조금 가는 게 목뼈고, 여기까지가 등뼈, 그 다음 다섯 개가 허리뼈, 그리고 마지막, 골반이에요.

 

마디 끝마다 톤을 살짝 높여 말하는 의사의 말투는 꼭 유치원생을 달래는 여선생 같다. 남자는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의사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여기 네 번째 다섯 번째 요추를, 잘 보세요. 조금 어긋난 게 보일 겁니다. 요 놈이 신경을 누르고 있어 허리가 아픈 거구요.

 

의사의 가느다란 봉이 다섯 번째 허리뼈를 가리켰을 때, 남자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그 끝을 들여다보았다. 넓적하게 퍼진 골반 위에 마지막 허리뼈.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 보이기도 하고 네 번째 허리뼈와 겹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심하면 연골에 물이 차기도 하는데 엑스레이 사진으로 봐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어렵지는 않겠다고 의사는 느릿느릿 설명했다. 말을 모두 마친 의사가 가느다란 봉을 능숙하게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의사의 설명이 아주 명쾌하다는 듯, 쇠로 만들어진 봉이 맑은 소리를 내며 유리탁자에 부딪쳤다. 의사는 병명을 설명해 주던 유치원 선생의 목소리에서 어느새 사건종료를 알리는 형사 목소리로 돌변해 이제 나가서 물리치료실로 가라고 말했다. 척추를 보여 주던 형광등이 꺼졌다. 남자는 필름 위에 희미하게 드러나던 뼈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까맣게 되는 것을 보고 쫓겨나듯 물리치료실로 향했다.

 

물리치료실에서 남자는 뜨겁게 달구어진 팩 찜질과 이온치료와 전자치료를 번갈아 받았다. 어렴풋이 커튼을 여닫는 소리와 팩 온도에 대해 불평을 하는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살을 자극하는 전기의 강도를 느끼며 남자는 그 가느다란 떨림이 뼈 깊숙한 곳으로 스며드는 것을 상상했다. 그것은 뼈 모양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전기 강도가 세어질 때마다 진찰실에서 보았던 등뼈가 남자의 눈 속에서 해체되었다가 다시 모이곤 했다.

 

물리치료가 끝나고 병원비를 계산하면서 남자는 자신의 뼈를 찍은 엑스레이 필름을 줄 것을 요구했다. 남자에게 이런저런 자세를 알려 주던 방사선실 기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주민등록번호와 연락처 등을 기재한 후에야 필름을 건네주었다. 약봉지와 필름이 든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병원을 나와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잠시 잊었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엑스레이 필름이 들어 있는 서류봉투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몸 안에 존재를 숨기고 있다가 압력에 의해 겨우 드러난 악령처럼 비밀스럽고 강렬한 힘. 그 힘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과 함께 남자를 공격해 왔다.

 

남자는 햇빛이 잘 드는 유리창에 엑스레이 필름을 붙였다. 골반까지 나온 정면 사진과 S자로 휘어져 보이는 측면사진. 유리창에 붙은 뼈들은 하얗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는 뼈 사진을 보며 등 뒤로 손을 뻗어 척추의 개수를 헤아려 보았다. 아무리 세심히 세려해도 열일곱 개의 뼈마디가 만져지지는 않았다. 팔을 어깨 뒤로 돌려 보기도 하고 허리로 올려 보기도 했지만 끊기지 않고 등뼈를 세는 것은 불가능했다. 등뼈 수를 세는 대신 필름에 드러난 등뼈에 혈관을 깔고 살을 붙여 등 모양을 연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역시 완벽한 등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등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누군들 자기 등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더러운 때조차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만 벗길 수 있는 곳이니까. 가려워도 여드름이 나도 상처가 생겨도 남의 힘을 빌려야만 처리할 수 있는 곳. 몸무게의 70%를 버티고 있으면서 제대로 돌보거나 가꾸어질 수 없는 등의 천형.

순간 남자의 등뼈 사진 위로 여자의 등이 겹쳐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자의 왜소한 등과 중심을 가로지르는 등골. 고랑 한가운데 두두룩하게 줄진 등골뼈까지.

