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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의 산조 - 최운

Joyfule 2015. 9. 17. 00:34

 

 

Puerto Madero - 부에노스 아이레스 럭셔리

 

바람 부는 날의 산조 - 최운

 

 

타관은 더 춥다더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겨울은 영상 5도에도 혹한이다. 그러나, 정작 견디기 어려운 것은 추위가 아니라 바람이다. 미운 작부처럼 속속들이 파고드는 바람, 그것은 마음을 저미는 비수요, 가슴을 후비는 송곳이다.

 
이런 날은 천근 남자의 마음도 바람을 탄다. 인생의 겨울을 생각하는 어쭙잖은 사색인이 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서투른 철인도 된다. 그러다가 현실 속의 자화상을 들여다 보며 암울에 빠지는 심약자가 되어 버린다.
몇 손님과의 가벼운 상거래, 종업원과의 두어 마디 잡담, 신문 훑기, 잡지 뒤지기, 그리고 찬 도시락을 열어 젓가락을 들면 외로움이 먼저 식도를 넘는다.


방향감각을 잃은 겨울바람은 쁘로빈시아[①]의 오후를 마냥 흔들어 마음의 안정을 못내 방해한다. 밖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책을 집었다 놓기도 한다. 그래도 오후는 길다. 불경기는 시간 속에 지루함으로 살아있다. 또 몇 손님과의 가벼운 상거래, 그리고 종업원과의 두어 마디 잡담. 이윽고 돈 통을 열어 허약한 하루를 챙긴다.

 
운 뻬소[②]로 감히 벤츠를 산다. 버스 안에는 초췌한 3등 인생들이 졸고 있다. 이가 안 맞는 창문 틈에서 새어 드는 황소바람을 깃으로 막으며, 동족은 아니나 동류임이 분명한 그들 속에 섞이어 같이 눈을 감는다.

 
오늘도 옷값을 깎아 달라는 손님이 있었다. 얄미운 생각에 응해 주지를 않았다. 사 간지 오랜 옷을 바꾸러 온 손님도 있었다. 뻔뻔스러워 보여 안 된다고 잘랐다.
항상 지나놓고 나서야 후회하는 버릇, 늘 현재상황이 아닐 때에만 너그러운 도덕군자가 되는 심보는 무엇인가. 내일 또 다시 너그러울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조차 부담으로 와 닿지 않는 위선은 또 무엇인가.

 
웅성거림에 눈을 뜨니 졸던 동류들이 모두 내리고 있다. 낌새가 고장이다. 마침 네거리를 휩쓸며 줄달음치던 바람기둥이 판자촌 지붕위로 승천하듯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이민 선배들의 한과 땀과 눈물이 고였던 곳, 여기를 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소리가 바람기둥에서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초라하게 누운 꼬레아길을 밟는다.

 

각 나라의 이름을 딴 거리가 허다한 아르헨티나에 우리의 길이 없었다는 것도 참지 못할 부끄러움이었지만, 천신만고로 얻어냈을 단 한 꽈드라[③]의 바나나형 비탈길도 그 몰골이 수치스럽기는 거기서 거기다.

 
어느 날은 찬 비에 후줄근하던 낙엽 밟기가 싫더니, 오늘은 또 발끝에 채는 꼬레아길 나뭇잎의 신음을 듣는 것이 마냥 짜증스럽다. 고샅길 더듬듯 골라 골라 환한 백구[④]에 닫는다. 여기는 왕십리다, 길음동이다. 모래내다, 봉천동이다.

 
동포 식품점의 볼리비아노[⑤]는 과일상자를 들이느라 혼자 바쁘다. 번들거리는 감의 윤기에 이끌리어 한발 가까이 가려는 순간, 젊은 동포 여인이 급히 다가와 선뜻 감을 고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여인을 훔치는 치한으로 변한다. 그 눈으로 감을 고르는 여인의 손 끝에 엷은 피로가 묻어있음을 본다. 소매에 붙어있는 분홍색 실밥에 고단한 이민의 하루가 물들어있음도 본다. 스웨터를 입었어도 너무 좁은 여인의 어깨는 안쓰럽다. 감에 어리는 향수의 눈빛은 애처롭다. 밑 화장도 없는 여인의 얼굴이 감빛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항상 밤에 더 짓궂은 것인가. 미장원을 출입한지 오래된 여인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흩으면서 귀밑에 숨어있던 연민의 색깔을 보여준다. 희어서, 고와서 너무 슬픈 부위다.

“시어머님이 감을 좋아하세요.”

반듯한 서울말씨는 단감 맛이다. 저만치 가버린 여인의 자리는 감빛 공허로 남는다.

 
까라보보[⑥]를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진다. 작아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외등은 허공에서 졸고, 가로수는 맨몸으로 떤다. 그 밑에 초로의 겨울 남자가 혼자 서 있다.

 
밤바람이 다시 분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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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쁘로빈시아(Provincia): 지방 (수도에 대해서)

[②] 운 뻬소(Un Peso): 1 뻬소

[③] 꽈드라(Cuadra): 거리의 구획. 1 꽈드라는 100m.
[⑤] 볼리비아노(Boliviano): 볼리비아인.

[⑥] 까라보보(Carabobo): 부에노스 아아레스의 거리 이름. 한인촌의 중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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