 

여자가 사라지기 전날 그녀는 남자의 방에서 옷을 벗었다. 지겨워 넌 자존심도 없어?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나 여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남은 옷을 모두 벗고 필사적으로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남자는 더러운 것을 떼어 내듯 여자를 밀쳐 내었다. 여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물러서는듯하다가 어느새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여자의 여린 팔에 악착스러운 욕망의 힘이 느껴졌다. 여자가 강하게 안을수록 남자는 더 매몰차게 여자를 밀쳤다. 여자가 방문에 부딪쳐 주저앉았을 때 갑자기 남자의 발이 여자의 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때 맨발에 느껴지던 말랑말랑한 살의 감촉. 남자의 발끝으로 관통해 오던 그 불길 같은 헐떡거림. 여자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남자의 발길질을 견뎌 내고 있었다.

 

여자가 배를 감싸쥐고 납작하게 엎드렸을 때에야 남자는 발길질을 멈추었다. 여자의 몸에 닿아 있는 발을 통해 고통스런 경련이 전해져 왔다. 남자는 돌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물러나 자신이 휘둘렀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의 것이었다. 새끼발가락이 뭉툭하게 휘고 힘줄이 툭툭 불거진 발등. 남자는 지금까지 여자를 향해 휘두른 무기를 감추고 발길질을 하게 만든 여자에게 모든 탓을 덮어씌우고 싶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여자의 음모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여자는 긴 머리채를 방바닥에 흘리고 팔을 길게 뻗은 모습으로 구석에 엎드렸다. 그때 처음으로 남자는 여자의 벌거벗은 육체를 세심히 훑어보았다. 목선에서부터 둥그렇게 솟은 엉덩이까지. 물처럼 흘러내린 머리와 톡 튀어나온 뼈들. 그리고 재빠르게 도망가는 엉덩이의 곡선. 그때 여자의 몸 중앙을 가로지르던 등뼈의 명쾌한 자국을 남자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불거진 뼈를 가진 신체는 비애감마저 느끼게 한다. 비극적인 육체. 육체의 중심에 우뚝 선 등뼈. 그 마디마디가 처참히 드러난 여윈 등.

 

그때 남자는 왜 여자의 등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을까. 어느 누구도 자신의 등을 쓰다듬을 수는 없는 법이다. 타인만이 그 등을 쓰다듬고 보듬어 줄 수 있다. 여자는 어쩌면 남자에게 그 등이 주는 처참함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등을 감싸 주기 원했는지도. 남자는 여자의 등뼈를 쓰다듬듯 유리창에 붙은 자신의 등뼈를 만지기 시작했다. 매끈한 필름 표면에서 여자의 온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의 손에는 필름의 느낌만 차갑게 전해져 올 뿐이었다. 어긋나 신경을 압박하는 병든 뼈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는 5층 높이 건물 옥상에 올라섰다. 타일을 붙이지 않고 쉽게 모양을 내기 위해 거푸집을 사용한 빌라 건물이다. 두께 팔 센티의 스티로폼 거푸집을 떼어 내는 일이 남자가 지금 할 일이다. 오전 안에 일을 마치고 줄 비계를 다시 옥상으로 올려놓아야 했다. 남자는 거푸집을 떼어 내는 데 사용할 작은 곡괭이와 소형 가스버너를 챙겨 비계에 내려선다. 지붕 모양을 흉내 낸 삿갓 형 난간 때문에 조금 애를 먹는다. 두 명의 인부도 남자를 따라 비계에 탄다.

 

비계에 오르면, 남자는 가능한 밑을 쳐다보지 않는다. 끊임없이 남자를 끌어내리려는 힘, 땅에 발 딛고 서 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지구의 인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으라고 강요하는 힘. 건물 옥상에 단단히 매어져 비계에 연결된 두 개의 가느다란 줄만이 유일한 보호 장치였다. 만약 그 줄이 끊어진다거나 매듭이 풀린다면 남자는 몸무게만큼의 속력으로 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아직까지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영영 일어나지 않을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건물 왼편을 맡았다. 스티로폼 거푸집 모서리에 곡괭이를 꽂아 틈을 벌린다. 위쪽 부분을 시멘트에서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한 번에 잡아 당겨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게 떼어내려 하면 스티로폼이 조각나 일이 더뎌진다. 건물에서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이 공기의 저항을 받아 사선을 긋다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공기를 밀치고 바닥에 내려앉는 스티로폼 거푸집은 흡사 정전기에 노출된 머리카락처럼 몸을 땅에 바싹 붙였다. 지구의 중심에는 얼마나 큰 힘이 도사리고 있어 모든 것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걸까. 남자는 문득 여자를 떠올렸다. 무작정 다가오는 법만 알던 여자. 어쩌면 여자가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남자가 여자를 향해 강한 인력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움직일 때마다 등이 갈라지는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은 지진처럼 너무 급작스럽게 나타나서 남자가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육체를 짓이겨 놓고 재빠르게 사라지곤 했다. 통증이 멈추는 잠깐 동안에도 또다시 찾아올 기습공격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을 마치면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갈 것이다. 닷새 동안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전기치료를 받고 나면 새로운 통증의 전류가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처음 정형외과를 찾은 후로 남자는 다섯 군데의 다른 정형외과를 다녔다. 보다 정확한 검사결과를 얻거나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매번 다른 곳이 아프다고 했고 그때마다 다른 부위의 엑스레이를 찍었다.

 

여자가 떠난 뒤 남자는 살 속에 숨은 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뼈 하나가 없어졌거나 바스러져 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뼈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때로 보관의무가 있다며 엑스선 필름을 주지 않는 병원도 있었다. 남자의 방 유리창에는 이제 머리와 어깨를 제외한 골격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대부분의 정형외과에 있는 해부도나 골격 그림처럼 명확하게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제법 모양이 나는 것도 같았다.

 

정형외과를 찾아다닌 것은 꼭 뼈 사진을 찍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남자가 가진 뼈에 대한 집착은 이미 사라져 버린 여자에 대한 집착이었다. 진료실에 걸린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듯 병원 주변을 배회하며 여자의 흔적을 찾았다. 여자에 대한 기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사람이 완벽하게 증발할 수 없다면 여자를 찾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석이 인력에 의해 붙어 있는 쇳가루를 끌고 다니듯 여자는 남자의 몸과 마음을 강력하게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나 유리창에 남자의 골격이 가득 차도록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남자와 함께 비계에 오른 두 사내는 이미 거푸집을 모두 떼어 내고 틈새에 남아 있는 스티로폼 조각을 제거하기 위해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강력한 불줄기가 닿자 스티로폼은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재빠르게 사라져 갔다. 등의 통증이 더 강하게 찾아오면서 남자는 허리를 굽힌 채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인부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져 남자가 작업하는 영역은 점점 줄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 층을 모두 마치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비계는 3층에 다다랐다. 줄을 풀며 비계를 내릴 때마다 속이 매슥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먹은 우유가 기도를 타고 넘어올 것 같았다. 남자는 벌써 사흘째 밥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우유나 물만 먹고 있었다. 왕성한 식욕이 생기다가도 막상 먹을 것을 앞에 놓고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그만 비계에서 내려 무언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계가 땅에 닿을 때까지는 내려갈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함부로 뛰어내릴 높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옥상으로 오르기에는 너무 많이 내려왔다. 다른 때 같으면 줄을 타고 내려가 요기를 하고 올라올 수도 있었다. 비계 줄을 타고 오르는 것은 남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줄을 탈 자신이 없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통증과 어지럼증이 남자를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여자는 생선과 닭을 유난히 좋아했다. 생선살을 잘 발라내 남자의 밥 위에 올려 주던 여자. 그리고나서 여자는 생선뼈에 남은 작은 살들을 발라내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 먹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여자의 접시에는 잘 발라낸 뼈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흰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고 말끔한 뼈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물로 보일 정도였다.

 

여자가 뼈에 붙은 살을 좋아한다는 것은 다른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닭튀김을 먹을 때 여자는 다리와 날개나 가슴살은 거들떠보지 않고 먹기 힘든 부분만을 먹었다. 다리 마디에 붙어 있는 살이나 닭 갈비뼈 따위들. 튀김옷에 숨겨져 어느 부위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닭의 목 부분을 여자는 기가 막히게도 잘 찾아내었다. 여자는 그다지 먹을 것이 많아 보이지 않는 목뼈를 들고 뼈의 휘어진 반대방향으로 꺾어 두 도막을 내었다. 반도막 난 목뼈 하나를 손에 든 채 나머지 반 도막은 통째로 여자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닭 목을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마다 여자의 도드라진 광대뼈가 움찔거렸다. 마치 여자의 광대뼈 속으로 닭뼈가 들어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반도막의 목은 잘 발라진 몇 개의 작은 뼈로 분리되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목을 먹은 여자는 남자가 먹고 내려놓은 닭다리를 손에 들고 뼈 사이의 연골이나 발목 근처 오돌뼈들을 발라 먹었다.

 

조개구이를 먹을 때도 그랬다. 조개가 입을 벌리고 제 속에 가두어둔 바닷물을 뿜어내면, 여자는 그 살을 떼어 내 남자에게 주곤 했다. 남자가 조갯살의 탄력을 느끼고 있는 동안 여자는 조개껍데기에 붙은 관자를 뜯어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뜨거운 조개껍질을 들고 질긴 관자의 결을 젓가락으로 긁어내는 여자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관자를 떼어 내는 데는 시간이 조금 많이 걸렸다. 그러나 정작 힘들게 얻어 낸 관자는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부위였다. 콩알만한 관자는 혀나 이에 닿기도 전에 목젖을 타고 넘어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마다 남자는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선심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자의 식성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 남자가 맛있다고 생각되는 부위를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먹고 난 뼈를 다시 주워들거나 애써 조개의 관자를 뜯어내는 여자의 모습은 궁핍하고 비천한 동물을 연상시키는 일이었다. 여자에게 왜 구질구질하게 그런 걸 먹는 남자가 못마땅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뼈에 가장 가깝잖아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뼛살을 먹는 데 열중했다. 뼈에 가장 가까운 살. 남자는 문득 여자가 느꼈던 뼛살을 맛보고 싶어졌다. 그 작고 미진한 살. 뼛살을 발라낼 때 입 속에서 느껴지는 뼈의 굴곡들. 뼈에 대한 강렬한 집착. 스티로폼을 떼어 내는 남자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모자이크 조각 같던 벽면의 문양이 조금씩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남자는 사흘째 일을 나가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일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맛보았던 뼛살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다른 어떤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남자의 혓바닥 위에 있는 돌기들은 맛을 감지해 내는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식욕을 관장하는 신경세포마저 작동을 멈추었는지 남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다.

 

입에서 시고 구린 냄새가 올라왔다. 몸을 움직이면 천장의 사방무늬 벽지가 노란 돌풍을 일으키며 덤벼들었다. 골수를 뒤흔드는 소리.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고막을 찢을 것처럼 과격하게 돌진해 오다가 순간 진공상태가 되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두들겨 보지만 그 폭발과 침묵은 주기적으로 남자를 괴롭히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모형 잠수함 상자를 끌어온다. 잠수함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앞이 트인 형태의 플라스틱 모형이다. 상자에는 <러시아 타이푼-전략 미사일 핵 잠수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남자는 사흘 동안 빗소리를 들으며 선체내부를 만들었다. 여섯 구의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기관실과 승무원 침실을 들여놓는 동안 잠수함은 빗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부품을 자르다가 손을 두 번 베었고 손톱보다 작은 승무원들은 본드에 녹아 한쪽 다리를 잃곤 했다.

 

정신이 점점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잠깐 멈추었던 빗줄기가 다시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흘 동안 내린 비가 모두 머릿속으로 흘러든 걸까. 여기저기서 떠내려 온 오물과 흙탕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수함을 완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설명서에 매겨진 부품 번호를 찾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자를 찾았다면 이 복잡한 잠수함 따위는 사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를 처음 만났던 곳이 모형판매소 앞이 아니었어도 남자가 설명서에 코를 박고 부품 번호를 찾아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의 처음 만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남자는 그때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에 형형색색의 차들이 뒤엉켜 클랙슨을 울려대고 사람들은 보행신호가 빨리 바뀌기를 기다리며 도로에 내려서거나 발을 굴렀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은 전력질주로 달려갔다. 그 무차별하고 쫓기는 듯한 행인들의 물결. 여자는 그 물결을 뚫고 홀연 나타났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듯한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고 해야 할 만큼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는 남자 앞에서 비켜날 줄 몰랐다. 여자는 남자 앞에 서서 짧지만 강하게 숨을 내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 말이나 생각은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시선으로 처리하는 사람만이 가진 강렬한 눈. 남자는 몸 가닥 가닥을 휘어 잡힌 사람처럼 여자 앞에 꼼짝없이 붙들려 서 있었다.

 

여자를 거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처음 접한 여자의 시선 때문이었다. 이 끝에서 저 끝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여자의 시선. 가까스로 잡히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불길이 여자의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여차하면 남자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겠다는 듯 쏘아붙이는 그 달콤하게 위협적인 시선은 남자의 욕망을 겨냥하여 설치된 덫이었다. 남자는 그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지금까지는 잘해 왔었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사라지고 나자 남자는 덫이 있었던 주변을 헤매며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여자가 떠나고 남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여자가 사라졌던 <노란 잠수함>이라는 카페에서 출발해 여자와 함께 지냈다고 할 만한 공간과 여자를 처음 만난 모형판매소 앞 횡단보도에 이르기까지. 처음 여자를 만났던 곳에 이르러 남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그곳에서부터 여자와 남자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관계의 처음에 도착한 셈이었지만 그곳은 아무 질량도 부피도 느낄 수 없고 시간도 공간도 없는 제로 상태의 낯선 공간에 불과했다. 여자는 어느새 광막하고 의문투성이인 우주가 되었다. 어떠한 물리이론이나 가설로도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없는 우주 그 자체였다. 남자 앞에 펼쳐진 우주는 점점 더 팽창하여 암흑만 남기고 무한히 광활해졌다.

 

그때 남자의 눈앞에 모형판매소가 들어왔다. 각종 범선과 잠수함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었다. 진열대에 진열된 몇 개의 범선은 굉장히 정교해 보였다. 남자는 잠수함을 택했다. 바다 깊숙한 곳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가 선제공격을 하는 강력한 잠수함. 갑판 위의 도르래는 너무 얇게 만들어져 있어 칼로 베어 내다가 부러지고 말았다. 본드로 다시 붙여 보려 했지만 도르래를 갑판 위에 올려놓자 다시 부러져 버렸다. 갑판 위에 부속물들을 다 배치하고 갑판과 선체를 붙이면 잠수함은 완성될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작은 부품들을 일일이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선체와 갑판을 결합하기로 했다.

 

갑판과 선체 두 쪽을 본드로 붙이기 시작했다. 엉성하게 붙은 부품들은 쉽게 떨어져나갔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돌고래 모양의 날렵한 잠수함이 얼추 형태를 갖추었다. 앞면에는 잠수함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으로 기관실을 조정하는 작은 사람들과 핵미사일이 보였다. 얇은 관 속에 들어 있는 잠망경을 손으로 당겨 올렸다. 잠망경을 올려 수면 위 동태를 파악하고 부상 준비를 하는 잠수함. 멀리 창밖으로 도로 위에 고인 물살을 가르는 차바퀴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남자의 귀에는 이제 막 수면을 뚫고 부상하는 잠수함 소리처럼 들렸다.

 

손에 들고 있는 잠수함이 가물가물했다. 남자는 이 가벼운 어지럼증이 싫지 않았다. 우주의 광막함으로 인도하는 정신적 무중력 상태. 어서 내 몸을 끌고 바다 저 깊숙한 심연 속으로 가라, 남자는 뱃속에서 울려오는 고함을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쩌면 바다가 아니라 수억만 년 전 먼 우주에서 보낸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잠수함을 들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변기 위에 잠수함을 올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와 바지를 벗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속옷을 마저 벗어 버렸다. 뜨거운 물을 틀자 좁은 목욕탕 실내가 더운 김으로 가득 찼다. 남자의 엉덩이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가 사라졌다.

 

여자가 보고 싶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강렬한 눈, 뼛살을 발라 먹던 모습까지. 언뜻 여자의 얼굴이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목욕탕 가득한 수증기가 이내 여자의 얼굴을 휘감고 말았다. 남자는 샤워기 아래 서서 강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남자의 머릿속이 짙은 운무에 싸인 듯 멍해졌다. 강한 물줄기를 견디며 서 있을 기운이 없었다. 남자는 욕조에 웅크리고 앉았다. 뜨거운 물이 남자의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드디어 수증기를 뚫고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알몸이 된 여자가 욕조 안으로 들어와 등을 돌린 채 남자 앞에 앉았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머리가 여자의 등을 가리고 있었다. 긴 머리를 쓸어 넘기자 여윈 등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목뼈, 움푹 패인 등골, 가운데 불거진 여자의 등뼈. 남자는 여자의 뼈 마디마디를 세며 섬세하게 등을 어루만졌다.

 

등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찰나 갑자기 여자가 노란 잠수함이 되어 물 속 깊숙이 숨어 버렸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욕조 속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이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물 밑에 숨은 잠수함이 남자를 향해 수많은 어뢰를 발사했다. 잠수함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 한 척이 물을 차고 올라왔다. 잠망경을 올려 남자 쪽을 살피는듯하더니 뾰족한 머리를 들고 남자를 향해 최고속도로 달려왔다. 남자의 몸속으로 잠수함이 들어왔다.

 

문득 남자의 등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돌려 등을 만졌다. 손끝에 등뼈 마디마디가 분명히 잡혔다. 남자는 욕조에서 기어 나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서린 김을 걷어 내자 남자의 퀭한 얼굴이 보였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이 쑥 들어간 낯선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남자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거울에 등을 비추어 보았다. 등골이 패이고 등뼈가 튀어나온 등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자가 그 등뼈에 숨어 남자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